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1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리얼 월드>를 읽고 잡친 기분 때문에 당분간 일본 소설은 안 읽으려 했는데, 우연히 눈에 띄길래 그냥 읽었다. 워낙 경쾌하고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기본은 하겠지 싶어...

기대 이상이었다.

이 책의 단점에 대한 다른 분들의 이야기는 매우 정확하다. 트릭과 범인의 정체 그리고 동기, 그리고 추리소설독자들에게 민감한 공정함 등의 추리소설로써의 평가항목은 낙제점에 가깝다. 엄격하게 추리소설의 잣대를 들이대자면 좋게 봐주긴 힘들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경쾌함 때문에 역설적으로 범인의 동기가 더 엉뚱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마 이 작품이 수상한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라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더 대단한 미스테리는 널리고 널렸다.  

다만 공정함에 관해서는 이제 체념하는 마음도 없지 않다. 갈수록 고도화된 수법이 등장하는 현대의 미스테리에서, 모든 단서를 공정하게 노출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단편이나 고전추리가 아니고서야 fair game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하기 힘들다. 논리적으로야 물 한방울을 봐도 나이아가라 폭포를 상상할 수 있고, 부품 하나만으로도 차를 상상할 수 있지만, 일반(추리)독자에게는 무리다. 특히 이 작품처럼 전문적인 영역을 다룰 경우는 말이다. 물론 쿄코쿠도처럼 초반 장광설로 작품의 세계관부터 모든 단서를 뿌려줄 수도 있겠지만, <광골의 꿈>처럼 아무리 좋아하는 독자라도 충분히 고역일 수 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불공정할지라도 매끄럽게 넘어가는게 나아보이기도 한다.  

조금 더 흠을 잡자면, 데뷔작에게서 보이는 실이 풀리듯 맥없이 풀어져버리는 급격한 결말도 그냥 웃어넘길 수 밖에 없었다. (데뷔작이라고 해서 마음의 각오를 하고 봤지만, 역시나 싶었다.) 아무리 대학병원/의료제도에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작가/주인공은 의사고, 의사의 편에 설 수 밖에 없다. 이 책도 그렇다. 의사의 입장이 노골적으로 반영된 결말부분은 경쾌하게 웃기에는 상당히 찝찝했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책에 묘사된 졸업시험에서 병원장 앞에 선 다구치처럼 '그럼 왜 좋다고 하는 겁니까.'라고 의문이 들법도 하다. 내 대답은 간단하다.

'이 단점들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큼 재미있기 때문이다.'

사실 위에서 쓴 이야기들은 다시 읽고, 또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고 나서 읽으면서 찝찝했던 부분들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것들이고, 처음 읽었을 때는 재미있다라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 그건 이 작가의 전략이 적중했다는 뜻이다. 이 작가는 단점을 메꾸기 보다는 장점을 극대화했다. 이 작품은 스피디한 진행과 캐릭터들의 개성에 모든 것이 종속되어 있다. 캐릭터, 사건의 진행, 모든 것이 그렇다. 하지만 희생한 만큼의 댓가는 충실히 구현되어 있다. 경쾌한 스텝으로 결말까지 달려가 버리는 작가의 재주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읽다보면 의문을 느낄 틈도 없다. 지루할 법하면 엉뚱한 이야기/캐릭터가 등장해서 지루할 틈이 없다. 의학관련 소설은 용어의 문제로 언젠가는 지루한 순간이 오는데 이 작품은 그런 부분이 거의 없다. (일정 부분은 매끄럽게 번역해주신 역자와 편집자의 몫이다.) 다구치의 느릿느릿한 조사가 지겨워질만 하니 로지컬 몬스터인 시라토리가 등장해서 온갖 잘난척을 하는 식의...트릭을 구성하는 재주는 없지만, 소설을 재미있게 구성하는 재주는 상당한 듯 싶다. 필력도 상당한 듯 싶고. (나같이 글을 무겁게 못 쓰는 사람에는 혹할만한 재능이다. OTL) 

게다가 이 소설에서 언급되는 빛과 어둠의 관계처럼 '2인 3각'의 콤비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고전 추리의 핵심 미덕 중에 하나인 와트슨-홈즈 콤비가 때로 등장하는 셈이다. 주인공인 다구치-시라토리를 비롯, 등장인물들이 2인 3각의 콤비네이션을 이룬다. 바티스타 수술 팀도 전체 팀의 느낌이 아니라 파트별 콤비의 개성이 눈에 들어온다. 2인 1조 콤비가 하나의 유닛이 되어 2유닛 1조의 콤비가 되고...또 모여서 콤비가 되고...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부분이 되는 기묘한 재미가 이 작품에는 잘 살아 있다. 개성외에는 기능적인 역할 밖에 수행하지 못하는 캐릭터지만, 그 개성이 주는 코믹한 불협화음이 큰 매력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이 다루는 주제가 무거운 것이 사실이지만,-결말부에 등장하는 범죄를 예방할 것인가? vs. 사건을 해결할 것인가?의 갈등은 추리소설 팬이라면 심각하게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팔묘촌>에서도 논란이 된 적도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그 부분의 긴장감을 좋아한다. 의사의 긴장감도 같이 잘 묘사되어 있고-작가의 경쾌한 태도로 인해서 별 무리없이 주제가 전달된다는 것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무게만 잡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일반 독자가 의료계에 대해 문제의식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기란 힘들다. 이 책은 그 경계를 비교적 정확하게 포착하고는 안전하게 멈춰선다. 그 지점을 알고 살짝 멈춘 작가가 얄미우면서도 그 재능이 부럽기도 하다. 

또한 내가 흐뭇했던 건, 책의 만듬새가 정성이 그득그득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표지는 지금도 흰 바탕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어 표지와는 다르면서도 작품의 유머러스한 느낌을 잘 살린 표지와 장마다 삽입된 일러스트, 보기 좋게 편집된 본문, 그리고 의학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쉬이 읽히게 만드는 번역과 해설까지 모두 만족스러웠다.(직전에 읽었던 <리얼 월드>에 워낙 디어서 그런지 바티스타어천가를 부르고 있다.)

나의 모자람과 부족함에 비하면 운좋게도 (일본) 미스테리에 많은 지식과 통찰력을 보여주시는 분들이 주위에 많이 계시다보니 이 책에 대한 이야기도 어줍잖게 들을 수 있었고, 읽게 되었는데, 간만에 즐겁게 읽은 작품이었다. 왜 화제를 몰고 왔는지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다음 작품들도 소개가 될지 모르겠는데, 내가 장점이라고 여긴 부분들만 계속해서 충실히 보여줘도 흔쾌히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두 콤비와 작가의 계속적인 활약상을 기대해 본다.

추신) 바티스타 수술이 <의룡>에 나왔다던데, 그 만화를 보지 않아서 얼마나 대단한 수술인지 모르겠다. 머릿속에는 WWE 바티스타가 떠올라서 좀 힘들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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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3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상복의랑데뷰 2007-06-03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공개 / 하하 그 전에 말씀드린 책도 보내드려야 할텐데......부럽습니다. ㅠㅠ

비로그인 2007-06-03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

상복의랑데뷰 2007-06-04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셔도 후회는 안하실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