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 서강학술총서 45
강희정 지음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를 세웠다는 기록(삼국유사 大城孝二世父母條)은 <향전(鄕傳)>과 불국사에 전래되던 〈사중기(寺中記)〉를 바탕으로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석굴암은 일제에 의해 재발견된 것이다. 석굴암을 포함하여 일제의 복원과 수리는 고적의 '기술적 근대화' 과정이었으며 이러한 유물 유적의 물리적 근대화는 박물관으로 옮겨져 관람되거나 관광의 대상으로 탈바꿈되는 탈맥락화로 이어진다. 이후, 석굴암은 한국미술의 정점이라는 위상을 갖게 되고,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전해진 석굴사원이자 불교미술의 꽃이라고 규정되어 타자 조선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타자화된 과거 중국과 조선의 미술은 '낭만화된 과거'이자 일본이라는 동양의 선구자를 뒷받침해주는 '화석'이며 '박물'로 기능했던 셈이다. 이 책은 석굴암에 대한 인식의 기초를 살펴봄으로써 그 패러다임의 형성 과정을 고찰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근대를 다루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몽골제국의 후예들 - 티무르제국부터 러시아까지, 몽골제국 이후의 중앙유라시아사
이주엽 지음 / 책과함께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했던 몽골제국은 칭키스칸 사후 제국의 영토적 거대함, 칭기스 일족 내부의 대립과 전쟁 등으로 초기의 통합성을 상실하고 정치적으로 비교적 자립적인 몇 개의 ‘울루스’로 분할된다. 즉 카안 울루스(大元)를 정점으로 서방의 3대 울루스로 나뉘게 된다. 하지만 당시 그들은 자기네 나라를 Yeke Mongɣol Ulus, 즉 ‘대몽골 울루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14세기 이후 몽골제국이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과 같은 유라시아 제국들의 출현과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티무르제국, 무굴제국, 우즈벡 칸국, 카자흐 칸국, 크림 칸국과 같은 강력한 계승국가들로 분화, 발전함으로써 ‘근대 유라시아의 형성’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메시지이다.

분명, 이 책은 기존 연구의 빈 공간들을 메꾸고 있어 궁금한 점들을 해소시켜준다. 그러나 한정된 분량에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담다보니 그것들이 가지는 문명사적 의미를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아울러 국내에서 진행된 연구성과들 역시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다. 몽골제국이 열어나간 '세계사'의 의미가 이후 어떻게 전개되고 굴절되었는지를 충분히 살펴보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이를테면 김호동 교수는 역사상 처음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통합한 몽골제국이 세계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며,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 즉 유라시아 각 지역이 그 이전의 상대적인 고립성을 극복하고 유기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몽골제국의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강조한다.

각 지역·문명이 독자적인 역사발전의 내재적 계기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외부와도 단절되지 않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왔다고 보는 입장에서 보면 서구에 의한 소위 ‘근대적 세계체제’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유목제국에 의해 구대륙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강조될 수밖에 없으며, 이후의 전개과정 역시 이러한 시각에서 살펴봐야하지 않겠는가.


*

역사학과 네트워크 연결망의 관계에서는 두 가지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역사학 연구방법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히 새로운 세계사(global history)에서 그 연구대상인 ‘세계’(globe)를 일종의 네트워크 연결망으로 가정해그 구조, 변화 및 역동성을 탐구하는 시각을 가리킨다./이영석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나다 2020-09-17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몽골제국의 후예들>을 높이 평가하는 역사 전공자로서 들님의 서평에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해 봅니다.   

