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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렛미고 - Never Let Me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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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 let me go


‘아일랜드’....와...‘스카이 크롤로’ 비교해서 보기... 비교라는 접근이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접근하는 관점에 주목하며,, 각각의 특징을 (감탄하며)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됨.
 

Si-Fi의 접근은 자유롭다.

달에 가기 위해 우주선을 탈 필요는 없다. 자전거를 타고도 갈 수 있다.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갈 필요도 없다. 친구집을 방문하러....단 여기서 비용의 문제는
배제한다. 있을 법한 상황을 풀어가는 감독의 선택이 처음에는 의외였지만, 마지막은 놀라웠다. 
 

어쩌면 아주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영화는 우리에게 손가락이 아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그 어떤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필자가 주인공들에게 느낀 연민은 그들의 처지에 대한 연민이 아닌, 우리의 삶에 대한 슬픔이었다. 알지만 피하지 못하고, 피한다고 피할 수 없는....삶의 그러함...이라고 할 수 있다.

과감한 선택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까지 균형을 맞춘 영화다. 어쩌면 이러한 소재의 홍수 속에서 다른 주제를 끌어낸 영화이다.
 

몇 번의 '도네이션'후 그들은 재회한다. 그리고 그들 중 둘은 '연장'하고 싶어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마치 나이든...노인들이 삶의 편린을 껴안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자조하며 만나는 그런 성숙함이 서려있다. 알지만, 경험하지 못한 그러한 것들에 나는 두려움과 슬픔을 느낀다. 나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일랜드에 과 비교하여 인간적인다. 영화의 우열을 애기하는 것이 아니다. 쿨하게 인정한다. 영혼이 있는 존재 ..인간처럼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더 살기위해...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은 없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절대 명제 속에서 그러한 질문은 소용이 없다. 결국 우리도 그들도 예정되로 죽어간다. 죽음이란 것에 대해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세를 믿지도 않는다...삶이라는 것을 통째로 한 번 복습한 사람들 같다. 그들의 학교에서 어떤 교육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경쟁도 없었고, 시험도 없었고, 먹고 살기위한 노력도 없었다. 특별한 직업을 위한 장래 희망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랑만이 그들이 '연장'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된다. 사랑하기 위해 조금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일년의 그들의 일년과 다른다. 시간은 역시 상대적이다.
 

'사랑'을 위해 '연장'을 욕망하는 그들은 어쩌면 우리보다 더 인간적이다. 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이 라는 것에 대해 자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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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 따윈 몰라 - Who's Camus Anywa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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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마치 미츠오 감독은 사실 들어 본 적이 없는 감독이었다. 다만 그의 최근작 <까뮈 따윈 몰라>로 처음 알게 되었다. 작품의 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그의 작품경력은 오래되었다. 경력에 대한 나열은 생략하겠다.


1982년 작품인 <안녕, 나의 대지여>와 1985년 <히마츠리>의 경우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문화와 차이와 사회와 역사에 대한 지식의 부족이 이 두 작품을 난해한 영화로 만들었지만, 작품의 스타일도 이해를 하는데 어려움을 주기 충분했다. 프로그램에서 본 야나기마치 미츠오 감독의 영화들은 극단적 결말들을 가지고 있다. 특히 <안녕, 나의 대지여>와 <히마츠리>는 더욱더 그러하다. <히마츠리>는 감독이 말하길 신의 의지, 혹은 초자연적인 현상이 인과관계를 성립시킨다고 했는데, 사실상 이러한 이유를 영화로 표현하기는 매우 어려우며 또한 이해하기도 어렵다. 물론 <히마츠리>라는 영화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묘사는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문학적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영화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는 감독과의 대화에서 은유라는 표현으로 그 인과관계를 설명한다고 했는데, 영화의 은유와 문학의 은유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문학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보이는 은유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영화를 보면서 이것은 이해를 할 수도 있고, 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 은유를 이해 못함이 곧 영화전체의 내러티브를 이해 못하는 것으로 연결되면 문제가 발생한다. 영화의 은유는 상대적이어야 한다. 서사와 맥락 속에서 은유가 깊이를 더해주어야 한다. 은유를 이해하든 못하든 관객들은 평등하게 기본적인 이야기를 이해해야한다. 감독은 <히마츠리>라는 영화가 극과극의 평을 얻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어떻게 보면 실험적인 시도였다고 볼 수 있는 나 결과적으로는 훌륭한 영화는 아니라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영화의 결말이자 최고의 사건인 자살과 살인(그것도 아이들까지 죽이는 살인)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야나기마치 미츠오 감독의 가장 최근작 <까뮈 따윈 몰라>는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영화다. <히마츠리>때와 20년의 간극이 존재하는데, 그 긴 세월만큼 영화에 접근하는 감독의 태도가 많이 변화되었음을 느꼈다. 또한 영화학과 학생으로 영화 자체가 자기반영적인 부분이 존재해 재미를 더욱 더해주었다.

