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특별법의 공정한 집행과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작가들의 팽목항 답사 르포> 2015123~24

 

대한민국의 달력은 364일이다

 

 

“2014415일 화요일 오후 9시경, 인천에서 제주도로 향하는 카페리 세월호는 승객 447명과 승무원 29, 476명을 태우고 인천항을 출발했다. 승객 중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과 교사 15명도 함께 탑승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펴낸 416 세월호 민변의 기록(생각의길, 2014)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난해 922일까지의 기록이다. 지금은 2015131. 지난 달력을 새본다. 4월은 15일이 지났고, 5월은 31일이, 6월은 30일이, 7월은 다시 31일이,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해가 바뀌었고, 1월은 31, 2월은 28, 3월은 다시 31, 그리고 4월은, 4월은, 4월은 올까. 우리가 4월을 어떻게 맞을까. 지난해의 달력은 260일이었다. 올해의 달력은 104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한해의 하루를 잃어버렸다. 대한민국의 달력은 364일이다. 2015416일은 과연 올까. 온다면 어떻게 올까. 아이들을 태우고 올까. 맹골수도 밑바닥에 가라앉은, 아니 우리가 가라앉힌 선체를 들어올리며 올까. 429일이 재보선일인데 선거 때문에 세월호는 묻히고 가라앉은 배는 스스로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가루가 되지는 않을까. 아직, 아직도 바닷속에 수장된 아홉의 몸은 돌아올까. 어떻게 해야 돌아올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품은 작가들이 세월호 특별법의 공정한 집행과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마음으로 지난 23일부터 12일 여정으로 팽목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기억하고 기록하다

 

안산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장이자 이번 작가들의 팽목항 방문을 기획한 이시백 소설가는 말했다.

지난 한 해는 세월호 참사로 인한 비탄과 분노의 시간이었습니다. 자유실천위원회에서는 그동안 추모 문예제와 집담회, 동조단식, 세월호 연장전, 4시간 16분 낭독회 등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특별법과 이후 조사 활동을 지켜보고 있지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겐 정부의 불성실한 대처와 세월의 망각 속으로 세월호 참사가 잊혀져 가는 것이야말로 죽음보다 더 깊은 절망일 것입니다. 지금 작가들이 할 일은 아직도 사랑하는 가족들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실종자들과 유족들의 슬픔을 나누고 그런 슬픈 일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입니다.”

이시백 소설가는 작가들에게 기억하고 기록하라라는 시대적 물음에 답하도록 격려하였다. 이어 정희성 시인은 그동안 팽목항 현장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해 마음에 늘 부담이 있었다. 같이 가려는 분들은 대부분 팽목항에 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차분하게 되돌아보자는 차원에서 조용히 다녀오려고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소설가 윤정모는 “416 당시 주변의 작가들과 연극인들이 일주일 동안 밥을 못 먹고 탈수증으로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선생은 416 참사는 그만큼 일상을 살 수 없는 충격과 상실이었고, 작가들은 이런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을 으로 먼저 받아내는 존재가 아닌가, 그것을 언어로 풀어내는 존재라고 하였다.

 

 

안산 분향소 참배와 유족들과의 만남

 

2015123일 금요일 오전 11, 작가들은 팽목으로 가기 전 안산에 있는 희생자들의 합동 분향소를 찾았다. 416으로부터 263일이 지난 이날도 476명을 태우고 인천항을 출발한 카페리 세월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망자는 304, 아직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 9명도 사망자가 되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과 교사 15명 중 생환자는 학생이 75, 교사는 단 3명이다. 합동 분향소에는 교복을 입은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같은 배를 탄 사람들과 국화꽃을 받고 있다. 그 향이 너무 짙어 어지러웠다. 밖으로 나오니 숨이 쉬어졌다. 꽃들이 사람을 질식시키는 현장, 그 꽃이 제대로 펴보지 못한 어린 영혼들이어서 울음도 막혔다.

 

참배를 마치고 유가족들과 만남의 자리가 있었다. 유가족들은 온전한 실종자 수습을 위한 세월호 인양 및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126일부터 20일간 안산에서 팽목까지 도보행진을 계획 중이라고 했다. 도보행진은 선박 인양과 실종자 수색에 힘을 실으려는 유가족들의 안간힘처럼 들렸다. 도보행진 전에 세월호 유족 모임을 사단법인으로 출범시킬 거라는 각오도 밝혔다. 이 또한 그간 정부의 거짓말에 당하기만 했던 유가족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내고 힘을 모으려는 의지라고 했다. 2학년 4반 고 김동혁 군의 어머니는 부모로서 그간 겪은 이야기를 하며 한번도 진도체육관에서 애들을 기다리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진도체육관은 팽목에서도 30~40분 거리에 있고 팽목에서 사고 지점까지는 1시간 반을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가까운 동거차도에서 유족들이 기다렸어야 했다. 그런데 지상파, 카메라는 동거차도에 들어갔는데 왜 유족들만은 그곳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게 하지 않았는지, 왜 유족들에게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지금도 그게 너무 화가 난다고 하였다. 어머님은 지금 416을 후회하듯 또 다시 후회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동안 특별법에 전념하느라 실종자 가족들은 외면 받았다고, 설령 그것이 아이들이 배에 없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 해도, 지금은 인양만이 유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유족들은 편지 하나 쓰는 것도 힘들다고 했다. 무엇이든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들에게 요구했다.

 

하나,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대책, 지혜, 방법을 알려 달라.

하나, 유가족은 국민과 떨어져서 투쟁하고 싶지 않다. 온국민이 피해자다. 이것은 대학살이다. 선체 인양은 아이들의 언니, 동생, 이웃의 생명을 보장하는, 보장하라는 요구여야 한다. 이것은 생명선언이다.

