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서스펜스 걸작선 1 밀리언셀러 클럽 19
엘러리 퀸 외 지음, 제프리 디버 엮음, 홍현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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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콜렉터>의 제프리 디버가 엮은 세계 서스펜스 걸작선 중 1권입니다. 원제는 입니다. 몇 작품이 원저자의 요청으로 수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 권으로 나온 것은 아쉽습니다. 두 권 정도가 적당하다고 보는데...

(당연하게도 1권만 놓고 봤을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이 단편집을 읽고 나서는 약간 당혹스러웠습니다. 수록된 단편들의 수준이 나뻐서가 아닙니다. 작품별로 편차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무리가 없는 선정이라고 보여집니다. 작가들도 충분히 좋습니다. A.K. 그린에서부터 최근의 막스 알란 콜린스까지 범위가 넓어서 좋았구요. 디버의 오지랍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구요. (그러면서 본인의 단편을 슬쩍 넣는 센스란!)

그런데, 제목에 적합한 선정인가? 라는 점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책 뒤편에 실린 서스펜스의 정의대로라면 1권에서 서스펜스가 느껴지는 작품은 많지 않습니다. <사라진 13쪽> 같은 고전물은 예외로 치더라도-전 이 단편이 별로였기 때문에 예외라고 보지 않습니다만-<배트맨의 조력자>나 <힐러리 여사>는 서스펜스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꼭, 이 단편들이 아니더라도 1권에 수록된 단편들의 분위기는 서스펜스의 긴박감이라는 측면에서는 전체적으로 느슨한 느낌입니다. 다른 단편들도 그렇게 긴장감 있게 다가오지는 않더군요. 제 취향상, 웬만큼 쎄지 않고는 긴박감을 못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오히려 전 여기 묶인 단편들의 특징이자 장점은 모호한, 그래서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면서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결말에 있다고 봅니다. 특히 후반부의 단편들은 그런 면에서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약간 불만스러웠습니다. 음식점에서 코스요리를 먹다가 중간에 일어난 기분이라고 해야할까요. 왜 이런식으로 끝내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그 결말의 뒷맛으로 인해 머릿속에 잔상도 많이 남고,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되더군요. 이 점이 이 단편들의 장점이자 가치인 듯 싶습니다.

무리하게 추측해 보자면, 디버가 사용한 Suspence라는 용어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넒은 의미의 '추리소설'을 가리키고 있는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의 선정이나, 작품들의 고른 품질을 돌이켜 볼 때 전혀 엉뚱한 생각은 아니라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만, 2,3권을 읽을 때까지는 판단을 유보해야겠죠? 어쩌면, 제 개인적인 느낌이 마이너한 느낌이라 대다수의 추리소설애호가분들은 이 단편집에서 서스펜스를 느끼실 수도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일종의 정중동서스펜스라고 해야할까요?

결론삼아 말씀드리자면, 제목에 구애받지 않고 읽으신다면 충분한 재미를, 만약에 제목에서 연상되는 일반적인 의미의 서스펜스를 기대한다면 실망하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까지 늘어놓은 칭찬에 비해, 별점 평가가 낮은 이유도 제가 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리뷰를 쓰기 위해서긴 하지만, 다시 읽을수록 호감도는 높아지네요.

불평하나만 하자면 명색이 서스펜스 걸작선인데, 서스펜스의 대가인 윌리엄 아이리시의 단편이 없다는 건 팬 입장에서 서운하군요. <밤 그리고 두려움>의 <담배>같은 단편만 되도 실릴 자격이 충분하다고 보는데. 그리고 리뷰를 쓰려고 서문을 다시 한번 읽었는데, 결말부분이 좀 의아하네요. 

끝으로 지난 100년간 쓰여진 서스펜스 단편의 핵심 작가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이 책에 실린 작가들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 엘러리 퀸으로 알려진 사촌지간 맨프레드 리와 프레더릭 더네이, 비평가이자 평론가인 에드워드 호치는 평생 단편만 써 온 미국 내 극소수의 작가에 속한다. 

EQ가 평생 단편만 썼다는 번역도 웃기지만, 왜 이 말만 하고 '내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려 한다.'라고 서둘러 끝맺음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원문이 그런 건지 번역 과정에서의 실수인지는 모르겠네요. 이어지는 내용이 혹시 18금이었나?

엉뚱한 소리는 이만하고, 각 단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황태자 인형의 모험, 엘러리 퀸
황태자 인형을 둘러싼 대도의 예고와 이를 막기 위한 퀸 부자의 분투를 다룬 단편입니다. 엘러리 퀸의 장점 중에 하나는 등장인물에 대한 꼼꼼한 설정이라고 믿는 독자 중에 하나인데, 서두에 인형 소유주의 일생을 서술하는 장면은 역시 퀸답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필로 이루어진 인물화는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난리법석 속에서 느껴지는 왁자지껄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좋았구요, 나중에 약간 거드름 피우면서 사건을 설명하는 퀸의 모습도 귀엽습니다. 

