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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만드는 기계
김진송 지음 / 난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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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어떤 책들은 익숙하지 않은 구성으로 가능한 한 최대치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가령 작은 챕터의 글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면 어떠한 회화를 연상케 한다든지, 드러내지 않은 실타래들을 타고 가다보면 어떤 주의를 말하고 있다든지 여러 다면적인 면모들 말이다. 시간 순으로든 잘 짜여진 플롯의 전개든 숱하게 봐온 차원을 벗어나 긴밀하게 의도된 텍스트 밖의 이미지’가 연상되면 상상의 확장은 무한대로 증폭되는 것이. 안의 이야기가 전하는 세계, 그리고 그 밖의 전능한 구축들이 이중적 혹은 다중적인 차원으로의 유기성으로 생동감을 더해 주는 힘은 낯설고 크다.

 

 

 

살면서 이런 책들을 많이 봐온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건 흥미로운 발견이다. 우연이든 아니든 책의 작가들이 미학에 관심이 많다거나 미술계쪽 정통자, 예술가, 미술평론가이거나 하는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었다아무래도 학문적으로 이미지를 주요하게 다루다보니 자연스레 이야기 구조 외 이미지화 되는 문제, 텍스트 밖의 전체적인 유기성에도 신경을 쓰게 된 결과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다 그러한 의도나 배경이 있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텍스트 자체로서의 새로움 외에 좀 더 다른 영역의 교합을 시도하는 일은 꽤나 근사한 일이라 할만 하다. 사실 이야기만으로는, 보는 이에 따라 익숙함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 문제일 수도 있는지라, 비틀어서 다른 방향으로 덧댈 수 있는 모색은 뜻밖의 산물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한국문학을 두고 더 이상 읽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람들도 보면, 더 이상 새롭지 않아서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유야 분분한 일이고,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도 진짜 문제인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은 일이며, 더 낫고 아니고를 따질 수는 없을지 모를 일이다. 본격문학을 하는 작가들이 들으면 허탈하고 섭섭한 소리라 하겠지만 좀 더 다양해진 소설이나 시를 기대하는 시대의 요구가 많아진 것이 사실이긴 하니까. 예술에 있어 참신함이란 그저 각자의 기준, 기호에 듣고 보기 좋은 것을 선택하면 그만인 거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를 보고 전형적인 소설이나 에세이를 벗어난 형식이란 것에 많은 호기심이 자극되어 좋았다. 작가가 손으로 빚어낸 작품들을 먼저 훑어보고는 영락없이 공예가인줄로만 알아서였을까, 다하지 못한 스토리를 더하기 위해 이 책이 나왔겠구나 하는 선입견으로 책을 넘겼다. 그런데 그가 출판기획자였고, 국문학과 미술사를 공부한 이력이 더 먼저였다라는 소개 글을 읽고 난 후로는 이내 이야기로의 관심이 나무인형에 쏠리게 되었다.

 

과연 한 사람의 인생이란 소설 속의 기승전결 보다 훨씬 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펼쳐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성품이 맞지 않자 그렇다면 내가 직접 만들어보리라고 시작된 나무 깎이 인생이 전혀 다른 삶으로 인도해준 계기라니. 엉뚱하지만 이런 우연이 <이야기를 만드는 기계>를 읽으면서도 그 면면 기발한 상상력으로 넘쳐나 보였다.

중년의 인자한 미소가 번지는 익숙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십대의 풋풋함이 느껴지는 발랄한 기개가 돋보이는 것이 이 작품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줄곧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에 살고 있는 말하지 못하는 존재들, 우리의 세계이면서도 결코 주시하지 못한 이야기, 혹은 미지의 공간 등 주로 일상 밖의 가공의 세계를 그린다. 그것은 그가 나무를 깎고 또 다른 나무와의 이음새를 철로 잇는 이질적인 두 재료의 조우와도 참 많이 닮아 있다 

익숙하지만 다 안다고 할 수 없는 관계, 우리의 삶이지만 소외된 것들, 알 수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는 일, 대게가 그런식이고 익숙함 속에 낯설음이 언제라도 있다.

 

 

 

실존하는 재료와 가공의 이야기를 더해서 소설과, 이미지로의 재현을 꾸며낸 것은 김진송 작품세계에 참신함을 더하는 조합이다. 그가 만든 수많은 작품들은 주로 버려진 나무들에 의해 만들어 졌다. 투박하고 뿌리가 제거되어 잃어버린 생명의 작은 토막에 불과한 것들이 주인공으로 재탄생 된다. 용케도 작가의 눈에 띄어 깎여지고 다듬어져서 온기를 품고 서사를 잉태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단 몇몇 사진의 과정으로도 증명된다. 그리고 그렇게 다듬어진 팔과 다리를 잇기 위해서 철이라는 이음새가 있어야 비로소 유연성을 갖는다는 것은 새삼 재미있다. 이질적인 두 서사가 만나 전혀 다른 세상을 그려내고 상상하게 하는 움직임이 그가 말하는 궁극의 핵심인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이야기에는 철저하게 둘 만의 몰입의 순간이 빛나는 고요함이 흐른다. 혼자이든, 둘이든, 그 이상이든 그들만의 세상에서 가장 최소한의 단어와 간결함이 내제되어 있다. 그래서 각각의 이야기들은 마치 작가와 작품 속 자아의 둘 만의 이야기처럼 강렬한 물음과 대답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몰입의 순간이 빛나는 이유는 나무라는 주재료가 주는 묘한 슬픔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 불에 태워지거나 부패될지도 몰라서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없는 숙명, 그것은 인간의 모습과도 너무 닮았기 때문은 아닐지. 이런 슬픔이 아마 내 앞의 존재에만 집중하게 하는 몰입의 시간을 선사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더 이상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세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없는 나무인형이 가만히 앉아 계속 그렇게 날 바라봐 준다면 나는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걸까? 부유하듯 떠돈 생각들이 기계 밖을 비집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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