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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보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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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안 공동체 운동에 대해 생각해 본다.

  “가장 조화로운 삶은 이론과 실천이, 생각과 행동이 하나가 되는 삶이다.” -본문 中-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는 버몬트의 작은 터전을 마련하고 자급자족하는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가며  끝없는 탐욕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대안으로써 “조화로운 삶”을 실험한다.  

그들은 “잉여가 생겨 착취하는 일이 없을 만큼만 생산하며 도시문명에서는 누릴 수 없는 많은 여가와 휴식시간을 통해 자신들의 내면을 발전시키는 건강하고 소박한 생활”을 통해 소위 현대적 삶이라 일컬어지는 “소유를 위한 삶”에 대한 허위와 한계를 폭로하고 진정으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존재를 위한 삶”을 몸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삶의 이야기를 묶어 놓은 책이 바로 “조화로운 삶”이다.

  근래 한국에서도 귀농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여러 움직임들이 활성화 되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써 다양한 모색과 시도들은 자본주의의 형성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다. 맑스의 공산주의, 윌리엄 고드윈에서 바쿠닌, 크로포트킨의 전통으로 이어지는 아나키즘, 북유럽 모델의 사회민주주의, 가깝게는 한국에서 수유 +너머의 이진경 코뮨주의 역시 이러한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조화로운 삶”에서 스콧과 헬렌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 역시 그 근본은 크게는 사회주의 흐름의 소규모 공동체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고 볼 수 있을 것이다.(비록 그들의 공동체 형성을 위한 노력은 결실을 거두지 못했지만) 그리고 그들이 실천했던 절제와 비움의 삶은 거짓된 결핍으로 인간의 욕망을 끝없이 생산해내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아름다운 저항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있는 21세기의 현재적 관점에서도 유효하고 의미 있는 저항방법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대안적 공동체가 궁극적으로 사회구조를 변화 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러한 소규모 공동체라는 대안적 삶의 형태에 되물어져야 할 것이다.
 
자본의 폭력으로 자유로운 소규모 공동체적 삶의 방식은 비록 당사자들에게는 일종의 이상적인 삶의 구현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진중권의 지적처럼 “거시 기획의 실패를 미시 기획으로 보상하려는 것인 일종의 범주 오류”로 비판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정치․사회개혁에 좌절한 패배자의 자위행위라는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기 힘들다. 또한 한 철학도의 지적처럼 현재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이러한 공동체 운동이 어느 순간 국가와 자본에 위협이 되는 수준까지 활성화 될 때에 과연 현 국가, 자본주의 체계가 이를 용인하고 하고 수용할 것인가라는 의문도 든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나 지금의 대안적 소규모 공동체 운동은 현 국가체제, 자본주의 체제에 비 위협적인 취급 받을 때만 그 존속 여부를 보장 받을 수 있는 지극히 깨지기 쉬운 연약성을 가진 예외존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물론 추상적인 구호만을 외치거나 자조적인 한탄으로 현재적 삶에 충실하고 못한 채 공허한 소리만 허공에 울리는 삶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이룰 수 있는 것에만 천착한 나머지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것을 등한시 하는 삶 역시 동시에 지양되어야 한다.

“가장 조화로운 삶은 이론과 실천이, 생각과 행동이 하나가 되는 삶이다.” 스콧 니어링의 말이다. 그리고 생각과 행동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행동을 생각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지 그것이 결코 행동에 맞춰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조화로운 삶이란 “긴장(緊張)하는 삶”의 다른 이름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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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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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파울로 코엘료의 첫 소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한번 읽어야지 생각했던 책이었는데
지난 주말 별 생각없이 작업실 앞 책 대여점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빌려 읽었다.

첫 작품이기 때문일까?
사실 "순례자"에서 예전에 읽었었던 "연금술사", "오 자히르", "포르토벨로의 마녀"에서
파울로 코엘료가 보여주었던 특유의 흡입력있는 이야기 전개 방식이나, 그만의 담백한 글쓰기
스타일을 찾기 어려운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 부분은 기차에서 읽었는데 제법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그러나 이같은 세련미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순례자"는 그 나름대로 세공되지 않은 원석과 같은
거친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영성에의 추구"와 "한 인간의 내적 성장"이라는 코엘료의 트레이드 마크는
그의 첫 작품 "순례자"에서 이후의 작품보다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덜 동화적으로)그려지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직접 체험에 바탕을 둔 글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비록 코엘료의 작품이 어떤 의미에서는
"시크릿"(-이해불가의 베스트셀러)의 문학판으로 치부될 소지도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돈과 힘의 논리가 중력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그의 책이 때때로 나같은 사회 부적응자들의 
답답함을 해소해주는 소화제(달달하고 맛있는 소화제)역할을 해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한편 코엘료의 영성추구가
[서구 기독교 영성 : 순례자]  -> [고대 근동 영성 : 연금술사] 
  -> [고대 그리스의 모신(母神) 영성 : 오 자히르, 포르토벨로의 마녀]의 변화를 가지고 이어지고
있음에 주목하고 이를 비교하면서 그의 영성추구의 궤적을 따라가 보는 것도 코엘료 읽기를 더욱 즐겁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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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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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의 "생각의 좌표"를 읽었다.

사실 이 책은 약간의 "학습"을 경험한 사람에겐

별로 새로울 것 없이 일반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나 역시 책의 마지막 글에 이르기 전까지

이 책은 그동안 나름대로 의식화된 나 자신을 다시 점검하는 "좌표" 확인을 위한 책,

조금 더 의미부여를 하자면 그러한 확인을 통한 의식강화를 위한 책으로 받아들여졌었다.

 

그러나 "기억"이라는 마지막 글에서

나는 예순이 넘은 "오래된 좌파 지식인"의 한 문장을 통해

"좌파"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큰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삶의 궁극적인 지향이 가치 추구가 아닌
 구체적 변화를 목적으로 할 때 
 조바심과 불안감은 극복하기 어렵다" 

                                                     - 홍세화, 생각의 좌표 中-

 

 

좌파는 변화, 개혁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다.

좌파는 변화와 개혁을 외치기에 앞서 "가치"를, "인간애"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자이다.

조급해 할 필요가 없다.

굳이 권력의 중심에 서려 아둥바둥할 필요도 없다.

다만 "인간애"라는 가치를 향해

어제의 나, 오늘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나를 성찰해가며 묵묵히 "긴장"하며 걸어갈 뿐이다.

변혁도 혁명도 모두 인간애라는 가치추구의 과정이자 열매일 뿐이다.

 

예전 지인으로부터 "radical"이란 단어의 두 가지 뜻을 들었다.

흔히 알고 있듯이 이 단어는 "혁명적인", 혹은 "급진적인"이라는 뜻이 있다.

그러나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 단어의 첫째가는 뜻은 "근본적인"이라는 뜻이다.

 

진정한 혁명주의자, 급진주의자가 되기에 앞서, 우선 근본주의자가 되어야 함을 배운다.

"인간애"라는 근본을 추구하는 "radicalist"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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