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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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를 선봉으로 게르만 민족이 유대인에게 행한 대량살상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도 미디어를 다양한 형식으로 전세계에 전파되었고 앞으로 될 것이다. 그래서 일까. 내게 나치가 행한 유태인 대량학살은 식상해진지 오래되었다. 더 정확히 말해야겠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학살을 떠올린다면 근·현대사에서 유태인의 처한(혹은 행한) 모습이 너무나도 상반되어 나치의 학살이 잊지 말아야할 '역사의 교훈'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 즉 현실과 괴리된 교훈 말이다.

<쥐>의 저자 아트 슈피겔만은 시궁창의 쥐들과 다름없었던 유대인들의 모습을 형상하고 있다. 또 쥐의 천적 고양이는 나치를 형상하고 있다. 그래서 '미키마우스'나 '톰과 제리'의 제리에서 볼 수 없는 역사성과 사실성(이를 문학성이라고 동일화해도 좋을 듯하다)이 슈피겔만의 <쥐>에서 볼 수 있다는 것. 또 쓰라린 기억을 갖고 있는 유태인에게 과거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떠올리는 수밖에 없는 현재진행형임을 나타낸다는 것. 또 망각되어질 역사를 긴장감을 놓지 않고 복각하고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은 분명 <쥐>의 작품성을 드높일 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내게는 이런 작품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빼어난 작품성을 가진 만화라는 친구의 소개로 읽게 되었지만 말이다. 나는 <쥐> 한 컷 한 컷마다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마치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마지막 부분에서 나폴레옹이 인간들과 술잔을 부딪히는 모습을 보는 동물들의 착시현상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쥐는 팔레스타인으로 고양이는 이스라엘로...

칼이 살인자의 손에 들어가면 무기가 되고 손재주 좋은 요리사 손에 가면 유용한 도구가 되듯 <쥐>도 그런 쓰임에 따라 평가되어진다고 본다. 그래서 <쥐>의 예술적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고 본다. 아니, 이미 훼손되었는지 모른다. 유태인하면 역사의 피해자라는 의식을 확대하고 그래서 팔레스타인들을 탄압하는데 침묵하도록 강요하는 수단이 되었다면 말이다.

좋은 작품을 만나 흥에 겨워 서평을 쓸 수 없다는 현실에 통감을 하지만 <쥐>를 통해서 역사의 교훈이 교훈자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닌 진보된 사회의 발전에 디딤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쥐>의 작품성을 보존한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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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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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에 길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사람들이 과거의 일들을 말한다면 두 가지로 맥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좋은 기억들을 그리워 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좋지 않은 일들에 대해 부끄러워할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염없이 흘러보낸 '현재'라는 시간들에 대한 반성을 전제하거나 절망적인 미래를 잠시나마 잊기 위해서일 것이다.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는 내 짧은 인생살이가 얼마나 강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과 일의 나열인지 그리고 최첨단 최신의 현재에서 미래로의 길이 실제로는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일깨워준다. 그래서 상부상조의 생활을 하는 라다크 주민들이 자본주의 문명이 들어오면서 강박해지는 생활에 스스로 씁쓸해 하는 것은 하염없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야하는 우리의 살림살이를 반추하게 한다.

라다크 원주민들은 곡물을 타작하거나 채집·수렴을 할 때 서로를 돕는다. 이를 보고서 이들에 대해서 우리는 독립적이지 못하고 서로에게 너무나 의존적 생활을 하고 있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들의 공동체 자체를 본다면 라다크는 완전히 독립적인 공동체이다. 외부와의 단절을 위해서도 그 많은 세월을 잘 지내오지 않았는가.

우리는 라다크 원주민들 보다 개개인은 독립적일 수 있지만 교환상품인 화폐에 길들어져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라다크 원주민의 허름한 옷차림이나 거친 손과 피부는 말끔한 옷과 깨끗한 피부의 우리 모습을 보면 우월성을 강조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보다 더 세분된 편린 속에서 화폐의 올가미에 묶여있다. 그 편린은 언제 떨어져나갈지 모르는 불안함을 안고 있다. 또 화폐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전혀 자유롭지도 행복하지 않다.

라다크의 독립적인 공동체 삶이 파괴되었다. 자본주의 파고에 편린이 된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저자가 라다크에서 자본주의가 파괴한 것이 무엇이고 이제 잊혀진 것이 무엇인지를 복원하는 작업 속에서 우리는 알 수 있다. 또 저자가 '라다트는 오래된 미래'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마 라다크의 공동체 삶을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순히 원형 그대로 복원하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 생각에 저자는 현재 거대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전환·도약·변혁·혁명)을 위해서는 그들의 자주적인 협동 생활공동체를 복원해야하다는 것을 말하고자하는 것 같다. 라다크의 기억을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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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그림일기
오세영 지음 / 글논그림밭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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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년대 운동권 필독서라 불리는 사회과학서적이 있었듯이 만화에도 그런 필독서가 있다. 대표적으로 허영만의 <오! 한강>같은 만화 말이다. 이 만화는 제도권의 억압으로 인해 작가의 의지와 저항이 동요(사회의 불만과 안쓰러움이 덜 소화되어 배출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 한강>을 통해서 현실도피와 사회의 압력에 굴종할 수밖에 없고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모습을 인정해야만 하는 동일률을 찾을 수 있었다. 시대의 '암울함', '아픔' 같은 단어들만 떠올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90년대 만날 수 있었던 <부자의 그림일기>는 투철한 작가의 의지와 절실한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이 현실사회에 대한 정확한 모사됨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작가주의의 정신의 최고봉이라고 칭송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또한 내 주위의 많은 타인들의 삶을 오세영씨가 <부자의 그림일기>에서 잡은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자연스럽게 습득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사회에 대한 저항이 너무도 지나쳐 덜 익은 문제의식이 그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혹은 듣는 이) 인상을 찌푸리게 하지만 오세영씨의 그림에는 현실의 불만족성을 보다 정확히 보도록 하는 시각을 선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자의 그림일기>에는 현실에 대한 희화성(폭로를 위장한)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만화에 대한 일반적 관념인 '재미'를 배제한 것이다. 진중함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노동 대중의 고단함, 쓰라림을 잡은 그림 하나하나가 웃고 넘어가는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또는 그들의 삶을 홀대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회 문제의 다양한 모습이 갖는 사회문제의 핵심을 직시할 수 있는 시각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단순히 인물의 다른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인물을 통한 사회문제의 핵심인 보편성을 드러내고있기 때문이었다.

