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에프라임 키숀 지음, 반성완 옮김 / 디자인하우스 / 1996년 11월
평점 :
절판



생각은 바로 필자(키숀)가 생각하는 ‘예술의 본질’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면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미국의 미학자 웨이츠에 따르면 이 물음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 지적한다. 예술이라는 말은 음악, 무용, 건축, 영화, 소설, 조각등 다양한 것을 지칭한다. 이것들의 모두에 공통된 성질은 없다. 이들 사이엔 단지 ‘가족 유사성’만 있을 뿐이다. 본질이 없는데 본질이 뭐냐고 묻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웨이츠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이 뭐냐고 물으며 출발했던 전통적 미학은 모두 이러한 오류에 빠져있다고 한다. 이런 걸 ‘본질주의적 오류’라고 한다. 예술에 본질이란 것이 없다면, 예술은 정의할 수 없다. 즉 ‘예술’이라는 개념은 열린 개념이다. 이것을 정의하려고 하는 순간 예술은 죽어버리는 것이다. 즉 새로운 예술이 기존의 예술 형태와 부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없다는 모순된 논리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예술적 창의력을 억압하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예술적 개념을 닫아버림으로서 그 창의력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열어두고 창의력을 고양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억압된 질서보다는 자유로운 무질서’가 예술의 영역에서는 더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예술’이라는 개념이 필자가 생가하고 있는 절대적인 관점에서 모든 작품들이 이야기 되고 평가되어진다. 물론 키숀의 모든 논의가 이런 전제로 인해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의 앞에서 윌리엄 에티의 ‘연인 히어로와 레안드로스’ 하워드 호드킨의 ‘사랑하는 한 쌍의 연인들’의 그림을 나란히 비교하였다. 본인도 윌리엄 에티의 그림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두 그림의 평가를 절대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앞에서 윌리엄 에티의 그림에 대한 짧은 평가를 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크 양식의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구분하면서 공부하던 본인 스스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때 바로크 양식의 그림에 많은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20세기 전반의 전위적 현대미술에 대한 지식이 없는 본인에게는 하워드 호드킨의 그림은 한 낫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가지고 감히 작품들을 절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누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것을 보는가? 에 따라 의미가 많이 달라질 수 있다. 키숀도 이러한 부분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러한 부분은 자신이 그 정도는 견지하고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전제하에 그러한 부분을 넘어가고 있다. 예술작품을 보고 내리는 판단과 그것에 느끼는 감정에는 다양한 루트가 존재한다.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라는 책에서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개념을 설명한 적이 있다. ‘스투디움’은 학습에 의해 가능한 영역이다. 본인이 말한 윌리엄 에티의 그림에 대한 평가는 ‘스투디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푼크툼’이라는 것은 정말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이다. 누군가가 하워드 호드킨의 그림을 보고 주체할 수없는 감정에 휩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학습을 초월한 영역이다. 사실 예술작품의 감상에는 항상 이러한 것을 기대하고 이것 이상 좋은 감상은 없다. 키숀은 예술작품의 감상에 있어서 개별적인 특수성을 많이 배제한 듯하다.


이 책의 주된 비판 대상은 ‘현대미술’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 미술사는 독자적인 흐름이라 말할 수 없다. 현대 미술은 이미 20세기 전반기에 전위적인 미술운동과 함께 싹텄다. 이를테면 큐비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와 같은 추상미술 운동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모더니즘 예술은 의도적인 무질서, 대상성의 파괴, 오브제의 도입, 창작의 우연성 등 전통적 예술 관념에 따르면 도저히 예술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모더니즘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흐름, 즉 문학, 철학, 심리학 심지어 과학의 영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대미술을 전체적 맥락의 한 부분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너무 성급한 판단을 하지 말자는 뜻이다. 키숀은 인상주의 그림, 특히 고흐의 그림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미켈란젤로와 비교하여 새롭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인상파나 후기인상파의 사물에 대한 미술적 접근은 후에 인간이 세상을 바라봄에 있어 보다 다양한 시각의 확장을 가져다주었고 미술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게 하였다. 이것이 없었다면 후에 나온 야수주의, 입체주의. 표현주의도 없었을 것이며,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르네 마그리트도 없었을 것이다.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도 처음에는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변기를 작품이라 가져왔으니, 이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하지만, 수업시간에 애기했듯이 본질과 실존의 측면에서 보면 조금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 사용된 변기는 기존의 공장에서 나온 변기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외부에서 그 의미를 찾아봐야 한다. 예술계가 그 변기를 <샘>이라고 명명해주는 순간 예술작품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예술작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과연 여기서 어떤 의미를 도출할 수 있는가? 바로 ‘코드’, 즉 변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관습’이다. 바로 앞서 말한 모더니즘 미술의 특징인 ‘사물의 오브제화’에 부합되는 것이다. 현대 미술에서 어느 대상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바로 코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술에 대한 새로운 전환이다. 이러한 사고가 예술의 질적 저하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발전된 형태의 진화를 가져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예술의 형태는 하나로 정의되지 않고, 그 시대의 흐름에 맞게 수시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그릇된 형태로 비추어 지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흐름으로서 부정할 수 없으며 예술 발전의 한 과정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어떻게 파생되어 어떤 새로운 예술을 탄생시킬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더니즘 미술이 추상성을 띠고 있다고 해서 이것이 모두 키숀이 비판하는 현대예술의 형태는 아닌 것과 같이 키숀이 비판하는 형태의 추상화 미술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다양한 측면에서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요지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키숀의 접근은 흥미로웠다. 비록 그것이 반론의 여지가 있고, 자신의 의견만을 집중적으로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매우 가치 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키숀의 지적은 반드시 현대 예술이 풀어야할 과제이기도 한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돈에 의해 전도된 예술품의 가치를 빨리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돈을 쫓는 예술작품은 결코 아름다움과 감동을 줄 수 없다.

또한 작품이란 것은 그 자체보다는 수용자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한 접근은 창작자에게 중요한 의미로 제공 될 것이다. 본인도 그 창작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생각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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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시학 동문선 문예신서 183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곽광수 옮김 / 동문선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직 읽지 않았지만, 수업시간에 공부한 것을 통해 알게  되어 구입하였다. 공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기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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