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좋게 구한 작품입니다. 자유추리문고는 좋아하는 문고판입니다. 지금은 재출간과 전집출간으로 인해서 구하기 쉬운 책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당시의 리스트는 (지금까지도) 초역이 많았습니다. 비록 헌책이었지만, <주정꾼 탐정>, <새벽의 데드라인>을 자유추리문고를 통해서 봤을 때의 감동이란...그리고 딱 주머니사이즈라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도 좋구요. 그리고 문공사처럼 번역이나 그림이 엉터리도 아니고 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먼탐정 캐러더스>는 어니스트 브래머(Ernest Bramah)의 단편선집입니다. 이 작품 역시 예전에 읽은 <구석의 노인사건집>처럼 셜록 홈즈의 등장 이후에 나온 고전기 작품입니다. 사고로 인해서 눈이 먼 캐러더스가 충실한 하인 퍼킨슨과 친구인 사립탐정 캐러일과 함께, 아니 정확히는 그들과는 별 '상관없이' 사건을 해결합니다.

캐러더스는 장님입니다.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의 증조부 쯤 되는 셈이죠. 작품 자체를 떠나서 '시력'을 제거한 브레머의 통찰력은 높이 사게 됩니다. 아마도 이러한 주인공은 거의 최초가 아닐까 싶은데요. 회색 뇌세포의 활동을 강조하기 위해서 탐정에게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주는 설정이 지금은 일반화되어있을지 몰라도 당시로는 신선한 발상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 나아가 브래머는 기존 작품들, 특히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를 충실히 분석하고 변용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시력'의 제거는 셜록 홈즈의 추리가 많은 부분 관찰에 의존하고 있음을 저자가 알지 았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또 캐러더스의 '눈' 역할을 하고 있는 퍼킨슨의 관찰에 대한 묘사는 상당부분 홈즈의 그것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또 셜록 홈즈의 영원한 클리세 중에 하나인 '~~에 대한 논문'이야기도 나오구요. 작품 자체보다는 홈즈의 흔적을 찾는 것이 더 재미있기도 합니다. 작품의 구조도 도일의 단편들과 비슷하지만, 이건 브래머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조금 더 생각을 해보자면, 캐러일이 무능한 사립탐정이고 캐러더스가 유능한 유한귀족인 것을 보면, 은근히 홈즈에 대한 경쟁심리나 우월감이 배어있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구요. 셜록홈즈는 가난한 블루칼라 중산층이라면, 캐러더스는 교양있고 부유한 유한귀족이니까요. 캐러더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만도 합니다. 자기는 무보수에, 시력이 없어도 홈즈 만큼 하니까요. ^^ 

그렇지만 제가 읽은 작품들은 거기까지입니다. 작품이 재미가 없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등장인물 간의 화학작용이 거의 전무합니다. 홈즈-왓슨 콤비에 비하면, 이 둘은 재미없는 영국신사들의 사교활동을 보는 것 같아서 영 심심합니다. 게다가 잠깐잠간 등장하는 퍼킨슨도 기계적으로 관찰만 하는 충직한 하인일뿐 그 이상의 매력은 없습니다. 캐러일은 사건을 가지고 오고, 도움을 요청하는 이상의 일을 하지 않구요. 둘 다 개성이 없습니다. 홈즈를 비롯한 다양한 경쟁작들을 구조적으로 분석한 느낌은 나는데, 자신만의 양념을 첨가하는데에는 실패한 느낌입니다. 좋은 레시피에 맛깔나는 재료가 있었지만, 요리사가 손맛을 낼 줄 모르고, 조미료가 없이 많들어진 요리 같습니다. 

