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vs 영화 

원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롤)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팀 버튼)

 

            

내가 곧 세계다. 그러니 너역시 나인 셈이지.

 *스포일러 있음 

 

 -팀 버튼의 이 영화는 엄밀히 말하면 원작소설의 '속편'이다. 예전에 원더랜드에 갔었던 사실을 잊어먹은 앨리스가 나이를 먹고 다시 그 동네에 가서 겪는 모험담이다. 이 속편에서 원작은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팀 버튼이라면 의례 사용하고 싶었을 시공간 실험이 많았을 텐데도 영화는 어정쩡한 3D효과를 자랑할 때 빼고는 별다른 모험을 시도하지 않는다. 원작의 싸이키델릭한(좀 미친 것 같은) 매력이 보이지 않는다. 옮겨온 것들은 캐릭터 뿐으로, 그나마 팀 버튼 특유의 '화장질'이 잘 먹힌 경우이기는 하다. 붉은 여왕만큼은 정말 못되고 귀엽다. 헬레나 본햄 카터 만세. 덤으로 앤 헤더웨이도 만세. 

  그런데 팀 버튼이면 이걸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그의 영화 내면에 흐르는 원동력이 바로 루이스 캐롤과도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팀 버튼의 영화적 뿌리인 독일 표현주의 영화와 B급 호러영화 모두 고딕 소설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팀 버튼은 고딕 문학을 손쉽게 영화로 만들어 왔다. 그렇다면 고딕 문학과 시대를 공유하면서 그 초현실적 특성을 괴담 이외의 세계로 확장시킨 루이스 캐롤의 이 기념비적인 작품의 영화화도 기대할 수밖에. 그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팀 버튼의 가능성의 한계를 보여준 것에 그쳤다. '영화 작가'와 스타일리스트의 차이랄까.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10대 후반에 접어든 주인공 앨리스가 원더랜드에서 가장 재미없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주인공이 '물리학적으로 왜곡된' 시도들이 가능한 원더랜드의 특징을 전혀 (주체적으로) 이용하지 않으면서 영화는 그 매력을 잃는다. 물론 그런 시도를 하려면 시나리오가 원작 수준의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난관이 있다. 언어-논리 유희와 시공간에 대한 사고실험을 영상 속에서 책과 같은 수준으로 보여주기는 매우 어렵다. 원작에서는 하나의 논리 혹은 규칙이 만들어지면 세계가 즉각 그에 반응한다. 법칙은 발견되지 않고 제시된다. 나의 말이 세계이다. 나의 시선이 곧 세계를 규정한다. 그러나 영상은 이미 만들어진 영상을 통해 관객들이 세계를 받아들인다. '글'은 추상적인 명제나 지시를 표현할 수 있지만, 영상은 감각에 의존하는 이상 순수한 명제 혹은 논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앨리스의 영화화는 매우 어렵다. 영화는 세계를 보여줄 수는 있지만 세계에 지시하는 목소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변해랴 얍' 하고 말하면 뾰로롱 하면서 주위가 바뀌는 디즈니 식의 연출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 팀 버튼은 원작의 '속편'을 만들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실험을 포기하고 '이제 그런 요상한 거 못하는' 숙녀를 주인공으로 들여놓은 것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같은 해에 이 앨리스적인 실험을 다른 영화에서 만나게 된다. 바로 <인셉션>이다)

  팀 버튼의 앨리스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엔딩이다. 원더랜드에서 초현실의 세례를 받았던 아이는 온데간데 없고, 다시 그 세계로 다녀 온 숙녀는 뜬금없이 주체적 여성상을 내세운다. 주체적인 게 나쁘진 않은데, 앨리스가 선택한 방식은 하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국주의 무역상이 되는 것이다. 그녀 자신이 현실 속에서 원더랜드의 여왕과 같은 역할을 원한다. 원더랜드의 붉은 여왕과 흰 여왕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 흰 여왕은 정의의 편 같지만 사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다. 자신이 공격받지만 않으면 나머지 세상의 일부를 악에 맡겨두어도 상관없는 사람이다. 악과 타협하는 선, 그리고 늘 공격적인 악은 탓할 상대와 정복할 상대로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즉, 다시 돌아온 원더랜드는 현실정치의 세계다. 이 단 한 가지만이 원작 앨리스의 '주체에 따라 변하는 세계'라는 명제를 따른다. 식민지 자본주의 시대의 예비 여걸의 시선이 닿는 순간 원더랜드가 권력 투쟁의 장으로 변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팀 버튼은 원작 앨리스의 특징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다만 도전하지 않은 것뿐일까? 아니면 이건 그냥 정치적인 우화일까? 어느 쪽이건 간에 귀여운 <프랑켄위니>로 데뷔해서 배트맨과 가위손과 화성침공(!)을 만들었던 그 사람은 이제 만나기 쉽지 않을 듯하다. 

 

-외국소설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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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1-04-14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싸! 영화의 엔딩이 참으로 못마땅했던 사람으로서
이 글은 오늘 아침 회장님과의 [계급장떼고얼굴시뻘게지며메롱하기]보다 훨씬 신납니다!
개인적으로 팀 버튼은 확실히 앨리스의 특징을 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흰 여왕을 흰 여왕으로 표현한 건 매우 심하게 감독이 게을렀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재는 게으른가, 뭐 그럴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


외국소설/예술MD 2011-04-14 13:53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엔딩을 처음 봤을 때는 그저 황망하기만 했는데, 생각해보니 영화의 전개에 따르면 매우 합리적인 결말이 아닌가 싶었어요. 그 합리적인 게 싫은 거였지만요.;

팀 버튼은 어느 시점 이후로 비주얼에 골몰하는 것 같습니다. 소설을 각색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오리지널 스토리들은 무게감이 떨어지고요. 게으르다고 말씀하신 건 아마 각색-설정 과정에 대해서겠죠? 저도 그 점에서는 의아할 정도입니다. 애시당초 상대적으로 그런 능력이 부족한 사람(미셸 공드리라거나)도 있지만, 팀 버튼의 초중기 작품들은 그 기괴한 재기발랄함이 스토리에도 옮아 있었는데요. 어쩌다 이렇게 변했는지는 저도 궁금하네요. 정말 게을러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