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이 카사레스의 소설은 단편집 <러시아 인형>이후 두번째인데 역시 이 작품에서도 일상성을 교묘하게 뒤집는 독특한 환상의 세계는 여전했다. 무인도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일단의 사람들이라는 설정 때문에 초반 내게 이 소설은 TV시리즈 ‘로스트’를 연상케 했다. 도피를 위해 무인도를 선택한 일인칭 서술자인 ‘나’는 이 사람들의 등장에 당황하고 두려워하지만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 이 사람들 중 하나인 ‘석양을 바라보는 여자’ 포스틴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 이상한 사람들이 갑자기 어디서 떨어진 것일까를 궁금해 할 즈음 소설은 매우 놀라운 반전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우리 앞에 놓여지는 이 ‘모렐의 발명’은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덧없이 지나가는 그 모든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보고자 만들어냈던 기술들의 최종판과 같은 것이다. 지금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사진, 녹음, 녹화 등의 기술이 기반하고 있는 인간의 욕망은 바로 이 ‘덧없음의 고정’이 아닌가.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 수밖에 없는 우리는 살면서 경험하는 좋은 것, 즐거운 순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영원히 옆에 두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린다. 그래서 인간은 초상화를 그리고 사진 기술을 발명했고 아름다운 소리를 무한 반복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으며 움직임을 영상으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기술의 궁극에는 무엇이 올까? 아마도 모든 면에서 실제와 똑같은 또 하나의 실제를 재생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영원히 회귀하는 시간 속에서 무한히 계속되는 현재를 사는 실제. 무한하지만 단조로운 영생. 이 무한반복의 삶이라는 개념은 우리 인생에 대한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 행로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시점의 과거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 또는 젊음을 찬양하고 노화를 질병으로 여기는 이 시대가 원하듯이 영원히 젊은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또 하나의 실제를 이용해 우리 최고의 순간에 무한히 머물러있게 된다면 과연 영원히 행복할 것인가? 더 나아가 ‘연출된 행복’ 속에 머물러 있으려고만 한다면 그것을 과연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렇게 직선으로 뻗은 시간이라는 개념이 무너진 상황에서 시간의 선후관계라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 것인가? 가상 현실이 더 이상 꿈이 아닌 지금에 와서 이런 질문들은 더욱 현실성 있게 다가온다. 실제와 실제 아닌 것은 더욱 빈번히 상호 침투하고 영향을 주며 그 둘 간의 차이는 자주 사라진다. 영혼마저 ‘재생’될 수 있는 이 발명품 앞에서 둘 간의 차이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사랑의 대상과의 어찌할 수 없는 간극을 뛰어넘기 위해 실제를 포기하는 ‘나’의 선택은 그리하여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무심하게 시작하는 듯 보이는 소설은 처음부터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복선을 치밀하게 깔아 놓아 어느 한 줄도 대충 보아 넘길 수 없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를 뒤적거리게 만든다. 이 작품에 부쳐진 찬사들을 이해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