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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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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태어나는 것만이 죽으니, 탄생은 죽음에 진 빚이다"


지구에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기계들이 있어.

바로 센서야.

감각을 하는 게 그것들의 목적이야.

그런데 고통을 감지하는 센서는 없어.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아.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가면 그들의 고통이 내 영혼을 짓눌러.

그들이 지고 가는 삼의 무게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뛰지마, 네가 이 우주의 중심이야.(133)


"동물은 죄가 없다. 아니, 죄를 지을 수 조차 없지. 죄를 짓고 고통을 느끼고 용서를 구하는,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게 바로 인간이다."
"죄, 잘못, 인간, 동물.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구분하는 게 바로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잘난 척을 하는 거예요. 내가 인간이다. 내가 제일 위에 있다. 나는 죄를 안다. 동물은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는 동물은 죽여도 된다. 이런 식이에요." - 아비
83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를 볼 때하고 비슷한 것 같아. 우리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지. 그리고 아주 잠깐 동안 서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해. 그렇지만 호랑이가 몸을 돌려 사라지면 그런 일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잖아. 너, 어떤 애 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까 잠깐 그런 기분이 들었어." - 아비
138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나무를 베기 전에 나뭬게 용서를 구했대. 그들은 나무가 사라진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았던 거야. 나무에게 용서를 구함으로써 그들은 나무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돼. 평생 보던 나무를 베어 없앤다는 것은 자기 마음의 일부를 잘라버리는 것과 같아. 그들에겐 화폐가 없었어. 사물과 그들은 직접적으로 맺어져 있었어. 돈을 받고 일을 한다는 의식이 너의 참인식을 가로막았고 그 때문에 너는 큐브를 느낄 수 없었을 거야." - 아비
147
"코끼리를 어릴 때부터 줄에 묶어놓고 키우면 나중에 커서 힘이 생긴 뒤에도 줄만 묶어놓으면 꼼짝을 못 한다는 거야. 자기한테 그런 힘이 있는 줄 모른다는 거지." - 아비
160
용기, 그것은 죽음의 가능성을 일소에 부치는 허세에서 온다. - 아비
57
슬픔에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그러니까 서러움에 가까운 감정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마음이 차가워지는, 비애에 가까운 심사도 있다. - hannyyap
134
"뛰지마. 네가 이 우주의 중심이야." - hannyyap

지나간 기억은 외려 생생해지기만하는데, 새로운 경험은 그에 터무니없이 미달한다는 것을 거듭 하여 깨닫게 될 때, 인생은 시시해진다. 나는 너무 일찍 그것을 알아버렸다. 


누가 그랬던가.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은 고작해야 과거에 읽은 어떤 소설보다 조금 더 잘 기억이 나는 한권의 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스티븐 디스태블러라는 미국의 조각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예술가는 작업하지 않는 고통이 작업의 고통을 넘어서지 않는 한 일하지 않는다. "


사실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다 사실은 아니고, 상상에서 시작됐다고 다 허구는 아닌 것이 소설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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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는 남자 진구 시리즈 2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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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작가의 이력 때문에...

작가가 판사로서 나름 전문적인 법적 지식과 경험이 글 속에 녹아있을 것이라는 판단. 이 판단은 어느 정도는 맞았다. 어느 정도...인 이유는 독창성이라기 보다는 한국적이었다는 것...


이 책을 선택한 두 번재 이유.. 주인공이 함정에 빠진 설정..이라고 생각했다는 거...

사실 소설 처음에 주인공이 함정에 빠진 듯 하지만, 풀려나고, 그 이후 3자로서 사건의 주위에 존재하고 있다. 음모나 상황이 주인공을 압박하지도 않고, 그렇기에 주인공이 이 사건 해결에 크게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는 인상이다. 오히려 주변 상황이 주인공에게 관찰 될 수 있도록 다가오는 형국...

좀 더 자세히 풀자면 의지는 있으나, 그것이 독자로 하여금 단편적인 경황에 비추어 거리를 유지하게 한다. 