1. 들님 왈 ˝분명, 이 책은 기존 연구의 빈 공간들을 메꾸고 있어 궁금한 점들을 해소시켜준다. 그러나 한정된 분량에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담다보니 그것들이 가지는 문명사적 의미를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들님은 <몽골제국의 후예들>이 이 책이 다룬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의 문명사적 의미를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그 ˝문명사적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 문명사적 의미를 살피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몽골제국의 후예들>의 목표는 ˝몽골 제국은 어떻게 되었는가? 어떤 유산을 남기고 세계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는가?˝라는 중요한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입니다. 이 책이 답으로 제시하는 메시지는 ˝몽골제국은 어느 한 시점에 소멸한 것이 아니라 여러 계승국가로 분화, 발전했으며, 주요 유라시아 제국의 등장에도 영향을 줌으로써 근대 유라시아의 출현에 기여했다˝입니다. 이 책의 전체 내용은 이 메시지를 뒷받침하기 위한 논거들에 해당합니다. 이 논거들은 수많은 1차 사료와 국제학계의 최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수백 가지 혹은 필요한 만큼의 논거를 제시하는 것(이 책이 제시하는 논거는 철저(exhaustive)하다고 봅니다)이 중요하지 각 논거와 관련된 하위 주제들을 지엽적으로 다루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굳이 ˝문명사적˝ 차원에서 따져 보아도 이 책이 놓친 문명사적 요소는 무엇인가요?   

일단 실제로 중앙유라시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책이 역사적 사실들을 충분히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예컨대 

권용철의 역사책 소개 4편 - 몽골제국의 후예들https://www.youtube.com/watch?v=8_H7qUq4hXc&t=12s&ab_channel=%EA%B6%8C%EC%9A%A9%EC%B2%A0 

2. 들님 왈 ˝아울러 국내에서 진행된 연구성과들 역시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다.˝

들님은 <몽골제국의 후예들>이 국내에서 진행된 연구성과들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했는데 국내의 어떤 논저들이 ˝몽골 제국 계승국가들의 역사˝와 ˝몽골 제국이 러시아, 오스만 제국 등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고 있나요? 예컨대 카자흐 칸국과 우즈벡 칸국과 크림 칸국 혹은 잘라이르 왕조의 역사를 학술적으로 깊이있게 다룬 논저들은 어떤 것이 있나요? 몽골 제국이 모스크바 대공국이나 오스만 제국 혹은 사파비 제국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세히 다룬 논저들은 어떤가요? 북원 몽골에 대한 연구는 많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몽골제국의 후예들>이 놓친 내용은 무엇인가요? 

서울대 김호동 교수 저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가 <몽골제국의 후예들>이 다룬 몽골 제국 계승국들 관련 정보들을 그나마 가장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는 오류가 너무 많습니다. 

예컨대 <몽골제국의 후예들>에서 몽골계 국가로 다루는 잘라이르 왕조에 대해서 투르크만 계통이라고 적고 있습니다(172쪽). 그리고 잘라이르 왕조가 우와이스 사후 흑양조에게 멸망당했다고 적고 있습니다(172쪽). 잘라이르 왕조는 훨씬 후에 멸망했습니다. 같은 페이지에 티무르의 아들 샤루흐가 흑양조의 카라 유수프를 패배시켰다라고 적었는데 샤루흐는 카라 유수프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을 패배시켰습니다. 티무르가 1370년대에 주치 울루스의 주요 교역 근거지를 파괴했다고 적었는데(162쪽) 이는 1390년대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티무르의 칭호 아미르가 지도자를 의미한다고 했는데(170쪽) 아미르는 군사령관을 의미했습니다. 티무르의 손자 할릴 술탄이 권력을 잡았으나 피살되었다고 적었는데(172쪽) 그는 피살되지 않았습니다. 나디르 샤의 침공으로 코칸드 칸국이 1733년 부하라로부터 독립했다고 적었는데(178쪽) 나디르 칸의 침공은 1740년에 이루어졌고 코칸드 칸국은 1733년 이전에 독립했습니다. 압둘라칸이 우즈벡 칸국을 1557년에 다시 통합했다고 적었는데(178쪽) 실제로는 1580년대 초입니다. 카자흐 칸국이 1720년대에 일어난 대기근 등의 이유 때문에 러시아에 복속했다고 했는데(206쪽) 카자흐가 러시아에 복속한 것은 대기근 때문이 아니라 준가르의 침공 때문이었습니다. 더 오류들은 이외에도 더 많습니다. <몽골제국의 후예들>을 보면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에 포함된 오류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몽골제국의 후예들>이 국내의 연구성과들을 많이 참고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국내에 몽골 제국과 관련된 훌륭한 연구들이 많이 있지만 ˝(몽골 이외의) 몽골 제국 계승국가들의 역사˝와 ˝몽골 제국이 러시아, 오스만 등에 미친 영향˝에 대해 다룬 논저들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됩니다.      


