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차일드 44 뫼비우스 서재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연쇄 살인마를 추적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그 시대를 묘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범죄를 수사하는 방법은 그 사회를 지배하는 편견과 우선순위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리트머스 테스트가 되는 셈이다. 


결말. 파벨(레오)의 동생 안드레이가 형에 대한 비이성적 태도에서 사건들이 벌어졌다고 결말을 짓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이 형을 보기위한 동생의 계획이었다는 설정은 그다지 설득력은 가지 않는다. 둘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두사람을 교차하는 방식. 즉 범인을 쫓는 자와 살인을 저지르는 자에서 유도당하는 자와 유도하는 자의 관계로 변화시키는 방식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이 소설은 결국 과거를 잊으려는 자와 과거를 잊지 못하는 자의 대결이지만, 그 '대결'로서의 재미와 흥미는 없다. 오히려 중반까지 부인을 죽여야 되는 딜레마에서 부인의 임신을 알게되는 과정까지가 이야기로서 매우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는 레오가 아이들에대한 살인 사건에 집착을하게 되어 수사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레오 또한 감시의 대상이라는 것이 이 수사에 흥미를 더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카메라를 수집했다. 외할아버지가 은퇴해 포트로더데일의 콘도에 살고 있었는데, 거기서 탁자에 놓인 낡은 브라우니 카메라를 보았다. 나는 브라우니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본 순간 그 즉시 사로잡혔다. 마치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 개의 이미지로 시야를 좁힐 수 있어 주위 모든 사물을 다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한 여섯 살짜리 꼬마를 가장 크게 만족시킨 건 렌즈 뒤에 몸을 숨긴 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꼬마는 카메라 렌즈를 자기 자신과 세상 사이를 가로막는 벽처럼 사용했다. - 알라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와 함께 학교를 다녔던 거의 모든 아이들에게 ‘성취’라는 말은 단 하나의 의미, 즉, ‘큰돈을 벌다’라는 뜻으로 통했다. 백만 달러 단위의 연봉. 계급 사다리의 맨 위쪽에 오르거나 안정적인 전문직에 뛰어들어야만 얻을 수 있는 돈. 나는 아버지가 제안한 로스쿨 예비과정을 마쳤지만(틈을 내 사진 수업도 들었다), 마음속으로 늘 다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에게 더 이상 생활비를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면 ‘성취’라는 말과 완전 작별하겠다고. - 알라딘
사람도 없었다. 여름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여름에는 달빛 아래에서 핫도그를 먹는 게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는 피서객들로 붐빌 테니까. 다행히 오늘밤에는 달도 없었다. 내게는 어둠이 절실히 필요했다. 
조심스레 돛을 내리고 갑판으로 내려갔다. 이제 시작할 때라고 생각하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하나하나 차례대로 하면 돼’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 알라딘

월스트리트 변호사 벤 브래드포드가 대서양에서 요트 화재와 폭발로 사망한 지 12일이 흐른 지금 뉴욕 주 경찰 수사관은 네 가지 사망 원인을 제시했다. 
뉴욕 주 경찰의 자넷 커트플리프 대변인이 오늘 기자들과 만나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블루칩 호의 잔해를 철저히 감식한 결과, 이 사건의 수사는 이제 종결짓기로 했으며…….’ 
내가 학수고대했던 기사였다. 이제 깨끗하게 해결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일주일 동안 더 고속도로에서 헤맸다. 갈 곳도 없이. 뿌리도 없이. 떠돌이로. - 알라딘
숨어 지내야 해. 결과적으로 잘 내린 결정이라고 계속 내 자신을 타일렀지만, 내 머릿속 허영의 목소리가 계속 트집을 잡았다. 
‘갤러리 주인 주디 윌머스가 네 사진을 좋아해 전시회를 제안했잖아. 그런데 뭘 망설여? 조건 때문에 너무 까다롭게 굴어 굴러온 복덩이를 몽땅 걷어차다니.’ 
그래도 최소한 내가 갈등하고 있다는 걸 주디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 알라딘
우리는 모두 모니터 앞으로 모였다. 제인은 인터넷 창들을 열어 미국 주요 신문의 1면들을 보여주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로스앤젤레스타임스》, 《시카고트리뷴》, 《마이애미해럴드》,《USA 투데이》등의 신문 초판 1면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 1면들 모두에 죽은 소방관과 애통해 하는 상관을 찍은 내 사진으로 채워져 있었다. 
‘사진 : 게리 서머스 / 《몬태난》지’라는 작가 소개도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제인이 말했다. 
“이제 게리 서머스 씨는 너무 유명해졌어요.” - 알라딘

