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 손호철의 세계를 가다 1
손호철 지음 / 이매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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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고백하건데 나는 라틴 아메리카에 관해선 거의 무지한 상태다. 얼마전까지도 잉카와 마야 문명이 헷갈렸고, 한때 서점가를 휩쓸며 사람들을 열광시켰던 체 게바라 평전도 아직 읽지 않았으며(대신 청년 체 게바라를 다룬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봤다), 그들의 정치와 경제를 관통하는 역사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다. 겨우 라틴 아메리카의 자연환경이 끝내주게 아름답다는 것과 반면 그들의 경제는 거의 파탄 지경이란 것 정도나 알고 있었으려나. 박민규의 소설 <핑퐁>에 나오는 2등신 큰바위 얼굴 거대석상 '모아이'가 있는 이스터 섬이 칠레에 속한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관심을 볼 때 나와 같은 분들이 아마 적지 않을 듯 하다. 후후후.


화가를 꿈꾸다 부모의 반대로 정치학과에 입학했지만 선배를 잘못(?) 만나 운동권에 발을 들이고 8년 만에 학교를 졸업해서 기자가 되었으나 정치적 망명으로 인해 학문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비운(?)의 사나이 손호철 교수. 그가 세 번의 라틴 아메리카 여행을 다녀오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을 진보적 정치학자의 시선으로 뽑아낸 것이 바로 이 책,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보다>이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여행기를 접해보기도 처음이지만(쿠바 여행기 <느린희망>은 어렵사리 구해놓고 아직도 못 읽고 있다;;), 일반 여행객의 시선으로 훑은 아름다운 자연이나 사람들에 관한 서술은 물론, 라틴 아메리카를 이루는 각 나라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정치적, 경제적 소용돌이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으며 그들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저자의 시선이 무척이나 새롭고 좋았던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간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몰랐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기뻤다. ^ ^



저자가 이 책에 소개된 나라는 쿠바,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멕시코, 과테말라로 총 8개국이다. 그리고 여덟 개의 나라 모두 어느 하나 인상적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역사, 정치, 사회, 경제, 자연환경의 측면에서 되새길 만한 이야기 꺼리를 최소한 한둘은 가진 나라들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와 지리상 정반대에 위치한 남미의 여러 나라들은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로 인해 오랜 식민지 시대를 거쳤고, 독립한 후에는 낙후된 경제를 되살린다는 명분 아래 실시된 군사 독재를 겪었다. 그런 점들 때문인지 그들의 이야기가 그리 낯설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마치 우리의 과거를 보는 듯한 마음에 안타깝기도 하고, 불안한 우리의 미래를 만나는 듯해 서글프기도 했다.

이들 나라 중 어느 하나 슬픈 역사를 갖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공통된 원인이 바로 유럽 제국주의의 침략이었다. 콜럼버스의 상륙을 시작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로 대표되는 서양세력은 아메리카 침략 전쟁을 통해 엄청난 수의 원주민을 대량 학살했고, 그들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전통 문화를 파괴했으며 그 자리에 자신들의 침략을 상징하는 건축물들을 세웠다. 그리고 잉카와 마야, 아즈텍 등의 고유한 유산들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엔 여전히 흉한 서양식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어 아픈 식민지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치.. 지금은 없어진 조선총독부 건물같은 느낌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체 게바라'로 대표되는 쿠바와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실천하고 반미주의를 외치며 미국에 대항해 독자노선을 걷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악랄한 독재정권으로 인해 잊을 수 없는 것은 칠레의 피노체트와 페루의 후지모리였다. 인간 백정으로 불릴 만큼 대학살을 저지른 피노체트는 끝끝내 반성의 기미없이 죽어버렸고, 일본계 페루 대통령이었던 후지모리는 경제를 안정시켰으나 온갖 비리와 인권 탄압 등의 범죄로 코너에 몰리자 페루를 버리고 일본에 망명해 버렸다.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세상을 휘어잡고 헌법을 뜯어고쳐 장기 독재 집권했으며,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하면 국민들이 (그의 모든 잘못을 덮어버리고) 다시 그를 그리워한다는 점에서 후지모리는 우리나라의 박정희와 참 비슷한 면이 많았다. 그래서 씁쓸했다. 