3. 들님 왈 <몽골제국의 후예들>은 ˝몽골제국이 열어나간 ‘세계사‘의 의미가 이후 어떻게 전개되고 굴절되었는지를 충분히 살펴보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이를테면 김호동 교수는 역사상 처음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통합한 몽골제국이 세계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며,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 즉 유라시아 각 지역이 그 이전의 상대적인 고립성을 극복하고 유기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몽골제국의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강조한다. 각 지역·문명이 독자적인 역사발전의 내재적 계기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외부와도 단절되지 않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왔다고 보는 입장에서 보면 서구에 의한 소위 ‘근대적 세계체제’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유목제국에 의해 구대륙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강조될 수밖에 없으며, 이후의 전개과정 역시 이러한 시각에서 살펴봐야하지 않겠는가.˝
  
들님은 몽골 제국이 세계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며 세계사 탄생의 결정적 계기는 몽골 제국의 시대에 이루어졌다는 김호동 교수의 주장을 소개하며 <몽골제국의 후예들>은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왜 <몽골제국의 후예들>이 이러한 측면을 살피지 못했다고 들님이 보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몽골 제국이 셰계사를 탄생시켰다는 주장은 김호동 교수에 앞서 일본의 오카다 히데히로가 <세계사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오래 전에 한 주장입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는 1206년 몽골 제국에서 시작되었다˝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오카다 히데히로는 또한 “아시아와 동유럽에서 몽골제국은 서유럽에서의 로마제국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岡田英弘, 1999: 270)˝라고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몽골 제국이 실제 세계사의 탄생에 기여한 측면을 잘 보여 주는 책은 <몽골제국의 후예들>이 아닌가요? 몽골 제국이 세계사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김호동 교수와 오카다 히데히로의 주장은 이론 차원의 설명이었습니다. 몽골 제국과 관련된 세계사의 탄생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근대 유라시아의 형성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실제로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책은 <몽골제국의 후예들> 아닌가요? ˝(몽골)유목제국에 의해 구대륙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시각에서 이후의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고 하셨는데 <몽골제국의 후예들>이야말로 포스트 몽골 시대의 여러 국가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고 또 하나의 (몽골 혹은 포스트 몽골) 세계를 이루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는 책 아닌가요?  

요컨대 <몽골제국의 후예들>은 몽골 제국이 세계사를 탄생시켰다는 김호동 교수의 시각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완/완성시켜 주고 있습니다. 

4. 실제 중앙유라시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몽골제국의 후예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권용철의 역사책 소개 4편 - 몽골제국의 후예들https://www.youtube.com/watch?v=8_H7qUq4hXc&t=12s&ab_channel=%EA%B6%8C%EC%9A%A9%EC%B2%A0 
arşiv-i sema https://hanuur.tistory.com/87 

중소연구 44권2호 [서평] 몽골제국의 후예들 : 티무르제국부터 러시아까지, 몽골제국 이후의 중앙유라시아사 / 정세진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645564940 이 서평에서 정세진 교수는 <몽골제국의 후예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학문적 관심을 해갈해주는 학문 활동의 필수품˝인 동시에 ˝몽골의 후계 국가의 역사적 유산에 대한 내용을 정밀하게 다루는 책˝이라고 평합니다.  

