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8
율리 체 지음, 이재금.이준서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평행 우주라는 아이디어에는 사람을 흥분시키는 뭔가가 있다. 그것은 사실상 우리의 우유부단함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강요받는다. 심지어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하는 간단한 문제조차도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 때가 종종 있다.

평행 우주는 그러한 딜레마로부터 우리를 구원한다. 나는 지금 여기서 자장면을 먹지만 어딘가 다른 세상에서는 짬뽕을 먹는 나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우리를 일종의 우유부단한 이중적 상황에 위치시킨다.

원제는 그냥 간단히 실프인 이 소설은 물리학 이론과 기묘한 삼각 관계, 그리고 살인 사건을 엮어 독특한 추리 소설로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살인의 전개 과정과 범인을 모두 알고 있지만 사건의 진상을 깨닫는 것은 거의 소설의 끝에 이르러서이다.

학창 시절부터 죽마고우인 두 물리학자 제바스티안과 오스카의 우정은 제바스티안의 결혼과 함께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제바스티안이 아들을 캠프에 데려다주는 도중 아들이 납치당하고 제바스티안은 아내의 사이클 동료인 의사 다벨링을 제거하라는 전화를 받는다. 아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다벨링을 살해하지만 아들은 캠프에 무사히 도착했으며 납치당한 일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바스티안은 이 사실에 큰 혼란을 느낀다. 그리고 독자 역시 혼란스럽다. 과연 이 납치 사건은 다른 우주에서 일어났던 것인가?

동성 친구들간의 우정은 그 중 한 사람이 결혼하게 되면서 작든 크든 변화-또는 더욱 정확하게 위기-를 맞게 마련이다. 결혼한 친구는 더 이상 자신의 친구에게만 시간을 쓸 수는 없게 된다. 때로 그러한 상황은 친구를 무척 섭섭하게 할 수도 있다. 오스카의 경우는 제바스티안이 유일한 친구인 관계로 그러한 섭섭함, 나아가 배신감이 더욱 크다. 제바스티안의 평행 우주 이론 옹호가 그에게 특히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는 결국 아내와 아이를 택했으면서도 자신이 결혼하지 않은 또 다른 우주가 있다는 생각으로 어정쩡하게 오스카와의 우정을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오스카에게 그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이중사고(doublethink)에 불과하다. 세계를 보는 두 사람의 다른 시선, 그리고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을 되돌리려는 노력은 결국 두 사람 모두에게 비극을 불러 온다.

형사가 등장하고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에 추리소설일 것 같지만 결코 추리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호흡이 느린 문장은 흥미진진하게 빨리 읽히지도 않는다. 하지만 천천히 읽으면서 우리 삶의 문제들을 생각해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나의 선택들이 지금까지의 나를 만들어 온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있는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게 되었을까,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리고 인생의 우연이란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평행 우주를 옹호하는 것은 제바스티안이지만 소설을 읽고 나면 사실 다른 우주를 더욱 강력히 원했던 것은 오스카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는 자신의 개입으로 불확정적인 두 우주 중 자신이 원하는 쪽을 선택하려 하지만 결국은 두 세계를 모두 파괴하고 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