가장 맘에 들지 않는 것은 그 남자의 살해 동기. 단순 살인자인 여자가 자존감이 센 여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바람둥이 남자를 죽였다...라는 거... 어쩌면 동기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반면에 그 동기가 살인자를 추적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처음부터 많은 독자들이 부인을 의심하겠지만,(물론 필자도...그랬다)..그리고 그 부인의 아버지도...이런 예상을 보기 좋게 뒤집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진구의 행동...특히 살인 현장의 발견 이후...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전략적인 심리..

그것은 맘에 들었다. 


퍽치기 속임수는 나름 신선했는데...중간 퍽치기 살인자로 바뀌는 시점은 ...좀 ...맘에 들지 않는다. 진구가 임씨에게 전화를 걸지만, 임씨는 받지 않고...술취한 문경위 뒤로 점점 다가가는 누군가의 시점...문경위가 그냥 퍽치기 당하는 것을 보여주고, 다음날 누군가가 죽었다...그러나 그건 문경위가 아니라..임씨다. ,...너무 쉽게 예측 된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진 않았을 듯...


오히려 중간에 살짝 들어가는 해미의 시점보다는 우리가 책을 읽는 동안 용의 선상에 올릴 수 있는 다른 인물들의 시점을 통해 트릭을 구성했으면 더 재미있을 듯...특히 살인자 여교수의 시점이 너무 없어...결론이 좀 뜬 금 없다라는 생각이 든다...진구의 시점으로 이루어지는 추리장르지만, 차라리 이런 시점의 전환들이 더 괜찮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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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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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브루스 리를 열망하는가?

천명관의 고래와 이번 작품을 보았을때, 개인적으로 브루스리에 더 큰 점수를 주고 싶다.

뿌리는 현실 깊숙히 박혀있지만, 그 열매는 환타지적이다. 이것이 천명관 소설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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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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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8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 알라딘


182 마르크스는 공산 혁명을 주장했지만, 공산 혁명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 세대가 처한 상황과 이 세대의 운명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넓은 의미의 선언자다. 누군가가 와이두유리브닷컴을 ‘부모 덕택에 고생 모르고 자란 배부른 녀석들의 복에 겨운 헛소리'라고 매도하려 들 때 '그 방식은 과격하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라고 맞서며 우리의 논리를 그 자리에 소개한다면 당신은 선언자다. 우리 세대가 하루하루 좌절에 빠지는 이유가 우리 개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그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면 당신은 우리와 같은 편이다. - 알라딘


199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다음 단계'를 꿈꾸며,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주체로서 뚜렷한 이념과 이상을 갖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주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낙원'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이상향은 있을 수 없기에, 표백 세대는 혁명과 변혁에 관한 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 - 알라딘


241 자살을 꿈꿔본 적이 없냐고? 왜 없겠어. 그런 건 누구나 밤마다 생각하는 것 아닌가? 나는 밤마다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창문을 깨고 원룸에서 뛰어내리는 공상을 한다고. 때로는 분노에 차서, 때로는 사는 게 허무해서. 세연이 쓴 선언문에 동의하지도 않았고, 사람을 외길로 몰아간다는 생각에 거부감이 일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선언문 덕에 위안을 받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왜지?). 그러나 내가 그 선언문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었다. 설사 선언문의 내용에 내가 찬성한다 해도, 그 선언문과 실행 지침은 생활이 곤궁하거나 좌절했을 때 자살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실행 지침에선 자살을 하려거든 삶의 중요한 성취를 이뤘을 때 하라고 했는데, 나는 적어도 업무에서 다른 사람이 인정할 만한 성취는 앞으로 영영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 알라딘


332 우리 사회에 모순이 쌓이지 않는다는 세연의 주장에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힘은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에 태풍은 곧 몇 번 들이치리라 생각한다. 그때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을. 그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 알라딘