역사비평(2020년 가을호) - 몽골제국 이후 중앙유라시아 세계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몽골제국의 후예들』(이주엽, 책과함께, 2020) / 최소영 

2020-09-17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지적 감사합니다. 제시한 공부거리들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가나다 2020-09-18 0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들님 제 글을 다 읽어 주시고 또 참고해 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들님이 몽골 제국사 전공자라고 생각하고 제 견해를 길게 적어 보았습니다.)
 
의학의 철학 - 질병의 과학과 인문학
최종덕 지음 / CIR(씨아이알)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또 비가 쏟아진다. 덕분에 최종덕 교수의 ≪의학의 철학≫(2020)을 진득하게 붙들고 앉아 읽었다. 참고문헌과 색인을 훑고 마지막 장을 덮자 이 책의 특장이 진화의학과 면역의학의 철학, 그리고 노화의학에 대한 서술에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들은 '정상과 병리'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통해 인간의 진면목을 들여다보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질병이 생명의 필요조건이 아니라 불안전과 결함이 생명 자체의 부분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일은 의철학의 가장 큰 과제라는 것이다.

선생의 오랜 연구 결과가 ≪생물철학≫(2014)과 이 책에 모여 있는 듯해 감사한 마음과 격려의 말씀 전하고 싶다. 토버(Alfred Tauber)의 ≪The Immune Self≫에 대한 선생의 리뷰 <면역학적 자아>를 대한 이래, 그동안 홈피를 드나들며 참 많이 배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부학자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부학 책 《그레이 아나토미》의 비밀
빌 헤이스 지음, 양병찬 옮김 / 알마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감사하게도, 자리에 들어 마음을 모으면 몸짓이 일어난다. 내 안의 주인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이다. 오래전 지인의 도움으로 몸이 열리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짓이 일어나면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 오열이 터져 나왔더랬다. 처음으로 내 안의 주인을 만난, 놀랍고도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도와준 그이를 나는 지금도 멀리에서나마 사숙하고 있다. 당시 일어난 몸짓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 손에 잡은 책이 어리석게도 생리학과 해부학 개론서였다.

몸짓, 산스크리트어 무드라(Mudra)는 결인(結印), 혹은 수인(手印)을 뜻하는데 삼국유사에서는 소리 나는 대로 문두루(文豆婁)라고 옮기고 있다. 겉 드러난 내가 내 안의 주인을 만나고자 할 때 이를 통해 서로 얘기 나눌 수 있지만, 인간의 인지능력은 너무나도 미약해 이를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명상은 인간의 존재가치를 실천, 구현하고자 하는 행위이기에, 수행이 깊어지면 궁극엔 하나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몸이라는 미시세계를 들여다볼 때 우리 자아는 겉 드러난 자아와 심층자아, 근원자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아를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의식은 각기 여기에 대응하는 표상의식, 심층(매개)의식, 근원의식이 되겠다. 절집에서 이야기 하는 供養의 의미와 見性에 이르는 단계를 묘사한 十牛圖를 떠올리면 쉬 이해되리라 여겨진다.

2. 어리석은 나는 오늘도 몸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 책을 뒤적인다. 서양근대의학은 임상에서의 사례를 바탕으로 해부학과 병리학을 구축하였고, 그를 토대로 생리학을 발전시켜왔다.

저자 빌 헤이스는 《그레이 아나토미≫를 둘러싼 불가사의한 두 명의 헨리를 중심으로 미스터리를 풀어나간다. 동시에 저자는 ‘해부학’이라는 산을 만나고 그것을 넘기 위해 캘리포니아 대학 샌프란시스코 캠퍼스에서 해부학 실습 강좌를 네 학기나 청강하며 두 해부학자의 미스터리에 다가간다. 하여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그레이 아나토미≫라는 ‘해부학 책’과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해부학도의 수련 과정’을 넘나들며 진행된다.

