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서 만큼은 아니어도 북유럽-게르만 신화 또한 서구 정신세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은 북유럽 신화를 다룬 전반부와 영웅들의 전설을 다룬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다. 고대부터 문명화된 지역에서 발생한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세련된 맛은 덜하지만 이 지역의 신화도 나름의 매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 등장하는 신들은 전능하지도 않고 불멸의 존재도 아니라는 점에서 신이라기 보다는 초인에 가까운 존재로 보이며 그만큼 인간과 닮은, 친근한 모습을 보여 준다. 선악 개념 또한 매우 유동적이다. 최고신 오딘마저 때로는 매우 교활하고도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을 보이며 많은 신들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존재로서 나타난다.영웅들의 전설에서는 니벨룽엔의 노래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베른의 디트리히 등 다른 영웅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크프리트라는 영웅과 그의 보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음모와 배신, 피비린내나는 복수의 이야기인 니벨룽엔의 노래는 특히 <반지의 제왕>의 독자들에게는 그 유명한 소설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한편, 아시아에서 일어나 중부 유럽까지 위협했던 훈족의 왕 아틸라가 이 전설에서는 광폭한 야만인으로서가 아니라 온화한 군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베른의 디트리히 전설은 민족 대이동 시기에 활약한 프랑크족 왕들을 모델로 한 전설이라고 알려지는데 이 중세 태동기의 혼란한 유럽을 배경으로 한 전설은 역사적 사실들과의 중첩으로 인해서 흥미로웠다. 저자의 후기에서 그런 사실들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유럽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부연 설명이 좀 더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