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친구에게서 전화가 한 통 왔다.

그 친구는 대학 시절부터 작년까지 5년 넘게 나와 한 집에서 고락을 함께 해온.. 그야말로 보통 친구가 아니다. 그러다 작년 1월,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마술연수에 갔다가(그 친구는 현재 중학교 교사) 정말 마술처럼 어떤 남자 선생님을 만나 사랑에 빠져 그 후 7개월 후에 전격적으로 결혼을 했다. 그 친구의 결혼을 계기로 한 집에 살던 세 친구는 뿔뿔이 흩어지고, 나는 맨 마지막으로 그 집을 지키다가 올 2월에 새 집에서 혼자 살게 되었다.

우쨌든 전화를 한 친구는 다짜고짜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다음주 수요일이랑 목요일에 별 일이 없으면 나랑 같이 자 줄래?"

순간적으로 무슨 일인가 싶었다. 권선생님이랑 싸웠나? 그럴리가 없는데... 아무튼 더 이상 짐작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는 어쨌든 '예스'로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알았어." ......... "근데 왜?"

"응 딴게 아니구... 다음주 수요일, 목요일에 신랑이 수학 여행을 가거든. (신랑은 초등학교 교사) 근데 내가 지금 애기가 언제 나올지 몰라서 오늘, 내일 해..불안해서 누구하고든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애"

그렇다. 내 친구는 지금 만삭이다. 근데 벌써 출산할 때가 되었나? 4월 말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군. 아, 이 무심한 친구... (-> 나) -.-

아무튼 그래서 난 이번 주, 수요일 목요일 친구와 함께 자기 위해 원당에 가야 한다. 회사에서도 훨 멀고, 옷가지며 이런 것들 챙기려면 조금 불편하겠지만, 친구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상상을 해본다. 드라마에선가, 영화에선가 많이 본 장면이다. 나란히 옆에서 누워자던 친구가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날 흔들어 깨운다. 아기가, 아기가 나올 것 같애.. 화들짝 놀란 나는 옷가지를 챙겨 입고 친구를 둘둘 싸서 길거리로 나와 택시를 잡는다. 친구의 신음 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난 그동안 전설처럼 들어왔던 '택시에서 태어난 아기' 이야기를 상기하며, 부디 그런 일만은 벌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린다. 다행히 맘 착한 택시 아저씨를 만나 우리는 가장 신속하고 안전한 길로 병원에 당도하고, 난 아저씨에게 택시비를 드리며 잔돈은 넣으시라고 말한다.

정신 없이 수속을 밟고 친구를 병실로 밀어넣고 난 다음 난 신랑에게 전화를 한다. XX가 지금 애기를 낳으러 들어갔어요. 별탈은 없어요. 안심하세요... 신랑은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 하면서 지금 바로 서울로 올라오겠다고 한다.

친구가 들어간지 7시간째.. 난 출근도 하지 못하고 병실문을 지키고 서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친구의 비명 소리를 커지고 급박해져 가고, 나의 마음도 초조해진다. 부디 산모도 아기도 건강하게 해주세요. 예수님, 부처님, 알라... 신이란 신은 다 붙잡고 조른다. 

드디어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간호사가 나와 '사내아이입니다~(성별은 이미 판별됐다고...)'라며 맑은 미소를 보여준다. 병실로 뛰어 들어가 친구의 손을 꼭 붙잡고 '수고했어...'라는 말만 연신 되뇌인다. 그제서야 병원에 도착한 친구의 신랑이 사태가 평온함을 확인하고 활짝 큰 웃음을 짓는다. 행복한 세 식구를 바라보는 나... 눈에 그렁 눈물이 맺힌다. - The End -

물론 위와 같은 상황이 벌어져선 안되겠지. 제 아무리 친구가 좋아도 신랑이 곁에서 지켜주는 것만 하랴. 난 그냥 친구 다리나 주무르고, 밥이나 차려주고 오련다.

친한 친구의 첫 출산이기 때문인지 (내 친구들은 다 나 닮은  꼴이라 결혼이 늦다) 기분이 묘하다. 드디어 나도 날 '이모'라 불러줄 조카가 생기는 것인가?

엄마 뱃속에서 세상 나올 채비를 하는 조카야, 잘 듣거라.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쑴풍~ 후딱~ 나와야 한다. 괜히 아빠의 큰 머리를 닮아서 네 엄마 힘들게 하면 나중에 사탕 안사줄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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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4-25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정말, <배부른 친구>였군요. 난 또~

마태우스 2004-04-2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배부른 친구였군요.

Smila 2004-04-26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옆에서 라마즈 호흡 도와주는 법 알려드릴까요?

mannerist 2004-04-26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친구사랑하는 마음이 담뿍 담긴 마지막 말이 압권이네요. 근데 막상 '이모이모'그러는 자그마한 녀석이 치맛자락 잡아당기면 안사주곤 못배길거 같은데요 =)

sunnyside 2004-04-26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마태우스님 : 맞습니다. 그래서 '배부른 친구'랍니다. 뭐 평소에도 약간 '배부른 친구'이긴 하지만, 근래 들어 가장 '배부른 친구'지요. ^^;
Smila님 : 흠, 라마즈 호흡이라.. 정말 뭐든 찾아봐야겠어요. 며칠 안남은 산모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겁주기? ㅋㅋ)
mannerist 님 : ㅎㅎ 아무래도 그렇겠죠? 저도 지금으로선 자신이 없네요. '사탕은 몸에 안좋아~' 이러면서 딴걸 사주지 않을까 예상이 되오만.. ^^

starla 2004-04-26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왠지 수요일 목요일에 진통이 오면 재미있겠다~ 라고 생각하는 저는 나쁜 심보인 것일까요? ㅠ.ㅠ

sunnyside 2004-04-26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헤헤... 실은 저도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그런 일이 생기면, '나의 서재'에 쓸말이 마~니 생기겠다, 라고 생각한 적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