이 영화의 소재 까뮈의 <이방인>은 이 책을 읽었던 읽지 않았던 영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차이가 없다. 물론 깊이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최소한 <히마츠리>와 같은 어려움은 없다.


하나의 중심사건을 둘러싸고 여러 인물들을 보여주는데 이를 통해 현재의 젊은이들에 대한 감독의 시각이 잘 드러난다. 각 캐릭터들을 개성 있게 잘 표현하면서도 그들을 하나로 잘 묶어내고 있다. 이 영화는 실제 살인사건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 살인사건을 까뮈의 <이방인>을 통해 영화로 형상화한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각자의 인물들은 영화로 많은 고민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다른 것들로 고민을 한다. 그들은 본질에 대한 이해보다는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자연히 영화를 만드는 것에 있어서 깊이와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항상 혼돈스러워 한다. 무엇이 진짜인지? 고민을 하지만, 결코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다. 혼돈으로 인한 분열이 각 캐릭터의 공통된 분모이자 이것이 영화의 갈등이다. 현재의 젊은이에 대한 탁월한 표현이자 감독의 관찰력이 굉장히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마지막 부분이다. 살인과 촬영의 시점이 교차되는 부분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맘에 든 부분이다. 어쩌면 이 마지막 부분은 영화 내에서 도드라지는 스타일 일 수도 있다. 전혀 다른 시점일뿐더러 이 것이 극의 흐름에 전혀 상반되는 지점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느나 이 혼란이 긴장감으로 다가온다. 또한 감독이 관객에서 강력하게 영화에 대해 말을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인물들이 겪는 혼란을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던지는 것이다. 인물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데서 직접 그런 혼란을 겪는 주체로 관객을 몰아넣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영화내의 영화촬영 장면일까? 아니면 영화내의 진짜 살인 장면일까? 어쩌면 이것은 필자의 확장된 생각일 수 있으나 이 영화에서 제시된 제재(까뮈의 이방인 혹은 실존주의)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다. <까뮈 따윈 몰라>는 그 전 작품고의 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신선한 의지와 변화된 시도 등이 필자에게는 크게 와 닿았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다음 작품에서의 발전이 기대되는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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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 We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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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시린 멜로. 그러나 그런 그아 소년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다.  

비달은 영국에 있는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이라크에서 프랑스까지 세달동안 걸어서 온다. 그리고 

그는 목숨을 걸고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밀입국하기 위해 시도를 하지만, 실패학 만다.  

비달을 수영을 배운다. 아니 집착한다. 수영강사 시몬은 이런 비달을 무모하다고 생각하지만, 왠지 

비달에게 자신이 가지지 못한, 아니, 필요한 뭔가를 느낀다.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한 그의 무모한 행동은 시몬에게 그것 이상으로 다가 온다. 시몬은 별거중인 부인이 있고, 그 부인과의 이별에 아쉬워하고 후회하고 있다. 어쩌면 그는 비달을 통해, 그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 같다. 결국 비달은 결혼을 강제로 해야 하는 여자친구를 찾으러 바다를 수영으로 건너고자 한다. 그러나 그 바다는 넓고 깊다. 그의 의지가 감당하기에는 . . . . 비달은 여자친구와 결국 만나지 못하지만, 시몬은 아내와의 화해를 하게 된다.  

관찰자 시몬의 감정을 조용히 따라가는 영화다. 그의 연기는 훌륭하다. 극의 진행은 비달의 이야기로 진행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몬의 이야기가 중심이고, 그것이 바로 감정을 만들어낸다. 비달의 이야기가 초반에 나오다가 시몬의 일상으로 들어와 시몬이 이를 바라보며 그의 시선에서 비달을 쫓아가게 된다. 어쩌면 비달의 각오를 보면서 초반부터 무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도 우리는 비달을 응원할 수 밖에 없다. 바로 시몬의 입장에서 말이다.  

