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서술에 있어서 '사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은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역사란 그저 '일어난 사건들'을 충실히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 때도 있었으니... 하지만 그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 자체, 한 시대에 일어난 수많은 일들 중 어느 것을 쓸 것인가 하는 취사 선택의 문제에서부터 역사가의 시점이 개입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역사를 쓴다는 것은 하나의 입장을 밝히는 일이 될 것이다.그런 면에서 십자군 전쟁의 역사라는 것은 현재 주도권을 지니고 있는 유럽 측의 시각에서 서술된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세계사 시간에도 '성지 탈환'을 위한 원정 전쟁 정도로 배웠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전쟁의 다른 쪽 당사자들의 눈으로 볼 때면 양상은 전혀 달라진다. 그것은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 대한 야만인들의 침략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제목에서 나타나듯이 저자 아민 말루프는 이 책에서 아랍 쪽 증인들의 역사서와 연대기들을 통해 이 전쟁의 면모를 펼쳐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맹목적인 신앙심과 속죄의 유혹에 이끌린 무리들, 그리고 새로운 땅에 대한 욕심을 가진 군주들, 동방으로의 무역로를 장악하려는 상인들의 욕망이 부추긴 야만적인 침략 전쟁을 목도하게 된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또는 알려지지 않은 아랍의 영웅들이 등장하며 서로간의 경쟁에 여념이 없던 군소 군주들간의 다툼이 끼여든다. 저자는 이 시대에 중동이 겪어야 했던 치욕의 역사를 침략자들에게서만 찾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이, 아랍의 군주들 자신의 무능력과 이전투구에서 그 오욕의 원인을 찾고 있다. 결국 수세기에 걸친 투쟁 끝에 아랍은 서구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지만 양 대륙에서 그 결과는 사뭇 다르게 나타났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는다. 유럽을 능가하는 문명을 가졌던 동방은 이후 유럽에게 추월당하기에 이르며 그 격차는 오늘날에도 좁아지지 않고 있다. 후기에서 저자는 그 원인을 프랑크인들은 적이었던 아랍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데 게으르지 않았던 반면 아랍인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것에 안주하고 말았다는 데서 찾고 있다. 거기에 안정되지 못한 정치 상황이 한 몫을 했다는 사실도 곁들인다.대개 전쟁의 시기를 다룬 역사서는 흥미롭게 마련이며 이 책도 예외가 아니다. 거기에 천 년 전 세계의 문화와 사상을 들여다보는 즐거움도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중동의 역사>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를 읽은 것이 사건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