나는 브라우니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본 순간 그 즉시 사로잡혔다. 마치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 개의 이미지로 시야를 좁힐 수 있어 주위 모든 사물을 다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한 여섯 살짜리 꼬마를 가장 만족시킨 건 렌즈 뒤에 몸을 숨긴 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꼬마는 카메라 렌즈를 자기 자신과 세상 사이를 가로막는 벽처럼 사용했다. 에피파니

"제법 위트는 있지만 뛰어난 사진은 아니야. 너무 머리를 쓴 티가 나니까. 내 사진은 지나치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게 드러나. 자기가 찍은 인물사진들과 다른 점이야. 자기 사진들은 우연히 찍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장 한 장 찍을 때마다 철저하게 계산하고 심사숙고한 게 분명하지. 그럼에도 마치 우연히 찍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야. 그건 아마도 대단한 기술에 속할 거야."
죽음에 가까이 가보고 나서야 목전에 임박한 위험이 사진가에게는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인 상황이란 걸 알게 되는 것이다. 사진가는 모든 장면을 뷰파인더를 통해 보기 때문에 위험에는 어느 정도 면역이 된다. 카메라가 방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카메라 뒤에 있으면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을 듯 느껴진다. 카메라 덕분에 위기 상황에 대한 면책특권을 얻는 것이다. 에피파니
...기자는 청소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장면의 세세한 부분들을 모은다. 그 세세한 것들이 한데 모이면 '큰 그림'이 완성된다. 사진가는 늘 상황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확실한 영상 하나를 원하지만 작가는 작은 일들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세밀한 묘사가 없는 이야기는 맥없고 심심할 수밖에 없으니 좋은 글을 쓰려면 균형감을 유지해야 한다. 글 전반에 작가의 시각이 담기지 않으면 독자는 작가가 관찰한 바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다. 에피파니

나는 미국 생활의 자명한 진리 중 하나를 깨닫게 됐다. 일단 인기를 얻으면 어디서나 그 사람을 찾는다. 미국 문화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은 늘 무시된다. 고군분투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취급되기 일쑤다. 발행인, 잡지 편집자, 제작자, 갤러리 주인, 에이전트들을 설득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사람은 낙오자로 취급될 뿐이다. 성공할 수 있는 길은 각자 찾아내야 하지만, 그 누구도 성공을 이룰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다. 명성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 기회를 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더라도, 자기 판단만 믿고 무명의 인물에게 지원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런 까닭에 무명은 대부분 계속 무명으로 남는다. 그러다가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온다. 행운의 밝은 빛에 휩싸인 후로는 갑자기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고 반드시 써야 할 인물이 된다. 이제 모두 그 사람만 찾는다. 모두 그 사람에게 전화한다. 성공의 후광이 그 사람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에피파니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식탁 앞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갖가지 물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흰 벽, 수공 소나무 캐비닛, 조리대, 주방 기구들, 장식장에 깔끔하게 쌓인 흰 웨지우도 접시들, 메모판에 핀으로 꽂은 가족사진, 냉장고를 장식한 학교 알림장과 애덤의 그림.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놀라게 했다. 공간을 채우고, 시간을 채울 것을 계속 찾아가는 과정이 축적되면 인생이 되는 게 아닐까? 고도

"상대방의 진면목은 나중에야 알 수 있고. 뭐 '경험이란 실수를 좋게 포장한 말일 뿐이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오스카 와일드?" 
"소니 리스턴." 고도