영국에서 축구선수가 되고자 했던 한 이방인, 소년은 바다에 갇혔지만, 축구는 여전히 환호속에서 존재한다. 또 다른 이방인을 향해....이 영화에서 축구의 모티프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비달의 비애감을 더욱더 배가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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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 감사합니다! - 할인행사
제이슨 리트먼 감독, 애론 에커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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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제이슨 라이트먼

● 캐 릭 터

닉 레이러(아론 에크하트)

직업 : 담배업체의 대변인 겸 로비스트


이 영화의 캐릭터를 선택한 이유는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직업’ 때문이다. 극의 캐릭터에 있어 직업은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특히, 현대 사회와 같이 보통 사람이 잘 알지 못하는 다양한 직업이 빠른 속도로 생산되고, 그런 직업들이 사회의 구조와 같은 큰 틀에서 파생된 결과의 한 형태라고 받아들인다면, 그 직업이 인물의 많은 부분을 말해 줄 수 있으며, 그것이 어느 정도 성격을 규정지어 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직업’은 직업에 대한 대중의 일반적 인식과,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지위 등 많은 것 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보통의 인식과 일치할 수 도 있고, 혹은 상충될 수 있으며, 이는 직업 당사자도 직업이 추구하는 가치에 있어 비슷한 경우가 발생될 수 있다. 이런 일치와 충돌은 필연적으로 딜레마를 만들어내며 바로 이 선택이 이 인물의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한국 사회와 같이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말이 있는 사회는 특정 직업에 대한 인신이 더욱 고착화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생각과 앞으로 나 올 내용들은 극 속 인물의 완성을 위한 방법론적인 접근을 위한 것이고, 언급된 <thank for smoking> 이라는 영화도 이러한 측면에서 선택이 된 것이다.


이 수업에서는 ‘인물’이라는 것을 따로 분리하여 학습을 하지만, 결국 극에서의 인물은 ‘플롯’의 한 형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시학]에서 언급했듯이 모방은 인물의 모방이 아닌 ‘행동에 대한 모방’이기 때문이다. 심도 있는 인물의 표현은 인물 그 자체보다 사건을 대면하는 인물의 태도 혹은 행동에 있다고 본다. 물론 태도와 행동은 인물의 사상과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 이 사상과 성격을 상화에 따라 가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좀 더 유연한 사고로 인물의 창조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장르’라는 또 다른 틀이 인물의 특성, 즉 ‘스테레오 타입’을 어느 정도 규정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틀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는 많은 부분이 특이한 그런 인물들이 아니다. 작은 것 하나가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직업에 대한 탐구는 이 작은 디테일을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많은 매체들이 앞 다투어 인간의 직업세계를 탐구하고 있다. 특히 케이블이나, TV의 경우 이러한 반영이 매우 즉각적인 반면 영화는 정체되어 있다. 물론 이는 제작 시스템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떠나서도 현재의 한국영화에서의 직업군은 매우 한정적이다. 물론 직업은 뛰어난 캐릭터를 표현해주는 본질적 바탕은 아니지만, 직업이 단지 인물의 단정적인 한 면만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결국 이는 식상함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단순함이 디테일로 연결되는 기회가 직업적 탐구의 결여로 상실되는 것이다. 흔히 한국 영화에서 ‘잘 된’ 캐릭터라는 것을 보게 되면 작가가 만들어 냈다기 보다 뛰어난 배우 한명에 너무 의존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본인이 선택한 이 영화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부딪힌다. 바꾸어 말해 다양한 직업들이 충돌한다. 인물을 특정 직업의 아이콘으로 도식화 시켜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며, 이를 살짝 비틀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접근은 현재 본인이 관심이 있기 때문에 생각해보는 것이고, 선생님과 여러 사람의 조언을 통해 이러한 관심을 좀 더 확장시켜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위의 영화를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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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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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형제  

