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198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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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질기게 참회를 행하도록 촉구하는 책

나는 시대의 위인들에 관한 책을 읽게 되면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싶은 열망에 사로 잡히곤한다. 또한 위인들의 말과 행동을 추종하는 버릇도 있다. 분명 어설픈 추종은 삶의 나락이 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지만, 나 스스로 추종할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열망이 아무리 강해도 말이다. 그 인물은 바로 전태일이다.

<전태일 평전>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고3 겨울방학 때였다. 그렇지만, 두고두고 내 곁을 떠나지 않은 책이 되고 말았다. 어떤 이들은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삼국지>지를 읽고 또 읽는다고 하지만 나는 대학생활의 나태함이나 사회에 대한 불만이 치솟을 때 <전태일 평전>을 펼쳤다. 처음 읽었을 때의 숙연함은 매번 <전태일 평전>을 펼쳤을 때마다 농도를 달리하여 찾아왔다. 그렇게 가까이 했것만 나는 언제나 전태일을 추종 할 수 없었다.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자신을 불사르며 외친 전태일의 분노는 의식과 육체가 합일된 것이었다. 반면 나는 언제나 머릿속으로만 맴도는 분노만으로 입만 나불거리는 몸둥아리일 뿐이었다.

얼마 전 경찰이 대우 자동차 노조원의 노조사무실 출입을 막고 무력 진압했던 사건이 있었다. 법원도 승인한 그러니까 법적으로 합법적인 노조사무실 출입을 경찰이 막은 것이다. 언론에서 대서특필된 기사를 본 후 나는 다시 <전태일 평전>을 펼쳐들었다. 나불거리던 입도 침묵한지 오래된 시점에 다시 <전태일 평전>을 보게된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로 보이는 노동자들이 밟히고 쓰러지는 모습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에 속죄하는 기분으로 읽은 것이었다.

나는 '군사독재시절..... ' 운운하면서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태일이 피워놓은 화염은 지금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통해서 전해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 권의 전기문에 불과한 <전태일 평전>에서 나는 전태일이 느낀 몸과 마음이 합일된 분노를 지금 시대의 역사의 보편적인 분노로 여긴다면 편협한 생각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시대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전태일의 분노는 보편적인 것이다.

나는 파편이 되어 무기력한 개인에 불과하다. 이러한 무기력증을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갖고있었다. 아마도 이런 감정은 살아갈수록 흩어지는 것이 두려워 <전태일 평전>을 읽고 또 읽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모른다. 내가 존경하는 위인들에게 느끼는 추종과 다르게 말이다.

<전태일 평전>이 노동운동에 헌신하는 이들에게는 자신들을 추동하는 책이라는 것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내게 있어 <전태일 평전>은 사회·현실에 해체되는 나를 위안하는 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종로에서 대학로에서 노동조합의 깃발이 세워질 때, 그 대열에 합류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아마도 <전태일 평전>은 질기게 참회를 행하도록 촉구하는 책이 될 것임을 나는 믿는다. 나와 수년동안 <전태일 평전>이 참외의 시간을 함께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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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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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는 우화!
미래에 대한 충고가 있는 우화!

1.
20세기 초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러시아에서 혁명을 말하는 것이다. 20세기 말 세계사에 큰 충격을 주었던 구(舊)소련이 몰락하고 말랐다.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구(舊)소련의 몰락이 사회주의의 몰락이라고 규정 내렸다. 그런데,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에서 동물들의 혁명을 러시아의 혁명으로 상징화하여 러시아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 그 결말을 사람(<동물농장>에서 사람은 자본가를 상징한다)이 되어 버린 돼지(<동물농장>에서 돼지들은 동물들의 반란에 핵심 참모 역할을 한다)들이 지배하는 '동물농장'으로 끝맺는다.

