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요괴 이야기 24 - 완결
스기우라 시호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이름에는 힘이 있다"

'얼음요괴 이야기' 전편에 흐르는 명제다. '이름'과 그 '이름'을 부름으로서 갖게 되는 힘이라니. 평소 주위 모든 사람과 사물의 이름을 특별한 자각 없이 마구 불러대는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얘기다.
그러나 작가 스기우리 시호는 말한다. 이름을 부름으로서 우리는 그 이름을 가진 대상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름에는 누군가를 보호하는 힘도, 파괴하는 힘도, 멀리 있는 자를 내 곁으로 불러들이는 힘도 깃들어 있다고.

주인공 '블러드'의 이름은 그를 창조한 사악한 요괴 카우젤이 붙여줬다. 이름 그대로 평생 남의 피를 온몸에 덮어쓰고 살아가라는 의도로. 그 저주대로 '블러드'는 파괴의 화신으로 살아간다. 아름답지만 감정 없는 얼굴을 한 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의식조차 없이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며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로..
그렇게 수백년을 살육자로 살다 결국 요괴를 물리치려는 사원의 노력으로 얼음동굴에 봉인된다. 그런 그 앞에 나타난 소년 '이슈카'. 심장병 때문에 죽어가던 이슈카는 홀로 조용히 죽을 요량으로 요괴인 블러드에게 가지만 블러드는 오히려 죽은 그를 되살려 영생을 부여해준다. 그리고 인간이지만 요괴처럼 특별한 힘을 지니게 된 이슈카와, 요괴이지만 인간의 맘을 가지게 된 블러드 둘이 함께 하는 길이 시작된다.

'블러드'라는 자기 이름과 그 이름의 저주로 인해 저질렀던 악행을 끔찍스러워하는 블러드에게 이슈카가 말한다. "'블러드'란 이름은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이름이야. 우리 심장을 뛰게 해주는 이름"이라고.. 이렇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은 블러드란 이름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니게 된다. 하나의 이름이 저주로 불릴 수도 있지만 이렇게 축복으로 바뀔 수도 있는 힘, 그건 물론 부르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부르느냐에 달린 것이다.

라푼젤의 부모는 자신들의 잘못으로 어린 아들을 요괴(빌트)에게 빼앗길 위험에 처하자, 아이의 '이름'을 절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발설하지 못하게 한다. 이름을 듣고 요괴가 찾아와 아이를 뺏어갈까봐.. 하지만 결국 요괴는 아이를 납치해 가지만, 인정을 베풀어 그 부모에게 기회를 준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이들의 공포의 대상인 어둠의 탑을 찾아와 아이의 '이름'을 외쳐 부른다면 아이를 다시 데리고 갈 수 있게 주문을 걸어둔 것. 그러나 결국 무정한 부모는 찾아오지 않고, 오히려 라푼젤이란 이름은 오직 요괴인 빌트에게만 의미 있는 이름이 되어 버린다.

또한 블러드의 창조자이지만, 인간과 동화된 블러드의 반대편에 서서 말 그대로 사악한 요괴의 대표격인 카우젤은 그 존재 자체가 암흑이며 저주로서, 이름 안에도 '독'이 들어 있어 누구든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해를 입을 수 있다. 그래서 그를 제압하려던 이슈카도 처음에는 두려워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그러나 이슈카는 안다. '어떤 마음으로 이름을 부르느냐에 따라 그 이름에 깃든 힘이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는 걸.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시 '꽃'에서도 그러지 않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고. 꽃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을 불렀기에 꽃이 되었다. 요괴가 아닐까 의심하는 마음으로 미움과 저주를 담아 부른다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내게로 와 요괴가 되리라. 
여기에서 '이름'을 그냥 모든 '말'로 대치할 수도 있다. 약간 황당한 내용이긴 하지만 '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의 주제도 결국 그거 아닌가. 내가 입으로 내뱉은 말 한마디가 내 주위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나쁜 말을 내뱉는 순간 주위 공기는 독으로 물들어 그 말을 한 내 몸조차 따끔거린다. 반대로 칭찬과 사랑이 담긴 말을 할 때는 공기조차 화사하고 포근해지고...
그 얘기를 스기우라는 '이름'에 대입해서 우리에게 다시 되풀이하고 있다.
수호천사를 불러내는 것도 요괴를 불러내는 것도 결국 너의 마음이고 너의 입이라고.

* 스기우라 시호의 새 작품이 잡지에 연재중이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기대된다.
* 이 책은 옛날에 '얼음요괴의 전설'이란 제목으로 10권 가량 나오다가 서울출판사에서 '얼음요괴 이야기'로 다시 나왔다. 덕분에 내가 갖고 있는 건 10권까지와 그 이후가 제목이 다르다. 슬프지만 다시 사긴 아깝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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