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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을 가꾸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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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성과 가설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라. 그야말로 중산층의 향기로운 콧노래가 귓가에서 살랑거리는 듯한 제목이다. 이런 생각을 부채질하는, 화사한 노란색 표지. 나도 모르게 심술이 불쑥 올라왔다. 정원은 무슨, 손바닥만한 화분 하나도 책상 구석에 올려놓고 키울 여력이 없는데! 팍팍하게 사는 내가 꽃 구경하면서 물이나 뿌릴 것 같은 고상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혹시 이거 알고 보면 윤선도처럼 자연 속에서 사시사철 유유자적 단사표음 물아일체 자연합일하는 것처럼 노래해놓고 정원사니 일꾼이니 왕창 불러 엄청 부려먹은 거 아냐? 


마지막 장까지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잘못했어요, 헤세 아저씨. 제가 아저씨에 대한 지식이 너무 없었어요. 이 책이 고상하고 향기로운 건 맞지만, 제 의심은 아저씨가 아끼셨던 유다의 나무를 꺾어놓은 열대 태풍처럼 못되먹고 야만스러운 것이었어요. 용서해주세요. 헤세 아저씨라는 호칭이 거슬리신다면 헤세 님이라고 할까요? 여튼간에 진심으로 반성합니다ㅠㅠ


미안함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온 다음 손님은 새삼스럽게도 이런 생각이었다 : 역시 소설가들이 쓴 에세이는 재미있구나. 이야기를 다루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게 술술 잘 읽히는구나. 그래, 이제까지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에세이집의 대부분이 소설가가 쓴 에세이집이었어. '소설가가 쓴 에세이는 재미있다'는 가설이 하나 성립하는군. 앞으로 소설가들의 에세이를 읽을 땐 '과연 재미있을까' 인상 쓰며 표지 넘기지 말아야지. 현재로선 확신에 가까운 이 가설도 어디까지나 귀납적인 추리에 의한 것이니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깨지겠지만, 뭐, 그땐 또다른 가설을 세우면 되지.



2. 아름다운 노동, 아름다운 정원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게으른 정원사의 즐거움', '작지만 반가운 손님들을 초대하기', '다시, 소중한 것들이 말을 건다', '만약 내가 고독 속에만 머물러 있었더라면' 순서로 길지 않은 글들이 4-6편씩 묶여 있다. 그렇다고 하나의 장이 하나의 주제로 구성된 건 아니다. 전체적으로 헤세가 만나고 감정을 공유했던 나무들, 꽃들, 나비와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들마다 자연과 공존하며 그 속에서 소박하고 아름답게 사는 것을 추구했던 헤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고즈넉하면서도 조금은 쓸쓸하게.


헤세는 스스로를 게으른 정원사라 칭하고 있지만, 그것이 겸양의 표현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제대로 먹이고 재우고 단장하려 해도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가. 내맘대로 주물럭거릴 수 없는 나무와 꽃과 풀을 키운다는 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인내와 시간과 의지를 필요로 하는 게 당연한 것. 헤세는 일하기 편한 옷을 입고, 성실하게 일을 한다. 힘이 들고 몸 여기저기가 아프지만 솔직하게 몸을 쓰고 요령을 피우지 않는다. 정성을 기울이고 마음을 준다. 머리로 계산하고 손익을 비교하고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 그의 노동은 아름답다.


일은 늘 어렵다. 새해 들어 처음으로 우리 머리에서 땀이 흘러내린다. 우리가 신은 부드러운 장화는 무거운 흙 속으로 빠져들고, 삽자루를 잡은 손에는 물집이 잡혀 통증이 느껴진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감미로운 3월의 햇살은 벌써 너무 덥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렬하게 내리쪼인다. 피로에 젖어 등이 아파 오고 몇 시간째 힘들게 하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들어서면 집 안에서 피어오르는 난로의 열기가 불현듯 낯설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이 노동이 헤세에게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명예를 가져다줄 리 없다. 오히려 헤세가 그려낸 자신의 모습은 가난한 촌부에 가깝다. '보덴 호수와 작별하며'에서 그는 이사의 추억을 차분하게 나열하며 카사 카무치에서의 12년을 궁색하고 빈털터리가 된 문인의 삶이라고 요약한다. 우유와 쌀과 마카로니로 근근이 끼니를 때우고, 낡은 양복은 닳아서 올이 풀어질 때까지 입었으며, 가을에는 숲에서 밤을 주워와 저녁식사로 대신하는 초라하고 어딘가 수상쩍은 이방인이었다고, 스스로를 설명한다. 기실 책 중간중간에 실려 있는 정원 속 헤세의 사진도 사람들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정원'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그렇기에 헤세가 들려주는 자연의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광택 나는 신발과 모자와 옷을 몸에 두르고 그늘 아래 편히 앉아 풍류를 즐기는 이가 자연을 노래할 때 느껴지는 이물감과 기름기가, 이 책에서는 쫙 빠져 있다. 대신 정원일을 하러 가는 길에 이끼와 덤불, 들판이 야생화되어 점점 더 숲이 우거지는 것을 보고 '일꾼들이 제대로 들판을 정리하지 않았잖아!'하고 화를 내지 않고 감탄 어린 시선으로 자연의 생명력을 예찬하는 겸손함이 자리한다. 천천히 정원 안을 걸으며 돌아보다가 정원용 도구를 몇 가지 챙겨 들고 경사면을 한 칸씩 한 칸씩 굼뜨게 따라 내려가면서 몇 년 전에 목초지에 심어 놓은 무스카리가 피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미소 짓는 이의 눈에 비친 자연은 늘 내게 풍요를 선물하지 않는다. 꽃은 금세 피었다 지고 나비는 날아가 버리며 때로는 튼튼하던 나무도 부러진다. 그렇게 죽어가기에, 다시 태어난다. 헤세의 말대로 자신을 기다리는 땅을 향해서, 새로운 생명의 순환을 향해서. 경이롭게도 모든 걸음은 죽음이며 모든 무덤은 어머니이니까. 