2.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을 발표한 해가 1946년도인 것을 본다면, 1946의 소련을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와 동급의 체제로 규정한 것이다. 만약 지금 조지 오웰이 살아있다면, 구(舊)소련의 몰락은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서 뭐라고 응대할 것인지는 자명하다. 이런 나의 의문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지 오웰이 <동물농장>을 통해서 그 당시 소련을 평가했던 것에 따르면 지금의 러시아는 소련이라는 자본주의의 게 걸음을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동물농장>이라는 하나의 우화에 이런 거창한 체제규정을 거론하는 것이 웃기는 것일 수 있다. 우화니 한번 조소하고 슬퍼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동물농장>의 동력은 바로, 거창한 정치나 체제변화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정치학 논문이나 정치 문건이 갖기 쉬운 경직성을 배제한 채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통렬히 비판하여 미래에 일궈낼 역사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을 제시한데 있다.

3.
나는 <동물농장>을 고등학교 때 처음 접했다. 그 이전에는 만화영화로 제작된 <동물농장>을 TV를 통해서도 볼 수 있었다. 이 시절까지 나는 <동물농장>이 암시하는 또는 비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냥 재미있게 봤다. 대학에 들어와서 한국의 근·현대사와 세계의 근·현대를 다양한 서적들을 통해서 접한 후 다시 <동물농장>을 읽게 되었다. 이때는 역사에 대한 우화적 모사를 했던 것으로 읽게되었다. 그런데 사회가 하나의 살아있는 동체(動體)로 보이기 시작할 때 <동물농장>을 읽게 되었을 때(얼마 전에), <동물농장>의 도입부분을 흥분된 상태에서 보게 되었고 중반 이후부터는 아주 씁쓸함과 슬픔이 겹치는 감정에서 읽게 되었다.

4.
어떤이는 <동물농장>에서 복서(<동물농장>에서 복서는 말로써 노동자를 상징하는데, 동물들의 반란과 동물농장의 경영에 가장 헌신적이다) 가 병에 걸리고 결국 팔려나가는 일, 나폴레옹(<동물농장>에서 나폴레옹은 스탈린을 상징하는데, 사람들이 농장에서 동물들을 착취했듯이 '동물농장'의 동물들을 착취하는 대표적인 동물이다)의 악선동에 침묵하는 '동물농장'의 동물들, 이런 내용에 의해 오웰이 러시아 혁명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작을 갖고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실상 이러한 러시아 혁명의 한계들을 극복해할 목록들을 나열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런 측면에서 <동물농장>이 러시아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냉철한 고찰뿐만 아니라 미래에 있을 격변기에 충고하고 하는 것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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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의 흰옷
구에 반봉 지음 / 동녘라이프(친구미디어) / 198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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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대한 향수, 참회
그런 단어들을 언습하게 만드는 이야기

1.
대략 5년만에 다시 만나게 된 선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선배는 나와 친분이 두터웠던 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선배는 나와 대학시절 역사의 진보라는 이름 하에 사회적 이익과 개인적 이익을 동일시했던 경험을 공통분모로 갖고 있었다. 아무래도 초·중·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일 수밖에 없었다. 나누던 이야기들 중에 서로에게 가장 감동을 주었던 책이 무엇인지를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전태일 평전>이었고 그 선배는 <사이공의 흰옷>이라고 했다. 내가 <사이공의 흰옷>을 읽게된 계기는 이러하다.

2.
나는 배달되어 온 <사이공의 흰옷>을 단번에 읽을 수밖에 없었다. 주인공 홍이 학생운동에 헌신·체포·고문·당 가입을 하게 되는 단련의 과정을 그린 것이 이 책의 줄거리인데, 마치 대학시절 선배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고 단편적으로는 후배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사회적 이익을 위해서 홍이 유급을 결심했듯이 선배들 역시 그러했다. 서서히 강해져 가는 홍의 모습에서 학년이 높아질수록 강고해지는 선배들의 모습 또한 유사했다. 즉 <사이공의 흰옷>은 내 과거의 단편들 끄집어냈고 향수를 자아냈다.

그러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순간 나는 씁쓸한 입을 다셔야만 했다. 왜냐하면, 주인공 홍은 사회적 이익과 개인적 이익이 부합된 일생을 사는 것으로 결론지어진 반면 내 주위에 대다수의 선배들은 사회적 이익의 방향과 개인적 이익의 지향이 괴리된 채 혹은 종잡을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은 너무도 버겁게 때론 슬프게 보일 뿐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만. 이 책의 줄거리는 선배들의 모습과 유사했건만 결론은 너무도 딴판이었다.