또 주인공은 어떨까요? 캐러더스는 워낙 차분하면서도 뛰어난 교양을 가진 사람이라서, 당시에는 오히려 선호했을지도 모릅니다만, 지금 보면 영 심심합니다. 그의 우정의 표현이라는 것이 친구를 위해 자기 일정을 뒤로 미루는 정도밖에 없죠. 교양인이지만, <구석의 노인>같은 주인공의 강렬한 맛이 없습니다. 특징은 있죠. 시각이 없다는 점. 아이디어 자체는 높이살만 합니다. 그렇지만 시력이 없어서 주인공이 겪는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퍼킨슨이라는 충직한 관찰자가 늘 곁에 있다고 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어려움이나 실수, 한계 등이 있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관찰과 사고활동을 분리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인데, 문제는 이 작품에서는 그 둘을 분리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이한 점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퍼킨슨이 아파서 캐러일과 사건을 해결하는데, 캐러일이 불완전한 정보를 제공해서 실수를 한다던가 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더 좋을 뻔 했습니다. <해들럼 고지 비밀>에서 캐러더스의 약한 모습이 일부 비춰지긴 하지만, 이 단편은 재미가 없습니다. 지나치게 애국적인 모습이 강조되어 있구요. (번역되지 않은 단편에는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캐러더스가 취미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도 들 수 있습니다. 홈즈는 직업인입니다. 그래서 돈 앞에서도 비굴하기도 하고,-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편 중에 하나가 <프라이어리 학교>인데 작품 말미의 홈즈의 태도는 읽으면서도 즐겁습니다. 천하의 홈즈도! 이러면서 말이죠.-고용인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또 홈즈라는 인물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만의 괴퍅한 개성은 누구나 인정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싱싱한 느낌이 캐러더스에게는 없습니다. 그저 그에게 추리란 '선의의 도락'일 뿐이지요. 그가 자신의 능력을 썩히지 않고 남들을 도와주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그 이상의 재미는 주지 못합니다. 캐러더스가 차라리 잰체라도 했다면,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브래머의 야심은 '고품격' 추리소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캐러더스의 활동은 올바른 감성과 뛰어난 이성을 가진 귀족이 벌이는 일종의 사회봉사같은 면이 있으니까요.

대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건에 개별적으로 들어오는 작중인물들의 모습입니다. 이 단편집은 오히려 그 시대를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는 풍속소설로서의 가치가 돋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스트래스웨이트경의 간지>에 드러난 귀족들의 허세, <매싱검 장의 유령>에 드러나는 신사들의 모습은 그 시대의 가치관을 일정부분 반영하고 있는 듯 보여집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이 당시 프로이드가 상당히 위력을 떨쳤다는 인상을 다시 한번 받는데,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작품은 <구두와 은그릇>, 그리고 <컬비 거리 범죄>였습니다. 특히 <구두와 은그릇>은 너무 노골적이지요. 하지만 엉성합니다;; 

트릭에 대해서라면...음 냉정하게 평가해서 미안하지만 눈에 띄는 트릭은 <매싱검 장의 유령>인데, 이 트릭은 일종의 밀실 트릭인데, 캐러더스의 설명을 들으면 상당히 과학적이고 신선합니다. 그렇지만 역시 재미는 없습니다. --; 나머지 단편들은 초기의 일반적인 트릭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말 하면 좀 미안하지만, 제가 읽어본 최고의 작품은 <세계의 명탐정 44인>에 나왔던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해당트릭이 캐러더스의 트릭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캐러더스의 개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듯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고전기의 경향을 알 수 있는 작품으로는 손색이 없습니다만, 수작과 태작이 교차하는 작품선집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선집임을 고려하면 다른 작품의 질이 우려도 되구요. 개인적으로는 <구석의 노인 사건집>보다도 재미없게 읽혔습니다. 

추신) 이 작품에 대해서 말씀해주신 분들께서 <브룩밴드 장의 비극(The Tragedy at Brookbend Cottage)>을 최고로 꼽으셨는데, 이 단편집에는 없네요. 혹시 어디에 수록되어 있는지 아시는 분 계시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추신2) 이 작가는 중국인이 주인공인 Kai Lung 시리즈로 더 유명하다고 하더군요. 제국주의적 관점이나 오리엔탈리즘이 배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후에 재평가를 받는다고 하는데, 읽어볼 길이 없으니 답답할 나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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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1-25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이 <명탐정은 영원하다>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는데... 또 다른 단편집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안나네요.

상복의랑데뷰 2006-01-26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만두 2006-01-2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수는 죽어야 한다- 동서미스테리북스 안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상복의랑데뷰 2006-01-30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