공간을 채우고, 시간을 채울 것을 계속 찾아가는 과정이 축적되면 인생이 되는 게 아닐까? 까이유
누구나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나 그런 자유, 그 텅빈 지붕과 마주하게 되면 두려움밖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란 끝없는 무의 공간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영역을. 까이유
'돈이 곧 자유야' 그렇죠, 아버지. 하지만 그 자유를 얻으려면 일에 몰두해야 하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를 읽어보고, 그 매력에 <고백>까지 읽게 되었다. 읽은 순서와는 다르게 <고백>이 처음 쓴 소설이고, <속죄>는 그 후에 쓴 소설이다. 두 소설의 형식은 비슷하다. <고백>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현재 한국에서 개봉예정이어서 필자는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읽은 순서에 의한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고백>보다 <속죄>가 더 낫다라고 생각한다. 고백이 밖을 향한다라고 한다면, 속죄는 안을 향하는 소설이다. 고백의 인물들은 타인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행하려하고, 속죄의 인물들은 타인에게서 받은 무언가때무에 자신의 상황에 부딪히는 소설이다. 속죄는 고백과 비슷해 보이지만, 좀 더 진일보 하였다. 긴 시간의 텀을 이용하는 현재 과거의 방식이 다양한 시점을 이용하면서도 짜임있게 진행되고 있다. 어쩌면 이 긴시간의 틈은 영화로는 메우기가 힘들 것이고, 그래서 고백이 영화로 선택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초반의 흡입력있는 설정이나, 사건들이 고백이 영화적인 이유는 있다. 하지만, 고백은 인물의 독백들이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인물들이 보여주는 의식, 그 논리들이 조금은 비약이라는 생각과 함께, 감정적으로 잘 와닿지 않는 것이다. 사건에 전말에 대한 것도 초반에 이미 소진되어 중간은 사건의 진행보다는 인물의 관점만을 보여주려 하기 때문에 지루한 면도 있다. 물론 후반에 다른 사건이 있지만, 그건 생각보다 임펙트가 있지 않다. 이 임펙는트 사건의 반전을 애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주는 이야기의 마지막 정서가 그다지 약하다는 것이다. 아마 인물에게 감정적으로 동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 생겼을 것이다. 영화가 소설의 이런 부분들을 잘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다지 매력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히려 속죄의 짜임이는 형식에 고백의 사건들을 접목시키는 시도를 해본다면, 그 시도가 영화적으로 어떻게 변행되었는 가를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이 <고백>이라는 소설을 어떻게 영화로 만들었는지는 매우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속죄
미나토 카나에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다섯명의 시점으로 소설은 이루어져 있다. 시점의 변화는 사건에 조금씩 다가면서, 인물들의 감춰진 삶을 보여준다.

단순히 하나의 사건에 접근하는 다향한 시점이 아니다. 각자의 상황에서 바로 본 그 정황이 하나하나의 퍼즐이 되어 점점 그림이 완성되어 간다. 각 시점이 가진 정보의 차이, 즉 단서를 이용하여 속도감이 더해진다. 책을 읽는 동안 큰 하나의 사건을 따라가는지...아니면 그 사건에 휘말린 이들의 삶을 따라가는지가 불분명해진다. 이 두개의 생각은 번갈아 가며 찾아온다. 그 어떤것도 쉽게 책을 놓게 하지 않는다. 어째면 이 이야기는 다섯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 퍼온 글 -


1. 소설 속 세계의 현실성 - “아파르트헤이트, 그 이후" 

1994년 4월 드디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종식되고 남아공은 최초의 흑백연합정부를 수립했다. 흑인을 대표하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백인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국민당(NP)이 연합하여 구성된 남아공 연합정부는 “보복 없는 과거청산”이라는 대명제를 구현하기 위해 1995년 11월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발족시켰다. 이 위원회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백인정부가 저지른 수많은 인권탄압과 잔악행위는 물론 ANC를 비롯한 반(反)정부진영이 투쟁 과정에서 빚어낸 보복적 폭력 행위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에게 경제적ㆍ법률적 보상을 관장했다. 위원회는 청문회를 통해 사면을 신청한 가해자들의 고백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듣고 그 고백의 진실여부에 따라 가해자의 사면을 결정하고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해 국민통합과 화해를 모색했다. 위원회는 1995년 12월부터 1998년 7월까지 2년 7개월 가량 존속했으며, 2000년 11월까지 총 7,112명이 사면을 신청해 그 중 849명이 사면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핵심인물들은 사면을 신청하지도 않았으며, 신청자들의 대부분은 흑인 경찰을 비롯한 하위직 공직자들이었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아파르트헤이트의 가해자들이 위원회에서 한 증언들은 자신의 죄과에 대한 깊은 참회와 반성에 바탕을 둔 진실의 고백이라기보다는 사면을 얻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에 가까웠다. 그리고 증언의 과정에서 자신을 체제의 또 다른 희생자로 합리화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죄과의 사실에 대한 인정은 있었지만, 그것을 진실하게 참회하는 것은 부족했으며, 이러한 제도적 절차만으로는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남아공에서 ‘진실과 화해’의 문제는 어떤 면에서 이 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된 1998년 7월 이후의 시점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법률적 사면을 통해 부여한 국가적 차원의 제도적ㆍ행정적 용서 및 화해가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들 간의 용서와 화해로 곧바로 직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해는 중앙정치의 제도적 장에서 상징적으로 구현되는 것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적어도 남아공에서 진정한 화해란 사회구성원 사이의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 조건의 평등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는가 하는 문제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아공에서 그 평등 실현의 가시적인 지표는 다름 아닌 ‘토지’ 즉 땅이었다. 지난 시절 남아공 백인정권의 역사는 한 마디로 흑인들을 토지에서 유리시킨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3년에 제정된 ‘원주민 토지법’은 흑인들이 ‘거류지’라고 불리는 지역 외에서 토지 소유는 물론 백인 소유의 토지 소작마저 금지했다. 1936년의 ‘원주민 토지법’과 1950년의 ‘집단 거주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법으로 흑인들의 자유로운 토지 보유와 거주를 점점 더 엄격하게 제한했고, 그런 법을 근거로 흑인들에게서 조직적으로 몰수한 토지를 백인들에게 재분배했다. 그랬기 때문에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과 더불어 흑인들의 토지 귀환 욕구가 증폭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고, 그들의 귀환은 필연적으로 백인농부들과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갈등은 더 나아가 흑인들에 의한 백인농부들의 무차별적인 살해라는 ‘전쟁 상황’으로 발전했다.  