55 어차피 이 세상에 네가 원하는 싸움은 없잖아. 몇 푼 더 벌고 몇점 더 얻기 위한 싸움은 다른 머저리 같은 녀석들이나 하라고 해. 그런 보잘것없는 싸움은 처음부터 항복해버리는 거야. 밥벌이로 저녁 6시까지만 일하고, 그다음에는 네 할 일을 하는 거야. 밴드 활동이나 작곡이나 그런 거. 그래도 하루 6시간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잖아. 네 지위에 너만 확신을 가지면 되는 거잖아 - 에로틱번뇌보이


186 1978년 이후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유지, 보수자의 운명을 띠고 세상에 났다. 이 사회에서 새로 뭔가를 설계하거나 건설할 일 없이 이미 만들어진 사회를 잘 굴러가게 만드는 게 이들의 임무라는 뜻이다. 이들은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다 - 에로틱번뇌보이


187 완성된 사회라는 것은 구성원 또는 계층 간의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사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완성된 사회는 그런 갈등과 모순이 어느 범위 이내에서 더 커지지 않는 상태로 계속 지속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서구 국가들과 아시아의 일본, 한국은 이런 단계에 도달했다. 한국은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성공하면서 '완성된 사회'의 초입에 접어들었다. - 에로틱번뇌보이


188 완성된 사회에도 근본적인 불의와 부조리는 있으나, 완성된 사회는 한 가지 답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그 부조리를 피해간다. 

이 시스템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 쌓이지 못한다. 고작해야 '선거 혁명'이다. 즉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 - 에로틱번뇌보이


197 이런 한계 속에서 표백 세대의 내면은 추하게 일그러진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인 위치나 사명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이 없으므로 역사 의식이 희박해지며, 민족주의치럼 그들의 자존감을 손쉽게 높여줄 수 있는 불합리하고 값싼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다. - 에로틱번뇌보이


197 박탈감과 좌절감은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이런 좌절감은 집단적인 분노로 발전하지 못한다. 투쟁은 손해 보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선배와 상사, 기성세대를 찢어죽일 것처럼 성토하다가도 면접 시험장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해지고 공손해진다. - 에로틱번뇌보이


197 패배를 자연스러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중 몇몇은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작은 이득을 위해 아득바득 싸우는 태도를 촌스럽다고 여기게 된다. 기왕에 지는 것, 한발 물러난 자세로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와 같은 태도를 보이거나 아예 싸움을 피하는 것이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그것이 '쿨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 에로틱번뇌보이


198 진정으로 새로운 주장이나 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조롱과 비아냥거림, 의미없는 장난이 이 세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사유와 생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표백 세대는 소비를 삶의 표현 양식으로 삼는데, 이는 여가와 사교 생활에서 문화 예술 및 창작활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걸쳐 이들의 사고와 형태에 깊숙이 영향을 미친다. - 에로틱번뇌보이


199 물론 이들이라고 해서 바보는 아니며,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 정도는 갖고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사회에 대해 그런 의심을품는 행위는 자칫 그 자신을 바보라고 인정하는 셈이 될 수 있기에, 이들은 그런 생각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고로, 음흉함은 그들의 제 2의 천성이 된다. - 에로틱번뇌보이


200 표백 세대가 완성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은 순응, 타협, 소극적 저항, 적극적 저항의 네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순응은 완성된 사회의 시스템과 경쟁 체제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삶은 사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 판검사나 의사가 되거나 좋은 기업에 취직해 '치열하게' 살다가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목표다. 존경받는 기업인이나 법조인, 정치인들의 거의 다 이 분류를 해당한다. - 에로틱번뇌보이


200 그런가 하면 '고시 폐인', 범죄자와 사기꾼, 실패한 사업가나 장사꾼, '악비리' 혹은 '또순이'라는 칭찬을 듣는 저소득층도 이 유형에 속한다. - 에로틱번뇌보이


200 타협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품으면서도 대체로 그에 따라가는 삶의 형태다. 이런 삶의 유형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타적인 행위를 통해 자기 만족을 얻으며 그런 의심을 억누른다. 여가 시간에 봉사 활동을 하거나, 권력에 대한 의지없이 선의로 정당 활동에 참여하거나 기부금을 내는 행동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 에로틱번뇌보이


