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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드래건 1
토머스 해리스 지음 / 창해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저한테 토머스 해리스는 <양들의 침묵>, <한니발>, <레드 드래건> 영화 3부작의 원작자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블랙 선데이>는 재미가 없다는 평이 많아서 선뜻 손이 가지 않고, 영화가 재미있었기 때문에 굳이 책을 또 읽어야겠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화 <레드 드래건>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별 기대하지 않고 봤는데, 인트로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실 <레드 드래건>은 뛰어난 영화라고 할 수는 없는데도 말이죠. 영화를 보면서 책에서는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라는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찾아서 읽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장면은 없습니다. 잠깐 윌 그레이엄의 회상에서 언급될 뿐, 소설의 시작은 잭 크로포드가 윌 그레이엄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원작을 거의 그대로 옮기긴 했는데, 디테일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은근히 있습니다.
영화의 메인은 렉터와 그레이엄의 대결입니다. 딜러하이드는 그저 대결을 위한 소도구에 불과하구요. 영화는 한니발 렉터와 의 거대하고도 음산한 그림자가 그레이엄과 딜러하이드를 덮고 있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한니발 렉터>윌 그레이엄>>딜러하이드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레이엄과 딜러하이드는 한니발 렉터가 깔아놓은 체스판 위에서, 보이지 않는 렉터의 손에 의해 움직이는 체스말 같습니다. 우리가 <양들의 침묵>에서 이미 본 것처럼요. 그러다보니 영화 속에서 랄프 파인즈가 충분하게 표현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살인마인 딜러하이드의 캐릭터가 약한감이 있습니다. <양들의 침묵>이후에 나온 두 영화는 원작과 상관없이 렉터의 비중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딜러하이드의 개인사는 완전히 도려내졌더군요. 안소니 홉킨스가 워낙 인상적이라서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마치 <양들의 침묵>식으로 <레드 드래건>을 뜯어고쳐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반대입니다. 소설은 윌 그레이엄과 딜러하이드의 대결 위주로 진행됩니다. 소설에서의 렉터는 <양들의 침묵>에서 스털링에게 그러하듯이 윌 그레이엄에게 영향을 주려고 합니다만, 윌 그레이엄은 렉터에게 의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어떻게든 딜러하이드를 잡으려고 합니다. 소설은 링 위에서 벌어지는 권투 경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주의라고 할까요? 윌 그레이엄과 딜러하이드는 서로 죽이려고 혈안이 됩니다.
대신 책에서는 많은 지면을 들여서 딜러하이드의 개인사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얄팍해보였던 딜러하이드의 정신세계가 어느 정도 공감이 가더군요. 다른 분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어렸을 때 왼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이유로 꼬집히고 놀림당한 기억이 많았던 저로써는 딜러하이드가 당했을 끔찍한 고통이 어렴풋이 이해가 됩니다. 그 부조리함으로 인해 초월적인 힘을 숭배했던 거겠지만...예전에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으면서, 우리 주위의 '다름'에 대해 얼마나 포용력이 적은가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딜러하이드의 일생도 자신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연쇄살인범이 되고 말았지요.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위 환경이 개인의 일생을 결정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전 상당히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 딜러하이드의 어머니에게 화를 느끼게 되더군요. 한 줄로만 등장하는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그에 비하면 엄격했던 외할머니는 노력이라도 한 편입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부모의 사랑을 듬뿍받았다면, 연쇄살인마 대신에 고통을 이겨낸 용감한 딜러하이드씨를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해리스의 소설이 아니라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나왔겠죠? ^^
책을 덮고 나니 착찹하더군요. 과연 윌 그레이엄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레이엄은 그게 직업이라고 칩시다. 하지만 몰리는? 한 사람의 악행은 그 자신으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위의 남겨진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겠죠.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사는 삶이 얼마나 힘든 삶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소설이었지만, 뒷맛이 개운한 소설은 아닙니다. 물론 추리소설이 살인이 먼저 일어나는 소설이지만, 이 작품은 해리스의 현실적인 묘사와 이미 본 영화의 장면들 내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칩니다.
추신) 에드워드 노튼의 이미지 탓인지, 윌 그레이엄도 호감이 가더군요. 자신의 내적인 고통과 싸우면서 딜러하이드를 쫓는 모습은 신상적이었습니다. <양들의 침묵>에도 윌 그레이엄이 등장해도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만, 아마 그러면 <한니발>이 나올 수 없었겠죠. 그리고 <800만 가지의 죽음>의 매튜 스커더도 어린 소녀의 죽음으로 망가졌는데, 비슷한 케이스를 보니 신기하더군요. 그렇지만 윌 그레이엄은 비교적 잘 이겨냈습니다.
추신2) 제가 읽은 판본은 고려원입니다. 창해에서 두 권으로 새로 나왔습니다. 내용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추신3) <블랙 다알리아>와 의 작가 제임스 엘로이도 이 3부작과 비슷한 3부작을 내놓았습니다. LLoyd Hopkins라는 경찰이 연쇄살인마를 쫓는 내용인데, 엘로이 선생은 어떻게 그려냈을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