사회적으론 아르헨티나의 '5월의 어미니회'를 잊을 수 없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탄압한 아르헨티나의 군부에 대항해 매주 목요일 하얀 스카프를 메고 항의집회를 열어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은 그녀들. 사라져 버린 자식들을 대신해 민주화를 외치는 그녀들의 모습은 여전사와 다름없었다. 사체 발굴, 금전 보상, 기념물 건립을 거부하며 자신들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5월의 어미니회와 비교해 어느새 그 의미가 희석되어버린 듯한 우리의 5ㆍ18 민주항쟁을 떠올리는 저자를 보며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5월의 어머니회가 나이든 어머니들이 모여 매주 항의집회를 연다는 점에서 나는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며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여는 우리의 '정신대 할머니들'이 생각났다. 그녀들의 외로운 투쟁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경제적으론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식민지배로 낙후되었고, 미국의 '신자유주의'로 황폐해져 있었다. 한때 호황을 누렸다가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무분별하게 수용해 경제가 파탄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볼 때 결코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또한 힘든 남미의 여러 국가들이 우리의 과거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개방을 요구하고 미국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나라는 여전히 눈치를 보고 있다. 무너진 경제로 허덕이는 남미와 지금 우리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한숨만 깊어질 뿐이다.

또한 남미에 강하게 부는 '중국 바람'을 잊을 수 없다. 중국의 경제적 부상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영향력이 남미까지 미칠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제적 발전과 거대한 인구로 인한 원자재와 대두 같은 식량 수입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의 나라에 경제적 힘이 되어주고 있단다. 반대로 비교적 싼 인건비로 근근히 살았던 과테말라에는 중국의 값싼 인건비가 독이 되어 어려운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고.


관광자원으로 이어지는 남미의 자연환경은 말이 필요없을 정도다. 모두가 너무 아름다워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즐겨보는 영화 잡지의 기자가 어느날 회사를 그만두고 1년간 남미여행을 하며 자신의 블로그에 글과 사진을 올린 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는데 이 책에 소개된 곳들 또한 나의 시선을 뺏기에 충분했다. 그중 잊을 수 없는 곳은 바로 거대 석상 모아이가 있는 이스터 섬이었다. 저자도 적극 권하는 이곳은 전에 티비에서 모아이의 정체에 대해 추적하는 다큐를 본 적이 있는지라 그곳의 설명이 한층 실감나게 다가왔다. 언젠가 늙기 전에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은 곳이다.

그와 함께 영화 <후아유>에서 그 정체를 처음 접한,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호수 '티티키카'도 흥미로웠다. 호수가 얼마나 크면 그 위에 갈대로 만든 인공섬을 띄우고 살아갈까. 도무지 상상이 안된다. 더불어 티비 화면에서 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우리나라의 마이산 탑사같은 신비로움이 느껴졌던 곳 '마추픽추'. 마야 문명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곳에 지그재그로 달리는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날이 오긴 할런지. 또한 멕시코의 마야-아즈텍 유적의 피라미드들도 그에 못지 않게 신비스러웠다. 인류 최대의 원시림 아마존에서 따뜻하고 느리게 흐르는 리우네그로 강과 차고 빠르게 흐르는 아마존 강이 만나 12km 가량 서로 섞이지 않고 나란히 흐르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장관이었다.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본 저자는 그곳에서 슬픔과 환희, 절망과 희망을 함께 느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삶의 여유를 잃지 않고 낙천적으로 사는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 그런 그들을 보고 있으면 물질적 풍요를 위해 아등바등하는 우리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지금보다 조금 덜 가지고 조금 덜 누리더라도 진정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과거와 현재의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것들을 비교적 쉽고 편하게 들려주는 책,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 아메리카를 보다>. 미처 알지 못하고 관심을 갖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남미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한 탓에 읽기가 아주 쉬운 편은 아니었지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새로운 앎의 기쁨과 편견을 깨는 짜릿함을 즐길 수 있었던 책이었다. 내가 느꼈던 즐거움들을 보다 많은 분들이 느낄 수 있었음 좋겠다. 앞으로도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책을 내고 싶다고 하니 손호철 교수의 다음 책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 ^







* 보탬 *

책의 쿠바 여행기 첫머리에 나오는 콜럼버스의 발견과 정복 이야기.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 아니고 '정복'한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에 백배 공감한다. '신대륙'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이 단어 하나에서 유럽인들의 자기중심적 사고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 그들이 인디오라고 부르는, 원래 오랜 시간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던 원주민들의 입장에선 그들은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탐험가가 아니라 자신들의 평온한 삶을 깨는 '침입자'다. 어느날 내 집에 들어와 대대로 살아왔던 땅을 빼앗고 온갖 자원을 빼앗고 목숨까지 빼앗는 잔학무도한 강도인 셈이다. 유럽인들의 아메리카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곧 그곳에 살아왔던 원주민들의 존재를 그대로 무시해버리는 파렴치한 행동이다.

영어시간에 아무런 의심없이 Columbus discoverred America라는 문장을 수동태로 바꾸며 우리도 은연중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고, 유럽인들처럼 그를 당연히 위대한 '발견자'라고 생각하게끔 교육받았다. 은연중에 백인 우월주의적 사고에 물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것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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