200 그러나 그런 활동이 근본적으로 삶의 우선 순위에서 가장 앞에 오는 것이 아니며, 그런 활동들에 대한 욕구도 따지고 보면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삶의 형태는 완성된 사회에 대단한 위협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권장되기까지 한다. - 에로틱번뇌보이


201 소극적 저항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없으나 적어도 그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닌 삶의 형태다. 예술가, 종교인, 전업 NGO 등이 여기에 해당하며, '돈 되는 일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직업인, "패배자라도 불러도 좋으니 아등바등 살지 않고 속 편하게 생활하고 싶다"라며 교직원이나 하급 공무원, 카페 사장 따위를 꿈꾸는 부류도 이에 속한다. - 에로틱번뇌보이


202 이들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따르는 일을 경멸하지만, 자신들이 완성된 사회로부터 제대로 된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들 중 일부는 경쟁 시스템에서 도피하기 위해 이런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으로, 세속적인 성공을 거머쥐게 되면 언제든지 '순응형'이나 '타협형'으로 태도를 바꿀 준비가 돼 있다. - 에로틱번뇌보이


202 소극적 저항자들은 대체로 연대를 하지 않으며 사회 시스템을 전복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수가 너무 많아지지 않는 한 완성된 사회의 관점에서 대체로 무해하다. - 에로틱번뇌보이


202 적극적 저항은 사회에 대한 폭력적인 타도를 시도하는 것이다. 정의에 따라, 완성된 사회에서 적극적인 저항은 이념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적극적인 저항자들은 처참할 정도로 논리가 없거나 아니면 일반일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극단적인 원리주이를 자신들의 이념으로 채택한다. - 에로틱번뇌보이


202 프랑스나 그리스 등에서 간혹 보는 방향성 없는 학생 폭동이 전자의 예이며, 이슬람 근본주의자나 대단히 공격적이고 반체제적인 환경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그룹 등이 후자의 예이다. 

완성된 사회는 이들을 사회의 적으로 규정하는 데 망설임 없으며 이념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적극적 저항자들의 성공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기껏해야 기억에 남은 테러를 몇 건 저지를 수 있을 따름이다. - 에로틱번뇌보이


343 두 번째는 작가를 꿈꾸는 직장인들에게 보내는 격려와 제안이다(중략)장편소설을 쓰는 작업은 마라톤 풀코스 완주와 비슷했다. 처음 시작할 때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하고 자신이 없었던 게 그랬고, 매번 3분의 1 지점쯤에서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게 그랬다.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게 두 가지 있다. '계속 쓰다 보면 끝까지 쓸 수 있다'는 것과 '계속 쓰면 점점 나아진다'는 것이다. 3분의 2 지점을 통과하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끝까지 가게 된다는 점도 글쓰기와 마라톤의 공통점이다. - 에로틱번뇌보이


27 "저는요, 젊은이들더러 도전하라는 말이 젊은 세대를 착취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뭣 모르고 잘 속는 어린애들한테 이것저것 시켜봐서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고 되는 분야에는 기성세대들도 뛰어들겠다는 거 아닌가요?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라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면서 양보합니까? 척 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 하는 거잖아요." - 푸른신기루


191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돼봤자 기존 지배 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효과만 낳는다. - 푸른신기루


194-195 그런데 완성된 사회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해 사실상 단 하나의 평가 기준만 지니고 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의 결합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결과다. 자유민주주의는 교리에 따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가치 면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수정자본주의는 시장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평가 척도를 한 가지만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두 이데올로기가 결합한 가치 체계에서 한 인간의 가치를 재는 방법은 '그 사람이 자유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 있는가'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시장 가치를 갖고 있는가'가 된다. 

따라서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젊은이는 부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증명하려면 돈을 버는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 가치를 주장할 다른 방법이 없다. - 푸른신기루


196

표백 세대는 같은 세대뿐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사회 각 분야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표백 세대들이 가진 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분배 방식이라는 게임의 규칙조차 기성세대가 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 - 푸른신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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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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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는 점점 인간을 닮아가고 인간은 점점 기계를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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