3. 숨막히는 장면들, 눈부신 문장들


책을 읽다 꿀꺽, 침을 삼키면서 집중하게 되는 장면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


나비는 앉아서 두 날개를 포개고 있었다. 날개의 아랫부분은 매우 칙칙한 갈색 빛과 잿빛을 띠었는데, 날개를 다시 쫙 펴자 비로드처럼 부드럽고 진한 자주색이 화려하게 드러났다. 거기에는 샛노란 색 줄무늬와 푸른색 점들이 멋지게 줄지어 있었다. 그 줄무늬는 날개의 밝은 가장자리 색과 물감을 칠한 듯한 검붉은 색 사이에서 너무도 고상하고 우아하게 돋보였다. 나비는 마치 리듬을 타듯이 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부드러운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머리카락만큼 가는 여섯 개의 작은 다리를 내 손 등 위에 단단히 붙여 몸을 지탱했다. 잠시 후 그 나비는 내가 놓아주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뜨겁고 밝은 햇살 속으로 날아가 저 멀리로 사라지고 말았다.


머릿속에 나비의 모습이 차라락 그려지는, 그러면서 이 나비를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는 헤세의 모습까지 동시에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묘사. 쓰잘데 없는 감정이나 군말 따위 섞지 않고 하나의 그림을 눈 앞에 펼쳐낼 수 있게 하는 작가의 능력에 새삼 경외감 비슷한 기분까지 들었다. 이런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잠이 확 깨는 듯 했다. 


게다가 광채가 나는 문장들은 어찌나 많은지! 자연에 대한 문장은 물론이고 어리석고 단조로운 도시의 삶이 얼마나 한심한지, 기술과 역사의 진보와 발전에 대한 낙관주의가 얼마나 대책 없는지 신랄하게 설파한 부분들까지도. 헤세의 어떤 생각들은 내가 가진 생각들과 너무 비슷해 '이거 뭐야 무서워...'하다가ㅎ 내 생각이란 것도 결국은 내 앞의 누군가가 떠올린 것을 반복하고 변주한 것에 불과하겠지 싶었다. 책을 읽다가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나오면 붙여 놓은 포스트잇이 이만큼. 



헤세의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재미있었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자신 있게 '맞아맞아' 대답하진 못할 것 같다.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과 보낸 시간이 즐거웠던 건 사실이지만, 그 시간만큼 어린 시절 <데미안>이나 <싯다르타>나 <수레바퀴 아래서> 등등을 읽던 순간들도 흥미로웠으니까. 대신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헤세의 삶은 헤세의 소설만큼 아름다웠다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아름답게 사는 것 하나만은 늘 자기 마음대로 했노라 확신했다고. 그렇게 장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삶은 확신 없는 사람들의 삶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고.




4. 마지막으로,


제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문장들. 이런 문장을 책에서 만나면 문장을 쓴 이에게 마구 고마워서 인사라도 하고 싶어진다. 삶은 죽음을 향해 가고 죽음은 다시 삶을 낳듯이, 꺾어졌던 삶의 노선은 언젠가 상승할 것이고 또 언젠가 다시 꺾어질 것이다. 그러나 계속 살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극복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다시 극복할 것이다. 아마도 더 자주 극복할 것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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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토끼 2013-10-06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은 정말 멋지네요..고독한 삶을 살았던 헤세를 생각하면 마음이 찡하면서도 무지 힘이 되는 말입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읽으시다니!! 저 포스트잇들!!)

alma 2013-10-19 11:34   좋아요 0 | URL
아 이렇게 댓글을 늦게…………………아이쿠 죄송하네요ㅠ 저 문장이 '특히' 마음에 들어서 이미 몇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했어요ㅎㅎ (근데 얼마전 이레에서 나왔던 이 책의 '전 버전'을 봤지 말입니다. 그 책이 좀더 좋아 보여서 기분이 묘했답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