그 다름은 책을 읽던 중간 중간에 불러일으켰던 향수와는 다르게 그 동안 놓치고 있었던 activist의 지향을 포기한 문제들을(혹은 과거 한동안 내가 놓지 못했던 좌절감의 원인들) 되돌려보게 했던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유쾌한 것이 될 수 있겠지만 젊은 시절을 헌신했던 것들이 공염불이 된 이들에게는 유쾌한 것이 될 수 없었는지 나는 지금 처해있는 현실의 모습--즉, 私的(사적) 이해에만 몰두해있는--에 홍의 모습을 통해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참회를 하게 된 것이다.

3.
저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과거 이 책을 읽고 다부진 결의를 다짐했던 독자들과도 다르게 나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참회를 행하고만 것이다. 그런데, 내 머리 속에서는 '너는 지금 이 책을 정신적 안위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여기고 있어'라는 말이 떠돌고있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 떠올려진 것은 내 개인적 느낌이 이 책을 빛낼 수 있는 가치를 추락시키고 있다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과거의 뒷물에 허덕이는 이들이 읽기보다는 현실에 치열한 이들이 읽기를 바란다. 더 이상 내 개인적 향수·참회로 이 책의 가치가 바래지 않기 위해서 이런 바램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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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뒤흔드는 소설
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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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시대적 이식성
: 지식인의 일탈과 몰락을 그린 빼어난 작품

좋은 작품은 발표된 시점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 독보적인 지위를 확립하게 된다. 또 좋은 작품은 발표된 이후에도 독자들이 속한 시대상황에 뛰어난 이식성을 보여준다. 그런 작품을 우리는 수작·명작이라고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최인훈씨의 <광장>은 작품 그 자체가 갖고있는 독보적인 지위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속한 매 시기마다 <광장>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새롭게 되집어 보게 하는 이식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광장>을 몇 안 되는 수작·명작이라고 부르고 싶다.

폭력이 지배하는 남한이라는 광장. 폭력에 깨져버린 남한에서의 이명준(지식인)의 밀실(첫 번째 일탈). 이데올로기적 편협함이 지배하는 북한이라는 광장. 그 편협함을 강요하고 이용되는 이명준의 밀실(두 번째 일탈). 결국 전쟁포로가 되어 제3국 행(세 번째 일탈)을 택한 이명준. 외국으로 이송 중 자살(몰락. 죽음 자체가 어쩜 광장이거나 밀실인지도 모른다). 이런 상징성은 독자로 하여금 시대의 아픔을 되새기게 한다. 그리고 독자에게 삶의 진지함을 부여한다. 그럼 어떤 시대의 아픔인가?

<광장>은 이데올로기 대립(혹은 체제 대립)에 일탈할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표상과 살아 남을 수 없었던 지식인의 몰락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악폐들에 고통스러워하고 이를 극복하고자하는 수단과 방법들이 구체적이지 못할 때, 해결책이라고 하는 것들이 거짓일 때 일탈을 꾀하게 된다. 그럴 때 지식인은 일반인들이 꾀하게 되는 일탈 - 사회의 악폐에 고통스러워하고 이를 극복하고자하는 수단 방법이 제거되어 무기력증을 심각하게 느끼게 될 때(이명준이 남과 북에서 밀실로 파고들어 갈려고 했듯이) - 은 살벌한 이데올로기 대립이 진행되었던 시기뿐만 아니라 악폐들에 대한 돌파구를 찾지 못 하는 현재의 상황에 비춰서 되 집어 볼만하다.

또 지식인의 몰락 - 사회의 악폐에 패배한 후 사회와 단절하고 침묵하거나 지식인이라는 지위가 상실되는(이명준이 제 3국 행을 택했듯이 그리고 자살을 했듯이) - 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남북한이 체제 대립을 하며 각각의 답안을 제시하지만 정답과는 거리가 먼 상황에 비춰 볼 만하다. 남한의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고도의 산업사회가 되어 부유해졌다고 말하지만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현재의 처지를 본다면 말이다. 이유를 어찌저찌 단다고 해도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나는 '절망에서 피어나는 희망'이라는 통속적인 말을 하고 싶다. 어쩌면 최인훈씨는 <광장>을 통해서 매 시기시기 독자들에게 이탈하고자하는 인간들과 몰락하는 인간, 그들에게 자화상을 그려줘서 다시금 희망을 가져보라는 메시지를 <광장>이라는 소설의 행간에 암시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식인의 머뭇거림, 동요, 우유부단함을 질타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암시들이 느낄 수 있기에 전쟁 이후의 세대들이게도 특히 이사회의 발전을 고심하는 이들에게 <광장>은 충분히 생산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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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 풀무질신서 8
조지 오웰 지음 / 풀무질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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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조지오웰에게 있어 전환기와 버팀목

