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프리마투르
리타 모날디.프란체스코 소르티 지음, 최애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이탈리아와 중남미 문학이 꽂혀 있는 서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임프리마투르'라는 낯선 단어와 상당한 두께의 책이 호기심을 발동시켰고 대충 훑어 보니 역사 추리 소설일 것 같았다. 흥미가 일었지만 겉모양만 그럴싸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잠깐 망설였으나(저자들이 전혀 낯선 이름이란 것도 그런 생각에 한 몫을 했다) '재미 없음 읽다 말지' 하는 생각에 들고 집으로 왔다.

하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니 생각 외로 재미있었다. 아마 17세기 로마라는, 시공간적 배경이 맘에 들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 상당항 분량(800페이지가 넘는다)의 책을 비교적 빨리 읽어 치웠다.

책은 이른바 '액자 소설'이다. 책이 시작되는 시점은 2040년, 인노켄티우스11세 오데스칼키 교황의 시성 문제를 위해 조사하던 델라조 추기경이 자신의 손에 들어온 한 권의 책을 타나리 추기경이란 인물에게 보낸다. 그리고 그 책이 인쇄될 수 있는지(임프리마투르)를 묻고, 그 동봉하는 책의 내용이 이 소설의 거의 전체를 차지한다. 그 이후는 다시 델라조 추기경이 문제의 책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는 과정의 문서와 증거들이 차지하고 있다.

중심을 이루는 책-로마의 돈젤로 여관의 사환이 1683년 9월 11일부터 25일까지 일어난 사건들을 쓴 회고록-의 내용은 표면상 돈젤로 여관에서 일어난 하나의 죽음의 원인을 찾는 과정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사실상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 죽음이 페스트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되어 여관에 같히게 된 투숙객들은 나름대로의 비밀들을 간직한 인물들이다. 어리고 순진한 사환인 화자는 다른사람들이 협잡꾼이자 첩자라고 불신의 눈길을 보내는 카스트라토 사제, 아토 멜라니와 한 조가 되어 사건을 조사한다. 배경이 되는 때는 역사적으로 오스만 투르크에 의한 빈의 포위 공격이 막바지에 이른 때이고 페스트 창궐에 대한 공포가-이미 중세를 지났음에도-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시대이다. 사환의 조사는 투숙객들의 과거와 그들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의 술회로 인해 전 유럽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것으로 확장되고, 알려진 역사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밀들이 드러나게 된다.

공식적으로 여관 안에 갇혀 있는 주인공들은 여관에서 외부로 연결되는 지하 통로를 통하여 조사를 진행시킨다. 로마가 몇 개의 층위를 가진 도시라는 사실은 이런 상황을 매우 흥미롭게 만든다. 과거의 폐허 위에 세워진 도시, 그래서 이 도시의 지하는 발굴되지 않은 보물과 유적들, 하수구와 무덤들이 뒤얽혀 있는 또 하나의 세계이며 이곳을 탐험하기 위해 주인공들은 도굴꾼들의 힘을 빌린다. 이 지하 탐험의 모험은 이 시대의 유사 과학적 이론들, 연금술, 점성술 등과 함께 다소 건조해질 수 있는 스토리를 흥미롭게 만들어준다.

결국 권력과 관계 없는 사환과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난 카스트라토가 찾아낸 진실들은 권력의 속성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줄 뿐이다. 그들은 권력과 돈, 그 두가지를 위해서라면 신념 따위는 문제 삼지 않고 손을 잡을 뿐 아니라 기만과 배신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재미있게도 저자들은 책 말미에 붙인 델라조 추기경의 글을 통해 자신들의 소설에 대한 평을 한다. 주인공들이 셜록 홈즈와 왓슨을 닮았다거나 밀폐된 공간은 아가사 크리스티를 연상케 한다거나, 순진한 사환이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성장소설이 아닌가 하는 것 등등 말이다. 이 성장 소설적 성격은 아마도 이 책의 흥미로운 면모 중 하나인데 내게 그것은 아토 사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특히 그러했다.

사환의 아토 멜라니에 대한 감정은 의혹이 섞인 경탄과 존경에서 실망과 환멸을 거쳐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연민이 섞인 그리움으로 변한다.  순수한 젊은 시절엔 쉽게 열광하는 만큼이나 상대의 약점에 대해 실망하고 비난하기 쉽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그런 약점들은 인간에게 어쩔 수 없이 따라오게 마련이란 것을 깨달으면서 동병상련과도 같은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세상과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서 잡보 기자가 되기를 꿈꿨던 난쟁이 소년은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에 환멸을 느껴 시골에서 흙에 묻혀 사는 삶으로 도피한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끝까지 외면할 수는 없어서 회고록을 남기는 것이다.

사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언제나 충격적 사건 속에서 사는 우리들에겐 이 모든 진실이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인간들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냉소해 버리면 그만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결말이 씁쓸함을 남기는 것은 세상이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는 특이하게도 사운드트랙이 들어 있다. 음악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한 번 들어보고 싶었지만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그럴 순 없었다. 다만, 상황에 걸맞는 노래를 척척 찾아내어 부르는 멜라니 사제는 비슷한 버릇을 가진 나의 지인을 연상시켜서 웃음이 나왔다. 아마 그런 재주를 타고 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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