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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포스트, 1663 1 - 네 개의 우상
이언 피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스스로 구해 읽는 책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쥐어 주는 책들도 있다. 이 책은 후자의 경우였다. 따라서 나는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내용은 사실 간단하다. 왕정 복고 시대의 옥스퍼드에서 교수이자 성직자인 그로브 박사가 죽는다. 독살인 이 사건의 범인을 두고 펼쳐지는 미스테리라고 할 수 있는데, 특이한 점은 한 사건을 기술하는 네 명의 증인이 모두 다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인간의 두뇌는 정교하지만 또한 믿을 수 없는 재생 장치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든 자극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취사선택을 한다. 두 사람이 긴 대화를 나누고 나서 그 상황과 대화에 대해 질문을 하면 크건 작건 두 사람의 대답은 다르게 나올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사실을 받아 들임과 동시에 그 사건에 대해 종합하고 평가하여 정리한다. 이때 기준이 되는 것은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경험과 견해, 또는 편견이 될 것이다.
어찌 보면 너무 간단한 이 이야기가 긴장감을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우리는 사건의 새로운 지평을 보게 되고, 같은 사건과 인물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기준과 편견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심리적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건에 대한 서술이 네 번이나 반복되는 만큼, 뒤로 갈수록 흥미가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건의 전모가 너무 우발적이며 단순한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살인 사건만 다뤄지는 것은 아니며 그 당시 영국의 혼란스런 정치 상황과 음모, 옥스퍼드라는 작은 사회 내의 학자들 간의 반목과 갈등, 카톨릭과 국교회의 갈등 등이 중요한 내용을 차지하지만 그 역시 반복되기 때문이다.
단지 개인적으로 첫 장을 차지하는 '마르코 다 콜라의 증언'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 사건을 서술한 내용 때문이 아니라 베네치아인이 영국에 와서 경험하는 문화적 충격을 적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옥스퍼드의 의사인 로어와 다 콜라가 음식점에서 나누는 대화이다.
"돼지머리를 어떻게 요리하는데?"
나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기 때문에 열띤 목소리로 물었다. 아침부터 일이 터지는 바람에 먹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제 사과와 음료를 곁들이고 어쩌면 새우도 몇 마리 곁들인 돼지머리를 상상하자 벌써부터 군침이 돌았다.
"그야 물론 삶는 거지. 식초물에 넣고 푹 끓이는 거야. 그거 말고 다른 요리법도 있나?"
어쩔 수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게 만드는 이런 대목들이 꽤 있다. 미식가인 이탈리아인이 음식 맛없기로 유명한 영국에 건너가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