저자는 160여 년 전에 살았던 《그레이 아나토미》의 저자 헨리 그레이와 삽화가인 헨리 반다이크 카터 두 사람의 비범한 삶과 천재성을 드러내면서 인간의 몸을 바라보는 경이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어둠 속에 잠긴 그레이의 삶을 카터가 남긴 기록을 통해 되살려내고 있다.

3. 해부학자들은 ‘인체에 대한 총체적 시각’을 강조한다. 총체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완벽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해부학에 대한 이해의 상당 부분은 여러 신체 부위들을 동시에 다룸으로써 형성되고, 한꺼번에 다루는 신체 부위의 수가 줄어들면 이해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인체가 작동하는 과정에 눈을 뜨면, 인체가 오작동하는 과정-즉 당신의 몸이 당신을 배반하는 과정-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새삼 말하지만 시신을 이용한 맨눈해부학에서 배우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삶과 인생이다. 삶의 본질은 운동에 있다. 그렇다면 운동이란 무엇일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는 마지막 해부학 시간에 무릎, 어깨, 팔꿈치 관절을 해부하며 인간의 운동 메커니즘을 빠삭하게 알게 되었다. 눈을 깜박이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든, 팔과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폐를 들썩이든 운동이란 뭔가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다. pp.359-3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조 평전
박현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다산 정약용의 전기를 살피다 보니 어느새 정조와 그의 시대로 관심이 번진다. 몇 종류 나와 있는 다산에 대한 전기물들은 후손 정규영이 작성한 사암선생연보를 중심으로 쓰여져 대동소이한 것 같다.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박석무의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는 발로 쓴 책이다. 방대한 다산의 사상과 저술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바이오그래피가 아쉽다. '다산학'으로 들어서는 입구가 아직은 허술한 듯하다. 어쩌겠는가, 한형조(1996). 백민정(2007), 금장태(2012) 등의 저작과 실시학사에서 펴내고 있는 실학총서를 함께 읽을 수밖엔.

2. 우리나라에서도 '18세기 학회'가 구성되어 활동 중인데, 세계사에서 18세기는 전통적 가치와의 충돌, 도시문화의 발달, 열정과 자아의 중시, 여행문화가 발달하는 현상 등에서 인류사적 동질성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영·정조 시대는 이러한 사정과 맞물려 관심이 쏠리고 있는 듯하다. 한국 18세기 학회가 개최한 세 차례 좌담회의 기록, 《위대한 백년 18세기》가 그 한 예다. 계몽주의를 넘어서 18세기는 우리가 근대성이라고 말하는 것, 시장이나 상품성, 근대적 주체, 산업주의, 감시체제, 자본주의 등의 원형적인 면모가 나타난 시대인 바, 오늘날 탈근대론자들이 비판하는 근대성 자체의 왜곡을 연구할 수 있는 계기를 18세기 문화나 역사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3. 이와 관련해 유럽의 의미는 무엇인지, 근대란 어떤 뜻으로 사용되는 말인지, 그리고 근대 유럽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기본적인 문제들을 들여다 볼려면 개설서인 《근대유럽의 형성》을 읽으면 좋겠다. 이 책과 함께 근대성의 기원 또한 유럽에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학파의 일원인 잭 골드스톤의 ≪왜 유럽인가 – 세계의 중심이 된 근대 유럽1500~1850≫을 동시에 읽었다. 그는 강대국 유럽의 등장은 어떤 점에서든 세계의 다른 지역 혹은 문명에 대해 가진 우월성 때문에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4. 시선을 동쪽으로 돌려보자. 최근 ‘중앙유라시아’ 연구에서 대두한 가장 주요한 논점은, 이 지역 내부에 존재하던 초원 유목민과 오아시스 정주민들의 상호관계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며,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은 한문과 같은 외국어 사료가 아니라 현지인들이 남긴 현지어 사료를 중심으로 연구가 수행돼야 한다는 점에 대한 자각이다. 미국의 중국학계를 중심으로 대두한 이른바 ‘신청사(New Ching History)’ 연구가 바로 이런 연구 경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피터 퍼듀의 ≪중국의 서진(China Marches West)≫은 신청사 연구를 대표하는 저작이자, 중국 변경사 연구의 걸작이다. 이 책은 중앙유라시아 지역이 15세기부터 18세기 청조에 정복되기까지의 과정을 꼼꼼하게 추적한다. 그의 분석은 중앙유라시아 지역이 유라시아 대륙의 교차로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하는 세계사적 관점에 의해 지지된다. 만주족 왕조인 청조는 그 왕조가 가진 유목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군사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으며, 18세기의 인구 증가와 자원 부족 등을 타개하기 위해 ‘(군사)식민주의’의 성격을 아울러 가지게 됐다고 주장한다. 바꿔 말하면 18세기 청의 중앙유라시아 정복은 17~18세기의 세계사적 사건과 궤를 같이하면서 청조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이 ‘만청 식민주의(Manchu Colonialism)’는 18세기의 세계사적 동시대성을 일깨운다. (윤해동)

