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르헤스를 어떻게 처음 알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들이 내게 준 영향은 지대하고, 처음 읽은 이후 몇 년이 지나고 읽어도 이 이야기들은 그 신선함을 잃지 않는다. <알렙>은 <픽션들>과 더불어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되는 작품집이다. 게다가 쉽게 읽힌다는 것도 또 하나의 장점이다. 이게 쉽게 읽힌다고?- 이렇게 반문할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나 <픽션들>은 먼저 읽은 독자의 입장에선 그렇게 말 할 수밖에 없다. <픽션들>의 상당 부분이 문학 이론의 소설화라는 실험적 시도에 할애되었던 반면, 이 책에선 존재, 시간, 영원성, 우주, 이런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한 가능한 해답들을 시도한다. 어쩌면 보르헤스가 여기서 펼쳐 보이는 세계관은 우리에게 낯익은 것들인지도 모른다. 동양적인 순환의 인식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분이다. 순환하는 시간과 미로적인 공간의 세계, 이것이 내가 이해한 보르헤스의 세계이다. 이러한 모호성이 시작부터 내재되어 있는 것이 세계이므로 그에 대해 완전한 인식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표제작'알렙'에서 주인공이 본 '알렙'은 세계 그 자체이지만 그것이 그에게 완전한 앎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주인공은 그 명징하면서도 혼란스러운 것을 '가짜'라고 치부해버림으로서 모든 것을 알아버린 자의 허무함(더 이상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없을 터이므로)을 덮어버린다. 그런 것이 세계의 본질이라면 운명의 모호함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허무함 역시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