여기서, 소설 『추락』이 발표된 시기(1999년)가 바로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한 시점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쿳시가 어떠한 현실 가운데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으며, 이 소설이 어떠한 역사적 현실을 관통하는 작품인지를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추락』을 관통해 흐르는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활동 및 “토지 귀환을 둘러싼 전쟁 상황”이었다. 전자가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문제라면, 후자는 남아공의 인종 및 계급 간의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뒷받침 하는 정치경제학적 토대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의 현실을 겪고 있던 남아공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추락』은 기본적으로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남아공이 부딪치고 있는 이런 두 가지 역사적 과제에 대한 소설적 은유로 읽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소설 속 문제의 현실성 - “그러니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진실과 화해’를 통한 이데올로기적 과거사의 청산 그리고 ‘토지의 귀환’을 통한 잔존하는 사회경제적 차원의 불평등 해결, 이 두 가지 차원의 변혁적 과제를 수행하는 중에 극심한 갈등과 혼란을 경험하고 있던 1999년의 남아공, 이 소설 속의 세계가 처한 현실이었다. 그러니 이제 이 혼란의 세계 앞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세계에서 두 주인공 루리와 루시는 따로 또 같이 제 몫의 선택을 요구받는다. 바로 이것이 이 소설의 ‘문제의 현실성’을 구성한다. 예컨대, 루리가 멜라니를 성희롱한 혐의로 대학 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는다는 설정은 정확히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은유라 볼 수 있는데, 루리는 여기서 스스로를 향해서 진실한 내면의 참회를, 멜라니를 향해서는 형식적 차원의(즉 절차적 차원의) 사과를 넘어서는 인격적ㆍ윤리-정치적 차원의 사죄를 요청받은 것이다. 그러나 루리는 조사 과정에서 ‘혐의 사실’은 인정하지만 잘못을 반성하고 참회하기를 거부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진상조사위원회란 오로지 법적 영역만 담당할 수 있고 참회나 사과 같은 개인 내면의 진정성까지 문제 삼을 권리는 없으므로, 여기서 참회를 표현하는 일은 잘못된 타협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즉 자신이 다만 당시 “에로스의 노예”로서 행동한 것이라 진술하고(p.81) 급기야 심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기자에게 “나는 이번 경험으로 풍부해졌소”라고 말한다(p.87). 총장이 마지막으로 제안한 사과성명 발표마저 거부하고 대학에서 파면당하는 것을 기꺼이 수용했던 그가 끝까지 고수한 입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뒤에 멜라니의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 중에서 드러난다. “나한테는 서정적인 게 부족합니다.”(p.260) 물론 그는 자신의 성희롱사건과 루시가 당한 강간 사건 사이의 모종의 연관성을 감지했기 때문에 멜라니의 집을 방문하여 사과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변화는 자신의 위치를 ‘가해자’로 인정한 것에 그칠 뿐 정작 사건 자체를 바라보는 입장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부인과 또 다른 딸에게 무릎을 꿇는 행위도 멜라니의 아버지가 자신의 “속임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진 상황에서 이제 어떻게든 상대방으로부터 적절한 사면을 빨리 받아내기 위한 의도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걸로 충분할까?” “이거면 될까? 안 된다면, 어떤 게 더 있지?”(p.263) 