5. 조선의 사신과 사절단이 북경에 사행한 후 기록을 남긴 연행록 관련 연구논저가 엄청나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조 500년간에 사절단의 명 청조 방문이 1000여 회를 넘고 이들이 남긴 기록 중 저자가 확인된 연행록만 해도 400여 종에 이르기 때문이다. 근래 《연행록 전집》과 같은 기본적인 자료가 정리 출판되고 분야별 연구총서도 간행되었으며, 이제 연행록 자료 집성의 남은 과제로 500여 종 이상의 연행록을 대상으로 定本을 확정 출판하는 것과 原文의 텍스트 입력, 그리고 번역과 주석을 한 역주 정본 연행록전집 출판을 꼽고 있다.(임기중)

연행록을 통하여 壬辰戰爭 이후 확산된 再造之恩에서 비롯하여 小中華, 조선중화주의, 北學, 脫中華로 발전 하는 조선지식인의 중국관을 엿볼 수 있다. 명 청대를 통 한 광범한 자료인 燕行錄은 특히 청대 17세기로부터 18세기 말까지의 중국에 관한 다양한 면모, 만주족 지배하의 한인 지식층의 존재형태, 구체적 생활상을 포함하는 사회상, 지배층에 대한 의식 대처능력 등 생동감 넘치는 역사자료로 주목되고 있다.(최소자)

오늘 살펴보고 있는 주제와 관련하여 정재훈 교수의 <정조와 연행록>이 눈길을 끈다. 연행은 기본적으로 사신행차의 일부로서 국가 간의 외교 교류가 기본이 되는 행사였다. 여기에는 당시 최고의 정치적 주권자였던 국왕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개별의 연행록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접하고 실제로 판단을 하였던 주체가 바로 연행의 또 다른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국왕들이었다. 구체적으로 18세기를 살았던 숙종과 영조, 정조가 그들이었다.

정 교수는 연행의 당사자 가운데 하나였던 조선의 국왕이 연행을 어떻게 대하였는가는 이제까지의 연구에서 소홀하였던 부분이라고 지적하며 연행에서 가장 변화가 극심하였던 18세기, 특히 후반의 경우 정조는 연행에 매우 민감하게 관심을 표하고 이를 통해 얻을 정보를 국정에 직접 활용하기도 하였음을 살피고 있다.

연행에서 획득한 정보가 ‘개인의 깨달음’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정보의 획득과정을 거쳐 국정에서 활용되는 정보로서 기능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정조는 그의 정치운영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던 화성의 건설에서, 또 창덕궁의 품계석의 설치에서, 또 군사의 모범을 삼으려는 관심에서 청으로의 연행에 당대 최고의 화원인 김홍도와 이명기를 파견하였다. 18세기의 연행은 조선을 새롭게 만들려던 정조에게도 매우 소중한 창구였다는 것이다.