2. 사라진 13쪽, 안나 카타린 그린
작가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소개를 보니 '추리소설의 어머니'라고 하는군요. 역사상의 의미를 제하고 나면 그렇게까지 뛰어난 작품은 아니라고 봅니다. 가문의 비밀이 버무려진 고딕호러풍의 단편입니다만, 잘 읽히지가 않더군요. 내용 전개가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 강합니다. 아무래도 고전기의 작품이니 심심한 맛도 있구요. 특히 후반부의 비밀이 폭로되는 부분에서 정보가 너무 부실합니다. 같은 내용을 포가 썼다면 훨씬 더 재미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입니다. 아, 생각해 보니 비슷한 작품도 있긴 하군요. 역설적으로 포의 천재성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3. 숨겨 갖고 들어가다, 리사 스코토라인
아직 아버지는 아닙니다만, 이 작품이 이 단편집의 최고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검사보 톰 모란의 눈물겨운 분투기가 이어집니다. 예전 코엔 형제의 <아리조나 유괴사건>을 보는 듯한 블랙 코메디가 압권입니다. 유머와 적절한 해피앤딩까지 모든 것을 갖춘 대단한 단편입니다. 물론 저는 아직 총각이라 블랙 코메디로 읽히지만, 육아를 경험하신 분들께는 진정한 서스펜스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감히 일독을 권하는 단편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번역 제목은 어색합니다. 4자 대구를 맞추기 위해 '숨겨 갖고 들어가다.'라는 제목을 쓴 것 같은데, 더 자연스러운 표현이 없었을까요? 숨긴 채로 들어가다. 숨겨 가지고 들어가다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4. 배트맨의 협력자들, 로렌스 블록
작품의 발표 연도는 <800만 가지의 죽음>과 <백정들의 미사>의 중간 쯤에 있는 단편이지만, 읽으면서 초기작의 느낌이 강하더군요. 경찰에서 쫓겨난 뒤 사립탐정을 갓 시작했지만, 일거리가 없어서, 철거용역반 노릇을 하는 스커더라고 할까요? 느릿느릿하게 진행되지만, 그 안에서 보여지는 스커더의 심리묘사와 미국의 밀입국자들에 대한 묘사가 일품입니다. 후자는 약간 인종차별적이라는 느낌도 받았지만 말이죠. 단편 자체는 마음에 드는데, 서스펜스라는 느낌은 약합니다. 아마 스커더를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인상적이지만, 사전 정보가 없는 분들께는 심심한 단편일 수도 있습니다. 

5. 주말 여행객, 제프리 디버
편집자인 제프리 디버의 작품입니다. 영국추리작가협회 단편상 수상작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지만, 후반부의 결말을 일치감치 예측해버려서 약간 김이 새버렸습니다. 하지만 강도와 인질범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중동의 심리변화와 대화는 인상적입니다. 

6. 그 여자는 죽었어, 프레드릭 브라운
<교환 살인>으로 유명한 프레드릭 브라운의 단편입니다. SF작가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아직 SF단편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몰락했지만 재기를 노리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진행과정은 상투적이지만, 프레드릭 브라운의 필력이 심심함을 달래줍니다. 주인공의 독백이 맛깔스럽게 진행되죠. 이 작품이 전 의외로 마음에 들었는데요. 결말 때문입니다. 열린 결말이라고 해야할까요? 결말 부분의 모호함과 뒷맛만 놓고 보자면 이 단편집 중에서 최고라고 봅니다. 저만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해피앤딩일까요? 아니면 언해피앤딩일까요? 이상하게 다양한 생각이 오고가더군요.

그리고 이 작품은 <옥스퍼드 운하사건>이랑 제목이 같더군요. 그냥 신기했습니다.

7. 원칙의 문제, 맥스 알란 콜린스
딱, 제 취향입니다. 아마도 다른 분들에게는 범작이었겠지만, 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일전에 나혁진 님이 말씀하신대로 <신 시티>스타일입니다. 선악구분이 모호한 등장인물, 은퇴한 청부업자, 변태납치범, 납치된 부자집 아가씨. 그리고 노골적인 폭력. 실제로도 대부인 미키 스필레인의 추종자인 콜린스의 진가를 맛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CSI는 모르겠지만, <딕 트레이시> 소설판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많이 소개가 안된 작가인데, 앞으로 소개가 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8. 힐러리 여사, 안윌렘 반 드 비터링
힐러리 여사는 힐러리 클린턴을 이야기하는 것 같더군요. 파푸아뉴기니 추장의 입을 빌려, 미국의 제국주의를 점잖게 풍자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대의에는 공감하는데, 진행과정이 심심했습니다. 그래도 작가의 현실인식에는 공감하는 바입니다. 예전 <암호 미스테리 걸작선>에 수록된 오 헨리의 단편을 연상케 하는 단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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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4-20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이런 단편집은 몇편에 만족하게 되더라구요^^:;;

상복의랑데뷰 2006-04-20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수에는 불만족 하게 되지 않나요? ㅋㅋ 너무 노골적인 야유인가...^^

oldhand 2006-04-21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툼한 부피에 비하면 단편 8개의 압박이.. OTL

상복의랑데뷰 2006-04-21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길사에서 나온 단편집을 생각하면 더욱 아쉬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