감독: 장훈


이야기의 소재는 식상하다. 그 식상함의 근원은 케케묵음이다. 그것은 시의성을 시비 거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본인은 이 영화에서 소재의 식상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제 대한민국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현재를 사는 젊은이들에게는 체감하지 못했던 먼 옛날의 이야기나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 체감하지 못한 영화의 시대적 상황은 그저 관객들에게 알고 있는 역사적? 과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 드라마를 보고 시의성과 소재를 들먹거리지 않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한국의 시대물들은 ‘현재의 어떤 것이 과거에도 있었다.’라는 설정을 자주 이용한다. 항상 이런 설정은 구미를 당기지만, 단지 이 신기함에 머물 뿐 2시간이 이라는 영화적 시간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얄팍한 접근이라 한국의 시대물은 항상 망한다. 어쩌면 이것이 헐리우드 시대물과의 가장 확연한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차이점의 가장 큰 근본 원인은 감독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식과 역사 공부에 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정말 현(現) 관객들은 그것(소재의 식상함)에 관하여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다. 라고 결론을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허점을 채울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용서가 된다. 아니, 그리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큰 장점이 작은 결점을 가려주는 것이다. 그것의 가장 큰 힘은 바로 웃음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연스러운 연기에서 나오는 웃음이 포인트다. 영화는 송광호라는 인물을 통해 그만이 할 수 있는 유머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어쩌면 이것이 강동원이라는 인물보다 더 강조되어 문제가 될 정도다. 어쩌면 두 인물의 비중의 문제가 아니라 두 인물 간의 시점 배분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으로 발생되는 문제는 바로 긴장감. 서스펜스다. 너무나 다른 두 인물이 아이러니 하게도 같이 있게 됨으로 발생하는 유머는 있지만 긴장감은 없다.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남녀 두인물이 어쩔 수 없이 같이 있게 됨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는 구조다. 이 영화는 너무 이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아무리 강동원이 예쁘다 하더라도 이것만으로 영화를 채우기에는 조금 버겁다. 아니 아쉽다. 관객들의 만족도가 높기에 아쉽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상업영화로서의 완성도 면에서는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여주는 특기가 뛰어나다.

두 인물은 같이 있는 목적이 서로 다르다. 그 목적은 다르지만 상충되지 않는다. 그들 각자의 목적이 상대방을 노려봐야지만, 긴장감은 형성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상황의 설명에만 그치고 있다. 어쩌면 이들의 적은 서로가 아닌 각자가 믿고 있는 외부의 어떤 것에 있다. 이 외부의 인물 혹은 조직들이 이들을 노려보는 시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상황의 아이러니함을 극대로 살릴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라 생각하는데, 영화는 그것을 다만, 감정적 차원 혹은 극의 전개의 한 과정으로만 풀어나가고 있다. 그래서...그리고 극의 전개에 있어서도 다소 무리한 부분들이 돌출된다. 이야기의 핍진성이 다소 약하다. 사건이나 감정의 전개가 우연적이거나, 비약적인 경우가 많다. 강동원과 송강화의 만남부터 베트남 갱의 출연, 부분적으로 들어나는 과잉된 가족애. 이 상업영화는 시대의 구 유물이 되어버린 두 인간을 결국 해피하게 만들고 끝이 난다. 물론 관객들은 강동원이 살아있음에 흡족해하며 극장을 나설 수 있다. 결국 가장 불행한자는 정말 끝까지 나라를 위해 싸운 그림자와 국정원 요원들뿐이다.


시대가 이들을 낳고 변화된 시대가 이들을 버리고....그들은 이 변화된 시대에 적응해야하는 그 실존적 문제가 배제되어 있다. 강동원은 끝까지 자신은 배신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물론 나라가 시대가 자신을 배신했음을 알고도...왤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모호한 것이 아니라 애매한 입장이다. 모호함은 풍성하지만, 애매함은 결핍이다. 개인적으로 짐작하건데 그가 그렇게 까지 소신을 지켜온 것이 가족 때문이었다면 그 명분을 좀 더 살려줬어야 한다. 그리고 그가 국방대학원 교수를 찾아간 이유가 달랐어야 한다. 조국애의 명분은 가족애의 명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 많은 영화들이 조국애를 더 큰 것으로 그렸지만, 그것은 몇몇 위인들의 이야기다. 과거 곽경택의 영화<해적>에서 이정재가 조국애의 명분을 강조하는 것을 보고 코웃음이 나왔던 게 기억난다. 그게 바로 곽경택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끝까지 그것을 버리지 않은 이유를 보여주어야 강동원이 가지고 있는 실존적 무게감이 더 큰 질량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외피는 공동경비구역 JSA와 비슷하다. 하지만, 구(舊) 인물들이 느끼고 있는 신(新) 시대적 상황의 공기를 잡아내지 못하고 있으며, 주제가 가지고 있는 비애감도 약하다. 긴장감, 서스펜스, 아이러니함도 마찬가지다. JSA 비해 인물들 간의 관계가 너무 느슨하기에 이러한 문제가 생긴다. 영화에서 보이는 직업만이 시대적 상황을 보여줄 뿐이다. 영화는 너무 순진하게 이 직업적 표피만을 가지고 요리하려고 든다. 직업이 가질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는 듯하다. 아쉬운 부분이다. 블랙 코미디가 될 뻔한 코믹영화는 항상 아쉽기 마련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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