여기까지 그가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 오류는 조사위원회의 요구를 개인의 내밀하고 사적인 욕망에 대한 부당한 간섭으로 곡해했다는 점이다. 루리 자신이 멜라니에게 욕망을 실현한 행위가 멜라니에게 딱히 강간은 아니었지만, 명백히 그녀가 욕망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이 욕망의 실현 과정에서 명백히 교수-학생, 백인-유색인, 남성-여성이라는 권력관계가 개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루리가 그토록 강변하는 그 욕망 자체가 이미 (서정적인 것의 충분 여부와는 관계없이) 순수한 것이 아닌 정치적 맥락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사위원회의 참회 및 사과 요구는 윤리적인 차원인 동시에 정치적인 차원의 요구였으며, 자신의 욕망 의 기원과 조건 그리고 성질 자체를 근원적으로 성찰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루리에 의해 제기되는 이러한 선택의 요구들을 통해 작가는 ‘진실과 화해’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의 실제적 가능성을 독자들에게 새롭게 문제 제기하는 것이다. 루리가 당면해 있는 문제는 기실 그에게 이 세계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건 모종의 윤리-정치적 의견 표명을 강제하는 요구였다. 그런데 루리는 이 문제 앞에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가? 루리는 “죄의 세속적 탄원과 회개의 보다 영적인 영역을 구분”하면서 회개와 용서의 개념을 스스로 문제화한다. 사실의 진술과 회개는 서로 다른 담론의 영역을 점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공허한 고백을 거부하고, 제도적 거세를 선택한다.   

한편, 남성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헬렌이라는 친구와 동성애를 관계를 맺은 “완전한 시골여자”(p.92)로서, “개를 돌보고 꽃과 채소를 팔아서” 꾸려가는 “단순한 삶”을 선택한, 그래서 “인간이 갖고 있는 특권 일부를 동물들과 공유하”고 살아가는 루시.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단순하고 평화로운 대지에서의 삶은 지극히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꾸려지고 있는 것이었다.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던 지배체제가 타파된 이후 남아공에서는 과도기적 폭력이 만연해 있었으며 미혼의 젊은 백인여성 농장지주인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조건 덕분에 언제든지 폭력의 희생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의 안전은 총과 개들을 통해서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는 불안한 상태의 안전이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은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남긴 부정적 유산이었다. 그녀가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은 지난 역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반성적인 비판에 바탕을 둔 것이긴 했지만, 아직은 다분히 낭만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바램과 달리 그녀가 꿈꾸는 삶, 모든 생명의 조화에 바탕을 둔 상생과 공존의 삶을 일순간에 파괴할 수 있는 위험의 요소가 남아공에는 지속적으로 잔존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결국 ‘토지’의 흑인으로의 귀환 문제와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남아공에서 토지 불평등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잔혹성과 야만성을 상징하는 가장 핵심적인 모순구조였다. 남아공의 인종차별이 극심한 계급불평등으로 직결되도록 매개하는 실질적인 착취의 토대가 바로 이 토지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 시대는 흑인들의 토지로의 귀환 욕구가 증폭되는 것과 궤를 같이했다. 지난 시절 토지를 부당하게 박탈당했던 흑인들의 관점에서는 백인들의 토지를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되찾아야 했다. 그것은 그들의 정당한 권리행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백인들의 입장에서 그런 행위는 ‘합법적 절차’에 따라 소유한 토지를 약탈하는 야만적 행위였다. 소설 속에서 루시가 이러한 흑인들의 정당한 권리행사 혹은 야만적 행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별로 충격적이지 않다. 이미 소설 밖의 현실에서 그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루시가 강도와 강간을 통해 맞닥뜨린 새로운 폭력의 세계는,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흑인 여성들을 성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별 문제 없이 일상화되어 있던 루리에게 어느날 갑자기 성희롱의 추문으로 들이닥친 그 세계와 결국 같은 세계일 뿐이다. 

루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요구 즉 피상적 차원의 죄과 시인이냐 아니면 윤리-정치적 차원의 사죄냐, 라는 물음을 통해 이 소설이 당시 남아공의 백인들이 ‘진실과 화해’의 역사적 과제 앞에서 처해 있던 문제의 현실성을 구성해냈다는 지적은 이미 앞에서 했다. 한데, 루시의 경우는 루리와 달리 자신이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선택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조건을 떠남 즉 패배냐 아니면 치욕을 감수한 생존의 도모냐, 로 해석하고 그 가운데서 후자를 선택하려 한다. 루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요구를 구조적으로 잘못 파악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강간 및 강도 사건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요구를 생존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오류를 범한다. 즉 루리의 제안대로 생모와 친척들이 도와줄 네덜란드로 돌아가거나 루리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아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잊을 수 있는 어디 다른 먼 곳에 재정착하는 것까지, 그 다른 삶의 가능성이 그녀에게 완전히 닫혀 있는 것이 분명히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지금 이 농장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이 패배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거부한다. 

