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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 서울대 이태진 교수의
이태진 지음 / 태학사 / 2005년 8월
평점 :
저자는 한국인의 정치의식이 근대적으로 나아가는 특유의 과정을 주목하여, 일련의 지속적인 작업 하에 '조선 후기 민국정치 이념의 수립'이라는 결과를 도출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조선시대 유교사를 천착하여 온 그는, 건국 초기에 정부와 지식인들이 민생 개선을 위해 농업기술과 의술의 개발에 진력하는 한편, 조세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무려 18만 명에 달하는 관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까지 한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또 조선 후기 정치사를 재조명 하여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의식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형태로 일종의 정당정치인 붕당정치가 발달한 때도 있었고, 그 붕당정치가 한계에 도달한 시점(18세기)에는 탕평군주들이 소민(小民) 보호를 외치면서 민을 왕과 함께 국가의 주체로 인식하는 민국(民國) 이념이 등장한 사실도 확인하고 있다. 저자가 고종 시대를 보는 눈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책에 앞서 저자는 《고종시대의 재조명》을 간행하여 일본의 침략주의가 한국근대사 왜곡 작업에서 국가 차원의 성과를 부정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왜곡에서 생긴 편견과 오류에 대한 비판,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 거두었던 자력 근대화의 성과 등을 제시하여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 등의 침략주의 사관을 극복하는 기초를 다지고자 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한 서평을 계기로 교수신문의 지면에서 식민사관 극복을 내건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내재적 발전론’과 이를 비판하는 경제사학자들의 ‘식민지 근대화론’ 간의 대결 양상을 띠고 6개월에 걸쳐 전개된 결과가《고종황제 역사청문회》라는 책으로 정리되었다. 결국 이 논쟁은 한국 사회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는 중요한 결절점인 대한제국 시기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기왕의 ‘광무개혁논쟁’에서부터 시작되어 일제 식민지시기에 대한 평가, 박정희 개발독재에 대한 평가, 최근의 신자유주의 사조에 대한 평가, 향후 한국 자본주의 발전 전략에 대한 전망 등으로 줄줄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는 일본 도쿄대 철학센터 초청으로 2004년 6월24일부터 7월15일까지 도쿄대 고마바 캠퍼스 총합문화학과 대학원생 및 교수들을 대상으로 행한 총 6회의 강의와 일반에 공개한 특별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 저자에 의한 일련의 작업들이 다양하고 생생한 사진자료들과 함께 보다 구체적인 목소리로 전달되고 있는데, 그는 일본의 한국사 왜곡 출발점으로 고종 시대를 상정하고 침략 이전의 한국역사의 진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국의 개국에 가해진 일본의 폭력과 왜곡, 청일전쟁 전후에 자행된 일본의 폭력을 언급한 뒤, 대한제국의 근대화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방해를 근대화사업의 방향성과 서울도시개조사업을 중심으로 살피고 있다. 이어 러일전쟁과 일본의 한국 주권 탈취 공작을 자세히 논증하여 한국병합의 강제와 불법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수년간에 걸쳐 규장각의 자료와 일본 측의 관련 외교문서들과 씨름한 결과 한국병합은 무효일 뿐만 아니라 문서 요건 상 성립조차 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공표하기에 이른다.
저자는 진작부터 사료를 통해 잘못된 역사기록은 물론 외교관계 사실까지 바로잡는 역할을 해낸 사계의 독보적 존재다. 1988년부터 92년까지 규장각 관리실장을 맡는 동안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훔쳐간 전말을 상세히 밝혀내 외규장각도서 반환운동의 불을 붙였으며 일제강점의 근거가 된 여러 조약이 위조문서에 의한 불법행위라는 증거를 찾아냈다. 이어 대한제국이 자생적으로 근대화를 준비해왔다는 사실을 세제와 농업 의료 등 산업측면의 사료로 밝혀내 식민지근대화론을 이론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요컨대 한국을 무력으로 강제 병합한 일본이 그 역사를 매장하고 일본에 의한 근대화를 강조한 탓으로 우리 자신조차 잘못된 역사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려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역사의 진실을 알려 진정한 동아시아의 평화를 도모하고자 책을 간행했음을 저자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서두에 언급한 그의 역사인식이 비록 '한국사학의 모더니즘으로부터의 탈출'(한국사 시민강좌 20)을 꾀하고자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근대 극복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역사'의 재해석을 통한 저자의 인식이 정당한 시민권을 획득하려면, 또 하나의 '구성된 역사'를 넘어서려면, 논쟁 과정에서 대두된 수많은 과제들을 극복해야만 하겠기에.
또한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을 논의하기 위해선 전통과 근대를 상호 배제적인 이분법에 의거해서 보고자 하는 근대화론이나 근대에 인식론적 지위를 부여해 전통을 배제하거나 고립화, 정형화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달리 전통과 근대에 대한 복합적이고 모순적이며 내재적이고 맥락적인 이해를 전제로 하는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본 국내에서 자국민에 대한 억압과 통제의 양상이 식민지로 편입된 한국이나 대만, 만주 등지에서 변형된 형태로 적용됐다는 점에서 비교사적이고 동아시아적인 연구시각이 절실히 요구되며, 이제 1980년대 이후 상호관계가 본격화됨에 따라 동아시아적 시각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김경일, 2003).
이러한 요청들이 있기에 이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합의점들을 이끌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저자가 일본에 건너가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이 대체로 동일한 울림으로 다가와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