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다가 역 하나를 지나쳐 갔다. 이 책 <달리, 나는 천재다!>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이 그렇게 정신 없이 재미있냐고? 뭐, 정신 없이 재미있을 정도는 아닌데, 하필이면 내가 그때 이 대목을 읽고 있었다.
"늘 그렇듯 아침을 먹고 나서 15분이 지나면 나는 귀 뒤에 자스민 꽃을 찬찬히 꽂는다. 그리고 볼일을 보러 나선다. 그렇게 변기에 앉아 있으면 구린내 없이 큰 볼일을 완수할 수 있다. 좀 과장해 말하면, 화장지의 향내와 자스민의 꽃 내음이 공간을 온통 메워 주는 것이다. ... 게다가 오늘의 대변이야말로 얼마나 순수했었는지... ('순수한'이란 형용사는 바로 이런 경우를 위해 존재해 온 것이었구나 하는 깜찍한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상상해보라. 천재 화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살바도르 달리가 귀 뒤에 자스민 꽃을 꽂고 큰 일을 보는 광경을... 자신의 변을 '순수하다' '시원하다' 예찬할 정도이니 며칠에 한번씩 변과 일별하는 나로서는 존경을 거듭할 뿐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일기를 엮은 이 책, <달리, 나는 천재다>를 읽으면 기분이 유쾌해진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괴짜였고 가끔은 주체할 수 없는 광기에 휩싸여 있는 그였지만, 내가 의외로 감명을 받는 부분은 이런 거다. 건강한, 삶의 환희에 넘치는 달리를 만날 때.
매일 아침, 잠에서 깰 때마다 난 지고한 영혼의 기쁨을 느낀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난 그 기쁨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바로 살바도르 달리라는 인간이 됨으로써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이다. 기쁨에 겨워 난 자신에게 묻는다. '어떤 멋지고 황홀한 날을 살바도르 달리의 날로 정해야 하지? 그리고 사람들은 갈리(주;달리의 연인)나 달리처럼 되지 않고 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거지?
때로는 작품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아 막힐 때도 있지만, 달리는 그때마다 자신에게 주문을 건다.
"지나치게 신중했던 탓인가. 그림의 오른쪽 허벅지 부분이 턱없이 빈약해졌다. 그래서 자꾸 덧칠을 하다가 그만 그림을 망치고 만다...
참, 이건 극비인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인 나, 달리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 하지만 바로 지금, 그 깨달음의 문턱까지 왔으니, 기대하시라. 어느 날 갑자기 고대 그리스의 작품을 능가하는 대작 한 점을 '뚝딱' 내놓게 될지 누가 알쏘냐. ... 바보 천치들은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며 외쳐 대는 충고처럼 나 자신도 그리 행동할 줄 알았겠지? 허나 이는 모르시는 말씀! 난 전적으로 예외적인 존재라는 걸 여태 몰랐수?"
난 지금 달리적 사고를 배울 필요가 있다. 조금은 뻔뻔하고(사실은 많이), 조금은 스스로를 과장할 줄 아는( '과장'을 지상 최대의 미덕으로 여기는...) 그런 달리를 배우고 싶다. 소심하고 조급하고 걱정 많은 나와는 안녕.
난 이제 달리의 친구가 될 거다.

<기억의 永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