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잠들기 전의 두통은 아등바등 버텨온 하루의 마감을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린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싸매고 잠을 청해 보려하지만 의식은 더욱 또렷해지고 약을 먹여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고 있을 즈음 이 책의 주인공 최현수가 생각났다. 그가 열두 살 소녀 세령을 차로 치고 목 졸라 살해한 후 세령호에 던졌기 때문에 잠들지 못한 것은 물론 악몽과 괴로움에 시달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번도 그의 고통을 간접경험하거나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두통에 시달리던 밤, 그런 최현수가 떠올랐다. 나는 기껏해야 몇 날 중 하룻밤 두통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그는 매일 밤, 또한 그 사건 이후 7년이 흐르는 동안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밤을 보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어떤 이는 이 소설이 무섭다고 했고, 등장인물의 누군가가 불쌍하다고도 했다. 무서운 것을 싫어하는지라 푹푹 찌는 한낮에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읽었다. 흡인력이 대단해 순식간에 100페이지를 읽어버렸는데 그때부터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 세세한 묘사가 인상적이었음에도 내용이 무섭다기보다 너무 암울했고 무거웠다. 무엇보다 100페이쯤 다달했을 때 이 작품이 왜 이렇게 두꺼운지 짐작이 갔다. 내용을 대강 알겠다는 자만심이 아니라 그날 밤 세령마을에서 벌어진 일을 토시하나 빠뜨리는 일 없이 세세하게 목도하게 될 거라는 나름대로의 복선을 알아차린 것이다. 모든 잘못이 최현수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령의 아빠 오영제의 실체를 보게 될 거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망설여졌다. 사방이 어둠뿐인 길의 초입에서 앞으로 한발짝 떼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용기를 내 어둠의 길을 통과한 결과 모든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최현수가 세령을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한 건 사실이지만 '미치광이 살인마'가 아니라는 사실. '세령호의 재앙'은 맞지만 그 모든 사건에 단순히 최현수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최현수의 잘못이라면 세령을 차로 치는 사고가 일어났을 때 즉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최현수가 처했던 상황이 신고를 하는 방법보다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하도록 만들어버렸지만 그 실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자기 것에 대한 병적인 집착'으로 아내와 딸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버린 것도 모자라 최현수의 가정을 파탄 낸 오영제도 정상은 아니다. 불행이라면 그 둘이 얽혀버렸다는 사실이다. 많은 '하지 않았더라면'이란 가정 하에 최현수와 오영제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타인의 목숨을 해하는 큰 죄를 범했을지라도 십자가를 지고 평생 살아갈지언정 자신의 삶의 영역은 조금이라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최현수가 만났던 끔찍한 밤들, 오영제가 꿈꾸는 복수, 그 안에서 살아남은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 서원이 겪어야 했던 그 모든 일들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이 괴로웠다. 최현수의 과거를 담고 있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비추며 그를 괴롭히던 고향의 우물이 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절대 지워지지 않는 기억처럼 이 소설을 덮은 후에도 오래도록 이들의 이야기가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날 밤 최현수가 저질렀던 실수 때문에, 병적인 집착을 지닌 오영제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모든 상황과 현실이 부적절했다. 최현수가 그 엄청난 사건을 털어놓을 단 한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고독하고 외로웠던 최현수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그 결과 당시 열두 살이었던 서원은 7년이 흐른 뒤에도 오영제의 복수의 제물이 될 날을 기약하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도 발붙이고 살아갈 수 없게 만든 오영제의 치밀함과 광적인 복수가 나은 비극이었다.
서원에게 모두 등을 돌릴 때 단 한사람, 세령마을에서 같은 방 룸 메이트였던 오승환만이 힘이 되어준다. 함께 산 짧은 시간에도 그랬지만 친척집을 전전하며 세상의 끄트머리로 쫓겨나고 있을 때도 서원에게 유일하게 힘이 되어준 사람은 안승환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있었던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게 해준 사람도 안승환이었다. 최현수가 세령의 시신을 유기하는 것을 목격했음에도 말하기를 기다렸던 죄책감으로 이 모든 사실을 소설로 쓰겠다는 부탁을 들어주었다. 오영제는 최현수의 사형집행과 동시에 서원에게도 복수의 칼날을 겨누고 있었다. 최현수는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안승환을 비롯한 몇몇 사람을 통해 오영제의 계획에 맞선 나름대로의 대책을 세웠다. 모두 서원 때문이었다. 자신 때문에 모든 게 어긋나버린 서원. 딸을 잃은 오영제의 심정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세령과 자신의 아내에게 했던 광적인 모습을 떠올려볼 때 최현수와 오영제의 부성애는 차원이 달랐다. 오영제에게 최현수는 자기 것을 흠집 낸 파괴자였다. 자기 것(자기 의도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에 딸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그 분노는 오죽했겠는가.
이 소설을 끝까지 읽기 망설였던 순간(100페이지에서 머물렀을 때)부터 어떤 과정과 어떤 결말이 그려질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급하게 마무리 지어 버리는 듯한 끝이 조금은 아쉬웠다. 오영제는 계획대로 서원에게 접근해왔고 서원을 지켜주고 있는 안승환을 먼저 처리했다. 오영제가 처리하지 못한 사람은 프랑스에 있는 아내 문하영이었다. 문하영은 오영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서원에게 마지막에 가서 자신을 이용하라고 했다. 7년의 세월동안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오영제를, 자신을 세상 끝으로 몰아낸 오영제와 맞섰을 때 어떻게 문하영을 이용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었지만 문하영이란 이름만으로 오영제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그렇게 쉽게 걸려드는 오영제나 그 모든 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최현수, 안승환, 문하영의 마무리가 못내 아쉬웠다. 악몽 같았던 7년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어 몹시 고마웠지만, 뭔가 더 치밀함을 바랐던 나도 어쩌면 내내 함께 악몽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원이 세상 끝으로 밀려나면서 처음 가졌던 희망은 아버지가 범인이 아닐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 희망이 어느 정도 이뤄지긴 했지만 앞으로 서원이 마주할 세상이 그리 희망적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씁쓸했다. 사람들은 쉽게 비난하고 쉽게 잊는다. 그리고 다시 들춰지면 또 쉽게 들끓고 쉽게 분노하다 사그라진다. 그 당사자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제한 채. 또한 누군가의 삶을 처절히 파괴해버렸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너덜너덜해서 더 이상 파괴될 것도 없는 서원의 삶에 또 다른 파괴자가 있을 거란 생각은 내가 생각해도 잔인하다. 그러나 7년의 악몽은 끝이 났다. 이젠 모두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희망은 잠시 제쳐둔 채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