6. 이렇게 유럽과 중앙유라시아 역사 및 청조와의 교류를 주시하며 정조와 그의 시대를 들여다보면 좀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정조와 정조시대》 또한 그렇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모은 이 책은 정조와 그의 시대를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하나의 지표를 설정하고자 '정조시대의 자아인식'에 주목하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을, 후반부에서는 정조와 조선의 이해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성격의 책으로는 출간된 지 좀 오래 되었지만, 숙종대에서 영정조대에 걸치는 125년간을 이른바 '진경시대'로 보고 당대의 사상과 문화, 그리고 예술과 예술가들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우리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1, 2》가 있다. 예전에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박현모 교수의 ≪정조평전≫은 기왕의 연구를 결산하고 있는 듯하다. 근래 정조에 대한 단행본들이 다양하게 나왔다. 정약용, 박제가, 박지원 등을 등용해 18세기 조선의 문예 부흥을 가능케 한, 탁월한 학문 능력을 갖춘 지도자로서 ‘군사(君師)’의 정치를 이끈 군주 정조를 묘사한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정옥자 외), ≪정조의 수상록 일득록 연구≫(정옥자), 정치적으로 소외된 당파였던 남인에서 인재를 발탁해 중용하는 지도자, 즉 탕평군주로서 정조를 묘사한 ≪영조와 정조의 나라≫(박광용), 학자 군주로서의 정조의 면목에 주목한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김문식), 정치적 다수파인 노론의 견제를 받으며 왕위에 올라 규장각과 장용영이라는 문무의 지지 세력을 키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주도면밀한 지도자의 모습에 주목한 ≪장용영: 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 군대≫(김준혁) 등이 그러한 책들이다. 이러한 정조에 대한 긍정적인 서술들과는 달리 박 교수의 연구는 정조의 재위 기간에 추진된 개혁 정책의 성취를 거론하면서도, 정조의 사망 이후 전개된 세도정치에 대해 정치가 정조의 책임을 묻는 부정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저자의 주장은 정조 시대에 이루어진 국왕으로의 권력 집중, ‘고가대족(古家大族)’을 중심으로 전개된 정치 운영방식이 국왕의 사망 이후, 공론정치의 부재와 견제장치의 부재 속에서 세도정치와 쇄국정치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송재혁)

백승종 선생의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은 연구노트를 책으로 펴낸 것인데 블로그에 연재될 때 가끔 들여다봤지만 다시 읽어보니 더욱 새로웠다. 사료를 읽어나가며 연구계획을 밝히고 있는 부분들이 특히 그렇다. 저술에서 이토록 상세하게 연구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예는 드물다.

저자는 근대역사학이 요구하는 역사적 사실관계보다는 예언이라는 사회적 상상력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정조와 강이천을 둘러싸고 펼쳐진 일련의 사건에 대해 새로운 역사적 해석을 가하고 있다. 저자의 시선에 포착된 강이천 사건은 주류문화인 성리학과 천주교 및 정감록 등의 소 문화 집단 간의 대립을 상징하는 것으로, 심각한 '문화투쟁'이 전개되었음을 밝힌다. 거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서사의 부활이다. 한 편의 논문을 쓰면서 작성한 연구노트가 책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 폭과 깊이만큼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풍부해질 수밖에 없다.

7. 이 시대를 얘기하면서 연암을 빼놓을 순 없다. 그의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 박지원의 행장을 각고의 노력으로 기록한 ≪나의 아버지 박지원 (과정록)≫이 있다. 이 책은 한 인간의 전기를 넘어, 그를 둘러싼 동 시대 인물들과의 교류에 대한 기록들은 당대의 사회사를 보여준다. 진작에 강명관 교수는 연암 문학의 연원을 좆다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공작관고》에 주목하여, 청의 문인 김성탄과 원굉도의 혁명적 문학비평을 거론한 바 있다. 김혈조 교수가 새로 번역한 열하일기와 연암집을 독서목록 일 순위에 올려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