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산 스님.초롱불 노래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3
이즈미 교카 지음, 임태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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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을 하려고 보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이 나이가 되니 그런 눈을 보면서 낭만적인 생각을 하기보단 내일 출근 걱정을 하게 된다. 혹여나 버스가 끊기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얀 눈을 보며 마냥 좋아하고, 혼자 낭만에 빠지겠다고 눈 위를 걷는 것도 불사했는데, 이제는 일상에 지장이 갈까 걱정하는 단계가 되어 버렸다. 이런 날은 그저 따뜻한 이불 속에서 맛난 음식을 먹으며 재미난 책을 보는 게 최고다. 서정적이고 현대적인 소설보다 현실을 잊을 정도의 재미가 깃든 고전이 좋을 것 같다. 일본 환상문학의 대가로 불리는 이즈미 교카의 작품은 어떨까? '괴이하고 몽환적인 환상 세계'로 이끈다고 하니 어디 한 번 따라가 보자.
 

  책을 읽기 전에는 표지를 보면서 그냥 달이 참 밝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고야산 스님>을 읽고 나니 표지가 으스스한 게 꼭 무언가가 튀어 나올 것 같았다. 1900년 작품인 <고야산 스님>은 저자의 작품 중에서 완성도가 뛰어나다고 한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고승에게 기이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그런 시작부터가 특별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을 예감하게 되었다. 고야산 스님이 행각승일 때 주막에서 만난 한 약장수 때문에 길을 잘못 들게 된다. 길이 잘못 알고 다른 곳으로 간 약장수를 만나러 들어간 숲은 표지처럼 적막하고 괴이했다. 뱀들이 진을 치고 나뭇가지에서 산거머리가 뚝뚝 떨어지는 곳을 겨우 통과한 스님은 외딴 오두막에 닿게 된다.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 여인의 독특한 매력에 끌리면서도 외따로이 떨어져 살고 있는 그녀가 가여워 잠시 혼란스러워한다. 그때 그 집을 드나들던 한 영감으로부터 그녀의 정체를 듣게 되는데, 욕정을 품고 접근하는 남자들을 짐승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력을 가진 여자였다. 길을 잘못 들고 깊은 산속에서 뱀과 산거머리를 만나고, 외딴 오두막의 미모의 여인을 만날 때부터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여인의 정체가 밝혀지자 내심 나를 따라다녔던 기이함이 정체를 드러낸 셈이다. 백 년 전의 작품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묘사와 오싹함은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짜릿함이었다.

 

  <초롱불 노래>는 1910년 작품으로 국내에는 처음 번역되었다고 한다. <고야산 스님>이 이야기를 듣는 형식이라면, <초롱불 노래>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구성이 돋보인다. 일본의 전통 예능인 노가쿠를 소재를 삼아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한 노가쿠 배우와 연주가는 여관에서 게이사로부터 자신에게 음악을 가르쳐준 이에 대한 사연을 듣게 된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노가쿠계의 촉망받던 기다하치란 사람이었다. 맹인 안마사를 죽음으로 몰고 가 파문당한 그는 다른 공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다른 공간에서 각자였던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노가쿠의 한 대목을 보여주게 된다.

 

  <초롱불 노래>는 조금 독특한 기법으로 소설을 이끌어 가서인지 처음엔 공감각이 형성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제각각의 이야기가 섞여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알지 못하다 이야기가 합쳐지고 그들이 만날 때에야 이 독특한 소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고전 미학을 다뤘다는 점에서 조금 생경함을 느꼈으나 저자만의 기이함으로 작품을 완성시키는 모습에 감탄하게 되었다. 두 편의 작품이 실린 얇은 책이지만 시공간을 잊을 정도로 푹 빠져들게 만든 책이었다. 겨울밤에도 무척 잘 어울렸고, 현대문학의 홍수 속에서 만난 고전의 매력을 새롭게 맛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환상문학의 대가로 불리는 '이즈미 교카'란 저자를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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