하나, 유가족의 30퍼센트가 외자녀 가족이다. 우리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제발 가족들을 바쁘게 해달라. ‘세월호로 사고를 쳐달라. 사람들이 세월호를 잊고 이대로 묻혀버리는 것이 가장 두렵다. 언론에서 세월호를 잊지 않도록 작가들이 도와 달라.

 

유족들은 부모의 보물인 새끼들을 가져갔으니 잘못 건드린 것이다, 부모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겠다고 했다. 11일 떡국 행사처럼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쓰겠다고도 했다. 유가족들이 원하는 건 진실인데 학교 당국과 이 정부는 밥과 쌀과 약만 준다고도 했다. 그리고 “2015년은 2학년이었던 아이들이 고3이다, 부모로서 이 아이들과 함께 졸업하고 싶다고 말하며 울음을 뱉었다.

안산을 출발해 진도에 있는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밤 8시였다. 각자의 짐을 풀고 작가들은 간담회에 참석했다. 간담회는 세월호 참사 이후 줄곧 안산에 있는 유족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보듬고 있는 소설가 박혜지의 보고와 작가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실종자를 기다리는 팽목항

 

숙소에서 보이는 바닷가를 보며 새벽을 기다렸다. 아침은 어디서 올까, 하늘과 바다는 어디서 만날까. 바다는 하늘을 안아줄까 하는데 바다와 땅의 경계에서 닭이 울었다. 새벽도 오기 전에 하늘을, 바다를 깨우고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닭 울음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닭은 새벽을 이렇게 깨우고 있었다. “호철아한 번이 안 되면 두 번, 두 번이 안 되면 세 번, 그렇게 새벽이 깰 때까지 닭은 운다. 새들은 자기 이름을 부르며 운다던데, 닭은 남의 이름 부르며 운다. 다시 들어봐도 분명 호철아하며 울었다. 팽목항에 가면 실종자들의 이름을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숙소를 나와 팽목항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팽목항까지는 50여 분이 걸렸다. 전날 유족분이 울분을 토했던 거리가 얼마나 먼 거리였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팽목항에는 유가족분들이 하는 가족식당이 있다. 유족분들은 45명이나 되는 우리의 아침을 손수 차려주었다. 가족식당 문에는 제발 우리 은화를 찾아주세요라는 호소문이 걸려 있었다. 호소문은 은화를 하늘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 성빈이의 엄마가 쓴 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슬픈 연대가 있을까? 하늘에서 기다리고 있는 딸에게 친구 은화를 찾아주고 싶다는 엄마의 호소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 적어야 하나. 팽목 분향소에서 2-9반 고 진윤희 양의 외삼촌이자 416 이후 지금까지 팽목항을 지키고 있는 팽목지기 김성훈 씨로부터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실종자를 찾게 되면 아이들에게는 번호가 매겨집니다. 82, 83번 희생자. 키가 알려지고, 얼굴 모양새, 나이가 알려지고, 입고 있던 옷이 알려지면 그것을 보고 부모님이 찾아옵니다. 다시 오열이 시작되면 번호였던 아이들이 이름을 찾게 됩니다. ……지금 아버님들은 거의 대부분 손을 떨고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증상이 심한 것이죠. 어머니들도 술과 담배를 아주 심하게 하십니다. ……부모님들은 지금 자신을 죽이고 계십니다. 어떤 분은 전재산을 털어서 물 쓰듯 쓰고 있죠. 그 이유는 빨리 돈을 쓰고 돈을 다 쓰는 날 이 생을 마치시겠다고. 팽목은 평소에는 상당히 평온해 보입니다. 하지만 밤이 되면 틀려지는 곳이죠. 화장실 뒤쪽에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 등대 앞에서 오열하는 어머니, 아버님들은 술을 마시거나 스마트폰을 잡고 있는데, 아이들 사진을 보거나 아니면 게임에 빠져 계십니다. 게임이라도 집중해야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지금 저를 포함해 세월호 가족들은 모두 환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신적인 문제 육체적인 문제 모두. 어머니들 중에는 장운동이 멈춘 분도 있습니다. 들어가는 게 있는데 나오는 게 없는 것이죠. 그래서 그 어머니는 병원에서 어떤 진단도 내리질 못합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니까요. 또 어떤 어머니는 비가 오는 밤이면 사지가 마비되고 숨을 못 쉽니다. 원인을 몰라요. ……왜 그런 증세가 보이냐면 그 아이가 비오는 밤에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416의 연장인 것이죠. 저는 아직도 포르말린 냄새와 통곡소리를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냄새도 통곡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오히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죠. 왜냐하면 그 통곡소리가 들려야 실종자들을 찾은 것인데 지현이를 마지막으로 그 통곡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지금 팽목은 슬픔만 가득한 곳입니다.”

 

김성훈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이 솟아서 다 받아 적기가 힘들었다. 분향소를 나오려는데 실종자의 가족인 아버님 한 분이 내게 리본을 한 움큼 내밀었다. 나는 참았던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은 멍한 눈빛으로 손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술 취한 내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등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얼마나 많은 슬픔이 슬픔 위에 얹어져야 진실이 그 모습을 드러낼지 긴 숨이 뻗어나왔다. 작가들은 등대 앞에서 희생된 영혼들을 위로하는 노래와 시를 읊었다. 이번 팽목항 방문을 계기로 세월호 참사를 기록하고 추모하는 행사를 하자는 묵시적인 눈빛을 교환했다.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이 먼 길을 장이 막히고 비만 오면 숨이 막히는 유족들이 떨리는 손과 발로 걸어서 걸어서 온다고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하루를 우리에게 되돌려주기 위하여 그들은 팽목항을 향해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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