'불'의 마지막 그림인 한가족의 TV시청그림이나 '목록'의 마지막 그림인 한 신사의 구겨진 뒷모습에서 한 두 세대가 포함된 가족사가 현대사의 굴곡에 엮어있음을, 수출국가의 뒷모습은 노동자의 피가 있을 허울좋은 신사의 모습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회성 상품이 아니라 깊은 이해와 섬세한 시각이 담긴 작품(작품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이 담긴 만화임을 단언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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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 -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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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가지 관념에 대한 재음미하도록......

'아르로디테가 육체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프로디테 포르네(음란한 사랑의 여신)'라고 불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르포디테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보라, 그 아들인 에로스는 '프쉬케(마음)'를 사랑하여 마침내 사랑을 한 단계 드높이지 않았는가? 마침내 인간이 본받아야 마땅한 사랑의 본보기를 보이지 않았는가? 에로스와 프쉬케 사이에서 딸이 태어난다. 이 딸의 이름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기쁨'이다. '사랑'과 '마음'이 짝을 이루니 그 딸이 '기쁨'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사랑은 바로 이런 것이다.'

''플루토스'는 저승왕 하데스의 별명인데, '재보' 또는 '넉넉하게 하는 자'라는 뜻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어둡고 음습한 저승왕에게 이렇게 긍정적인 별명이 붙었다니……. ......하지만 그저 듣기 좋으라고 붙인 이름만은 아니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 즉 저승 땅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씨앗만 묻으면 키워 주고 열매 맺게 해 주는 넉넉한 대지의 품안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면서 가장 자극 받았던 글이다. 죽음·사랑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했기 때문이다. 이윤기씨가 12장의 주제로 엮은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일반인들에게 꿰지 않은 구슬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윤기씨의 입담 섞인 글로 보석이 된 것이다. 너무도 신기하게도. 또한 12가지 관념(신,사랑, 저승 길, 대홍수, 뱀 등등)들 속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것이다. 그것도 쉴세없이...

그런데 나는 여기에 '인간의 근본'을 알기 위해 읽어야할 '그리스 로마 신화'라고 까지는 말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글이 없던 시기 그리고 실증과학이 발전할 수 없었던 시기에 신화는 인류가 자연을 해석하는 방법이었으니까. 고대인류의 삶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그들 나름의 방식을 풀어낸 것이다. 고대 인류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를 신화에 담아놨다면, 이윤기씨는 그들이 마련한 선명한 색을 각각 갖고있는 물감(각각의 신화)을 이용해 한편의 그림으로 완성하였다. 외국신화의 소개가 아닌 한국인의 정서와 이해를 적절히 섞어 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리스 로마 신화'와 내 생활의 애증을 뒤섞이도록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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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세계 (합본)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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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소피의 세계>를 읽을 때가 3년 전이었다. 그때는 철학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면 유심히보던 때었다. 더구나 일반인으로 철학에 관심이 있을 때 철학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소피의 세계>를 읽게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철학의 철학사적 이해> 같은 철학사관련 서적을 읽었을 때는 다분히 철학적 개념과 철학자들 나열에 내 정신은 혼미해져서 정말로 철학사는 만만한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때라 <소피의 세계>를 선택하게된 것이 탁원한것임을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금 다시 <소피의 세계>를 본 후 이 책에 대한 느낌이 확연히 달라진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쉬운 설명에 '이해 하기 쉬운 책' 정도로 여겼으나 이번에 받은 느낌은 내가 소피와 동일화 되어 아주 골똘히 철학적 주제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생각하는 것 자체를 거북스럽게 여기는 사회에서 철학적 생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소피의 세계>는 인류가 고심해놓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자신의 사고가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그리고 어떤 세계관에 근접해있는지. 또한 더욱 심도있게 독해해 볼 만한 주제들을 찾아내는 재미는 철학이 서점을 만찬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임을 일깨워준다.

더구나 일관된 세계관을 갖는 것이 편협한 인간으로 매도되는 세상에서 <소피의 세계>는 세계관의 만찬속에서 그동안 자신이 갖고있던 철학적 사고를 유도하여 자신의 정신적 입맛에 맞고 튼튼히 할 수 있는 메뉴를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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