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의 길
이성욱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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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운다는 것처럼 쉽고 자연스러운 일은 또 없다.

우리는 제일 쉬운 방법으로 비극에 대처했던 셈이다.

언제나 쉬운 방법을 택했다.

우리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조세희, 시간여행

 

평론집을 읽을 때면, 항상 철지난 논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더욱이 이 책은 2002년 사망한 평론가의 유고집이니, 그의 글들은 1990년대 씌어진 것들이 대부분. 이인화의 표절시비부터, 1990년대 문학의 상품화에 대한 논의를 읽다보면, 한 번 본 드라마의 재방송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중간중간 빼먹어도, 흐름을 탈 수 있을 것 같은.  

그러나 몇 편의 글들을 읽는 사이, 나는 연필을 집어들었고, 책에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그의 논의가 새로운 것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들이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에. 이인화의 소설이 공지영과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라는 사실은 특이할 것이 없지만, 이인화 소설에 등장하는 심약한 지식인에 대한 분석은 2002년 이후에 나온 작품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삶의 질서나 현실의 체계에 발 붙이지 못하고 허황한 자신의 내면에만 침윤되어 있는 나약한 존재들. 그래서 그들이 지적하고 있는 문제도 공허하기 짝이 없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인물들. 결국 한 편의 소설이 심약한 지식인의 넋두리에 불과한 많은 작품들.  

이성욱은 구체적인 분석틀을 제시하며, 문학의 역할과 문학의 위기와 문학의 위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자본의 힘이 무엇보다 강해진 시대, 문학작품 역시 하나의 기획상품으로 전락한 시대의 초입에서 상업화의 심각성을 강조하며 원칙을 주장하는 그의 말은 분명 철 지난 논의이지만,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문학 외적인 것이 문학의 목을 조르는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만의 세계에 빠져 문학 외적인 것들을 무시하는 문학인들.  

이성욱의 글을 읽다보면, 문학의 위기를 운운하는 작금의 문학현실은 꼭 조세희 소설에 나오는 "둥근 눈물"을 흘리는 죄 지은 자들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쉬운 울음으로만 엄살을 떠는 사람들. 아무 것도 이룩할 수 없는 둥근 눈물로, 현실의 죄에 반응하는 무기력한 사람들. 자본이 죄이듯, 자본의 죄에 눈물을 흘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피해자들 역시 죄인이듯이, 문학의 위기 운운하며 그 위기만을 강조하는 모든 문학인들도 죄인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문학판에도 필요한 것은 각진 눈물. 제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고 아픔을 주는 그런 여러 모양의 눈물이 흘러야만, 상투적인 우울함만 가득한 문학판에도 무엇가를 다시 세울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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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0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잘 써요...

hanicare 2005-03-08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군데 군데 마음 찔려하며 읽습니다.지식인도 작가도 뭣도 아니지만 나약하고 둥근 눈물이나 양산한다는 것은 비슷한 꼴입니다.

선인장 2005-03-08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 잘 지내시죠? 곧 봄이 오겠지요?

하니케어님 > 저도 이 책을 마음 찔려하며 읽었습니다. 어째 그 글들이 씌어진 스무 살 무렵보다 더 못난 내 모습을 확인하면서 말이지요... 역시 지식인도 작가도 뭣도 아니지만 말이에요....

코코죠 2005-03-18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 막 선인장님 기쁜 소식 어우 막 봄빛처럼 쏟아지잖겠어요- 그래서 선인장님 서재에 올 때마다 눈이 부신당게요. 마이리뷰를 축하드려요, 선인장님. 이게 다 오즈마에게 책 선물해주셔서 온 행운이 아닐런지요(라는 얼토당토한 소리를 괜히 덧붙이고 가는)

선인장 2005-03-1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즈마님 > 아, 그래서 제게 행운이 온 거로군요. 그럼 또 행운이 오게 하는 방법은 역시 그거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