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턴
세실 바즈브로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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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인데다 햇살이 좋아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마침 아이도 졸려 하기에 남편과 함께 나가기로 하고 챙기는데 별 것도 아닌 일로 남편이 짜증을 냈다. 나도 맞장구를 쳐서 그렇게 나가기 싫으면 나 혼자 다녀오겠다고 하자 정말 남편이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런 상황이 짜증이 나 한숨을 푹 쉬며 집 앞에 나가려던 계획을 수정해 좀 더 멀리 산책을 나갔다. 지난 주말에는 함께 유모차를 밀며 느긋하게 산책을 했는데 아이와 둘만 나가려니 뭔가 처량해 보였다. 그렇게 복잡다단한 마음을 다스리면서 산책을 하는데 햇살이 좀 뜨거워도 바람이 불어 그럭저럭 상쾌했다. 아이도 기분이 좋은지 스르륵 잠이 들고 바다는 눈앞에 펼쳐지고 잠시 유모차를 멈춰놓고 가져온 책을 읽었다. 지난밤에 조금 읽다 끝까지 읽어보고 싶어 가져온 책. 작가도 낯설고 책 내용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지만 그래서 현재 내 상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바다에 관한 내용이 나와서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읽으려고 가져온 책이 아니었는데 묘하게 현장독서가 되고 말았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바다는 어디가 수평선인지 구분이 안가는 넓고 먼 바다가 아닌 은빛 물결을 가까이에서 내려다 볼 수 있고 바로 섬과 연결되어 있는 작고 아담한 바다였다. 그래서 네 편의 단편에서 나오는 거대하고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거친 바다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동떨어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너무나 평온한 바다를 보고 있어서 작품 속에 드러난 이중적인 바다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끼긴 어려웠지만 오히려 그런 반대되는 분위기였기에 어느 정도 관찰자의 입장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거친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사람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곳에서 이 책을 읽었다면 단박에 나는 우울감에 빠져 버렸을 것이다. 글이 드러내는 분위기에 쉽게 매도되는 편이라 우울하거나 무서운 책은 절대 깊은 밤에 읽지 않는다. 이 작품 속에 드러나는 네 편의 단편은 죽음이 등장한다.(「등댓불」에서 주인공이 본 사람이 형체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지만) 여객선에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활동하다 침몰로 인해 동료도 잃고 자신의 삶의 방향이 더 복잡해져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페리의 밤」, 가장 가까워야 하고 마음을 나눠야 할 아내와 원만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며 외로움을 켜켜이 쌓아가는 등대지기가 등장하는「등댓불」, 사고로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아들에게 생일 때마다 편지를 쓴 병을 던지는 애틋한 노부부지만 실상 아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던「바다로 보낸 병」, 아버지와의 약속을 위해 매주 일요일 바다에 동생과 함께 나갔다가 눈앞에서 동생을 잃고 엉켜있던 가족관계에서 벗어나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가 실린「혼자라면」이었다.

 

  짧은 단편인데도 뭔가 긴 이야기를 읽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어떠한 사건은 일어났고 그 배경이 모두 바다라는 점,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삶을 한 단계 뛰어넘어 초월한 듯한 분위기를 띠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초연하게 사건을 떠올리고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닥친 일들에 대해 체념도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하다못해 바다를 미워하지도 않고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예고되어 있었기에 당연한 것으로 보았는지도 모른다. 바다라는,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배경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늘 위험성이 뒤따랐다. 그리고 위험부담은 현실이 되었다. 남겨진 사람에겐 고통일 수밖에 없는 상실감. 그런 사람들의 내면을 담담하게 써내려가고 있어 어떻게 보면 이미 숱하게 보아온 주제일지도 모르나 저자만의 문체로 작품의 배경이 되는 바다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있었다.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나는지 궁금해 검색해 보았지만 국내에 번역된 작품인 이것뿐이었다. 저자의 또 다른 작품을 만날 수 있다면 똑같이 바다가 보이는 산책로에서 읽고 싶었는데. 그게 조금 아쉬웠다.

 

  우연히 책장에서 꺼낸 책에서 또 다른 세계를 맛볼 때의 독서는 행위자체로 만족감을 준다. 비록 이 책을 읽게 된 배경은 썩 유쾌하지 못했지만(집에 돌아와서 여전히 툴툴거리는 남편에게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냐고 따지자 자기도 짜증낸 게 미안했는지 얼토당토 않는 이유를 댔다. 내가 외출하기 직전에 큰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간 게 화근이었다나 어쨌다나. 자긴 화장실 들어가면 30분이 기본이면서! 하긴 외출 직전의 배우자의 오래 걸리는 화장실행은 그야말로 짜증 그 자체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그 순간은 정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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