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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ㅣ 대교북스캔 클래식 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명신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한때 프랑스 여배우 '줄리엣 비노쉬'에게 매료되어 그녀의 출연작들을 섭렵하던 시절, 단지 그녀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봤던 영화가 바로 '폭풍의 언덕(1992)'이었다. 제대로 된 원작은 고사하고 전체 줄거리까지 완전히 묻어둔 채로 영화감상을 시작했는데 방대한 원작을 두 시간 안에 줄여놓다보니 생략과 상징이 난무하여 전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아주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줄리엣 비노쉬의 얼굴 외엔 영화 속 장면 하나 떠오르지 않지만, 너무나 음울한 느낌이 떠오르는 걸 보면 내게 그 영화는 그리 큰 감흥을 주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물론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영화를 다시 보게 된다면 느낌이 다르지 않을까 싶지만.
그때의 음울한 기분 때문이었을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테스', '제인 에어' 등의 고전을 섭렵하는 와중에도 '폭풍의 언덕'에는 쉽사리 손이 가질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이 읽혀왔고 추천하는 고전이 아닌가. 고전도 즐기고 그때 영화로 인해 만들어진 편견도 없앨 겸 언제 한 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완역판이 출간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왔다. 그래서 기회는 바로 지금이닷!했는데 책을 처음 받았들었을 땐 550 페이지의 압박에 순간 헉;했다. 그러나 이야기에 탄력이 붙자 그 두께도 이겨낼 수 있었다. ㅎㅎ (워낙 유명한 책이라 줄거리는 생략; ^ ^;)
<폭풍의 언덕>은 히스클리프의 등장으로 시작해 그의 퇴장으로 끝이 난다. 어느날 예고없이 나타난 히스클리프로 인해 두 집안을 휩쓰는 거대한 폭풍의 소용돌이가 시작되고, 그가 사라짐으로 인해 사나웠던 폭풍은 잠잠해지고 예전의 평화로움이 되살아난다. 그는 그렇게 왔다가 사라졌다. 어디서 왔는지, 왜 그렇게 갔는지 아무런 단서도 주지 않은 채. 소설 속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는 과연 악마였을까. 아니면 단지 격정적인 열정이 복수라는 그릇된 방향으로 이어져버린 그저 불쌍한 한 인간이었을까. 과연 집착과 광기에 가까운 그의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를 떠올리면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그런 까닭에 그의 성격이 결코 맘에 들진 않지만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발산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땐 흐릿한 예전 기억만으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가 거의 대등한 비중의 주인공인줄 알고 있었는데 책의 중반 쯤 캐서린 언쇼가 죽어버리는 게 아닌가. 아직 절반이나 남았는데 벌써 죽으면 어쩌라고! -0- 그러나 곧 그녀의 분신 캐서린 린튼이 어머니의 바톤을 이어받아 히스클리프와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솔직히 제멋대로 히스테리를 부리다 자기 분에 못 이겨 죽음까지 이른 엄마 캐서린 언쇼보단 다소 거만하고 가끔 짜증날 정도로 인정이 넘치지만 명랑하고 눈 앞에 닥친 현실을 현명하게 이겨나갈 줄 아는 딸 캐서린 린튼이 훨씬 맘에 들었다. 다른 분들도 그렇지 않았는지? ^^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대부분 지독히 비정상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 폭군 술주정뱅이 힌들러, 정신착란증을 보이는 캐서린, 사랑과 복수에 집착하는 히스클리프, 이기적이고 비겁한 어린 린튼, 그런 짜증나는 린튼을 늘상 이해하는 어린 캐서린, 주위사람들에게 잠시도 저주를 멈추지 않는 하인 조셉 등 어찌 저런 사람들을 한데 모아놨을까 싶을 정도다. 그렇지만 그들은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도 보인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이후 삶을 포기해버린 힌들러, 조건 때문에 린튼과 결혼하고 그런 그녀를 미워하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한 사랑을 놓치 못하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때론 오만하지만 사려깊은 어린 캐서린 등을 통해 에밀리 브론테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모습과 따뜻한 모습을 함께 담아낸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에게서 우리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래서 그들을 미워하다가도 어느새 동정하게 된다. (그러나 끝내 동정할 수 없는 인물이 있었으니.. 비겁쟁이 어린 린튼과 저주쟁이 하인 조셉이었다. 그들은 절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0-)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어긋난 사랑으로 린튼 남매-애드거와 이사벨라는 물론 그들의 자식인 캐시와 린튼까지 불행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만약 그들이 사랑을 이루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들의 행복여부는 둘째치고 최소한 린튼 남매와 그들의 부모님의 삶이 그토록 슬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린튼의 부모님은 캐서린의 열병에 옮아 죽는다). 그러나 삶이란 언제나 그런 최선의 방식으로만 이어지지 않는 법. 그래서 이렇게 슬프고 지독하며 광적인 사랑이 생기고 그것이 또다른 불행의 폭풍을 몰고 오기도 하는 것이리라.
-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히스클리프에게 알릴 수가 없어.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잘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뜬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은 똑같아. (131쪽, 캐서린의 말 中)
서른의 나이로 요절한 에밀리 브론테의 유일한 소설이라는 <폭풍의 언덕>은 고전의 감투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뛰어난 작품이다. 또한 다중적인 인간의 내면과 삶과 사랑의 여러 모습을 담아내고 있어 책을 덮고 난 후에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고전은 여러번 읽을수록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 많다고 하니 다음에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많은 분들이 그렇듯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가장 진한 인상을 남긴 인물은 히스클리프다. 그를 생각하면 사랑인지 집착인지 구별조차 힘든 광기어린 그의 삶의 목표가 더욱 슬퍼진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구일 것이다. 살아 숨쉬는 내내 이런 욕구불만으로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괴롭혔던 히스클리프. 그는 과연 저쪽 세상에서는 그가 원하던 캐서린과의 사랑을 이루었을까. 부디 그곳에서는 마음놓고 그녀와 온전히 사랑할 수 있길! 그래서 사랑으로 상처받은 그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길!!
+ 혼잣말 +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원래 그 시대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그렇게도 많이들 죽었을까? 왜 이 책 속 등장인물들은 그리도 잘 죽는지.. 원래 모두 약골인 건지.. 캐서린의 열병이 옮아 죽고(애드거 린튼의 부모님), 심하게 성질 부리더니 얼마후 바로 병 걸려 죽고(캐서린 언쇼), 타지까지 가서도 젊은 나이에 죽고(이사벨라 린튼), 폐병으로 죽고(힌들리의 아내), 찬 날씨에 밖에 좀 있었다고 독감 걸려 죽고(애드거 린튼), 원래 약해빠져서 콜록거리다 죽고(히스클리프의 아들 린튼), 혼자 알 수 없는 환희에 들떠서 갑자기 죽고(히스클리프).. 죽고 죽고 죽고... 이렇게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너무나 일상적으로 죽어버린다. 아무리 200년 전이라고 해도 두 집안의 사람들이 이렇게 줄줄이~ 줄초상 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