한 사람의 개인사는 역사의 큰 줄기에 극히 미약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래서 역사와 개인사를 거시와 미시로 대응하는 것이 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사가 역사에 열려있듯이 그리고 역사가 개인사의 집합체이듯이 개인과 역사는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역사적 사건이 한 개인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쳐 전화기를 마련하도록 강제했다면, 이미 개인은 역사의 도상(刀上)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동물농장]과 [1984]의 작가로 유명한 조지 오웰에게 있어 스페인 내전은 그에게 육체적 상흔을 남긴 것뿐만 아니라 그가 자평하듯이 자신의 문학의 지향(민주주의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을 보다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카탈로니아 찬가]는 그렇게 조지 오웰의 작품들의 분기점을 이루는 작품임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이기보다는 스페인 내전의 다큐멘터리로 보일 수 있는 [카탈로니아 찬가]에는 조지 오웰이 단순히 사실 나열만 하는 것이 아닌 영구에서 행해지는 스페인 내전에 대한 왜곡과 편견에 쌓인 보도 그리고 소련의 외교정책에 종속되어 스페인을 희생시키려는 정치세력들의 작태에 대한 폭로로 가득하다. 그러나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다른 정치적인 소설이 특정한 정치적 이상을 전제한 상태에서 쓰여진 것이라면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분명히 하는 길 중심에 놓여진 것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조지 오웰의 묘사(전선의 의용군의 모습이나 부르주아지에 해방된 스페인 광경이나 스페인 공산당에 의해 무정부주의자들과 독립노동당이 탄압 받는 사실들 등등)가 작위적이지 않는 또 연출되지 않는 그래서 생생히 살아있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소설이 단순히 허구성만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 할 수 있다.

물론 조지 오웰이 영국의 노동당원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고 이를 소설로 남긴 것이 작위적인 면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음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조지 오웰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 스페인 내전에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밝히듯이 기사를 쓰기 위해서 내전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지 오웰이 살아있을 시기에 주류를 이루었던 파시스트나 친스탈린주의자들에게는 홀대를 당하는 것을 감수해야만했다. 이후 정치와 예술이라는 두 주제의 균형감각을 잘 살린 [동물농장]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은 아마, 친 스탈린주의자들의 홀대를 보다 획기적으로 극복하고자하는 조지 오웰의 창의성의 발휘일 것이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기점으로 해서 이전의 작품은 순전히 조지 오웰의 작가적 열의가 강했던 작품이라면 그 기점 이후의 작품과 에세이는 작가로써 정치의 장에 종속됨 없이 창발성을 발휘하며 그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즉 이전의 작품은 화살촉이 가리키는 방향이 모호했다면 이후의 작품은 화살촉이 가리키는 대상의 심장에 정조준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식인으로써 살아간다는 것은 시대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 굴욕적인 침묵을 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또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굴종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조지 오웰은 침묵과 굴종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리고 자신의 예술행위가 폭력적으로 저지되든 교묘하게 저지되든 상관없이 소설이라는 큰 저수지에 진정으로 이 사회의 미래상을 그려냈으며(해방된 스페인에 대한 묘사) 그 미래상이 파괴되는 과정을 그래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되돌아가는 것을 막고자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작품의 전환기로써 [카탈로니아 찬가]를 상정하고 싶다. 이에 추가로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의 작품활동과 그밖에 활동에 버팀목이 되어준 작품으로 삼고싶다. 그리고 한국에서 문학을 생산/소비하는 이들에게도 단순히 낭비적인 문학이 아닌 미래를 생산하는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는 책으로 여기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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