대신에 여기에 계속 있음으로써, 자신의 땅을 계속 일구고, 지속될 강간 및 강도의 위협을 모면하고자 페트루스의 사실상 첩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 결국은 땅의 소유권을 페트루스에게 넘겨주고 “그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내 허락 없이는 이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p.308)는 권리 하나만을 챙기는 것이 생존이라고 주장하며 그쪽을 선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녀의 그러한 생존 전략이 그녀가 먼저 거부한 패배로서의 생존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 것인지를 우리는 사실 잘 알 수가 없다. 루시의 논리는 땅의 주인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땅을 제 손으로 일굴 수 만 있다면 그것으로 성공적인 생존을 선택했다는 의미일 터,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존엄성마저 부인한 굴욕적인 밑바닥에서 아무 것도 없이 다시 시작하여, 그녀의 말대로라면 “개처럼 되어”(p.307) 결국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우리는 끝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3. 소설 속 해결의 현실성 -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무엇을 향해”

자신의 최소한의 주체적 인격마저 온전히 내버린 상태에서, 그리고 강간 사건의 해결마저 포기하고, 강간범 일당 중 하나인 풀럭스가 수시로 자신을 훔쳐 보는 사태도 참아내고, 강간의 결과로 생긴 임신을 견디고, 끝내는 그 아기를 낳아 기르기로 하고, 자신의 성정체성까지 위반하며 (잠을 함께 자고 싶어 하지도 않는) 페트루스의 세 번째 부인이 되겠다는 루시의 일련의 선택들 앞에서 우리는 실상 이 소설이 남아공의 ‘토지 귀환’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납득할수 있는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리라는 우리들의 기대를 철저히 배반하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이 소설이 갖는 상당히 독특한 미덕인지 모른다. 루시의 비논리적이다 못해 독자들에게 불편함마저 느끼게 하는 저 선택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의 순환구조를 백인들이 먼저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것을 깨뜨리고자 한다면 백인들이 지금 마치 “개처럼”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철저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썩 좋은 해결책은 아닐 수 있다. 그렇다고 독자가 소설을 다 읽은 후 현실에서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그런 해결책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가장 ‘소설적인’ 혹은 ‘소설다운’ 해결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만이 제기할 수 있는 지극히 소설적인 해결책은 소설 밖의 현실 세계에서 실현이 가능한 것으로서의 그런 해결책이 아닐지 모른다. 

무릇 진정으로 소설적인 해결책은 한 사회가 완강하게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통념적 좌표를 흔들면서 ‘문제의 현실성’을 보다 심화ㆍ확장시키는 특정한 선택지의 제출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루시의 선택이 좋은 해결책인지 아닌지는 독자들마다 갖고 있는 각각의 윤리적,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의견이 나뉘겠지만, 객관적으로 확실한 것은 이 소설이 루시의 아버지인 루리에게마저도 그러했듯이, 동시대의 통념적 해결책을 거스르는 매우 이례적인 ‘선택’을 보여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독자들이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및 토지의 귀환 문제에 대해 그 고민과 성찰을 중단할 수 없도록 강하게 자극한다는 점이다. 

작가 쿳시의 말을 빌리면, 그의 소설이 지향하는 것은 “벌어진 틈, 거꾸로 된 것, 아래쪽에 있는 것, 베일에 가려진 것, 어두운 것, 묻힌 것, 여성적인 것 등 타자를 읽는 데 있다.” 그의 소설들이 그러한 입장에서의 세상읽기이자 현실에 대한 사유의 한 방식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그 테두리 내에서 그의 문학세계를 좀 더 공감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는 소설가이고, 그가 우리와 만나는 방식은 소설을 통해서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소설 안에서 소설의 세계를 만나고, 소설의 문제를 고민하며, 소설의 해결과 논쟁한다. 역설적이지만, 그러한 소설의 길을 충실히 따를 때 비로소 우리는 소설을 너머, 소설이 반향하는 “진짜 현실의 공포”와 대면할 수 있는 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