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우울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염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히라노 게이치로는 조금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작가다. 고등학교 때 문학을 읽는답시고 도서관을 들락거릴 때, 우연히 <일식>을 읽게 되었고 어려운 작가로 인식하면서도 묘한 매력을 느꼈다. <달>까지 읽고 난 뒤에도 그 느낌은 변함이 없었지만, 나의 뇌리에 작가의 이름은 아로새겨졌다. 그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모두 구비해 놓았는데, 결국은 읽은 책보다 읽어야 할 책이 더 많은 작가에 속하고 말았다. 책에 관심이 증폭될 때 만나게 된 작가라서 그런지 동시대를 살아가며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감격으로 다가온다.

 

  활발한 활동을 하는 저자와는 달리 그의 작품을 제때 읽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아무래도 내 수준이 형성되지 못할 때 <일식>을 읽어 어렵다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고, 이왕 읽을 거라면 제대로 읽고 싶다는 열망에 그의 책을 모두 구입하면서도 선뜻 손을 못 대었던 것 같다. 이제는 <일식>부터 다시 꺼내 그의 작품을 읽어도 될 것 같아 가볍게 시작할 맘으로 <문명의 우울>을 먼저 읽게 되었다. 두께가 얇아 먼저 꺼내들었는데, 오로지 글로만 대면하게 되는 작가이며 그 안에 내포된 의미를 책의 두께로 가늠할 수 없었다는 사실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짧은 칼럼 형식으로 실린 글들은 2000년 1월부터 1년간 월간 <voice>에 실린 것이라고 한다. 단행본으로 만들면서 가필과 수정, 제목도 직접 붙였으며, 「사진초寫眞抄」라는 연재 글의 형식에 따라 사진을 보고 느낀 대로 쓰는 스타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저자 또한 소설가인 자신이 시사에 대해서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연재 스타일을 알고는 편하게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시사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무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옮긴이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한 작가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는데, 연재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 읽었음에도 사회 현상의 화제는 옛 일이 되어 버렸을지 모르나 저자의 생각을 통해 글 속에 투영된 문제의식과 경각심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글을 읽다보면 주제에 맞는 부연설명과 저자의 생각은 충분히 드러나서 저자가 보았다는 사진을 굳이 찾아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저자후기에서야 연재 글의 성격을 알았을 정도로 시사문제라고 해서 꼭 사진이 들어가 있거나, 전문적으로 글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쓴이의 생각이 온전히 판에 박힌 듯 독자에게 들어가는 것보다, 글을 읽으면서 읽는 이의 생각과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저자의 글이 결코 가벼웠다는 것은 아니다. 옮긴이 또한 저자가 한자를 잘 알고 잘 쓰는 젊은 작가에 속해 번역이 쉽지 않았다고 했듯이 짧은 단락으로 이루어진 글들은 꼼꼼히 읽지 않으면 이해력이 떨어지기 딱 좋았다. 글을 읽으면서 종종 멈춰서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며, 내가 수용해야 할 것과 나의 생각을 같이 관철시켜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구별하며 읽어나갔다. 저자가 쓴 글들이 우리 사회와 밀접한 현상들이어서 좀 더 신경 써서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말한 주제들이 일본사회를 중심으로 그려나갔다고 해도 대부분 내게도 익숙한 것들이라 관심 있게 보기도 했다. 로봇 강아지, 휴대전화를 통한 연애학, 사이비종교, 9.11사태, 고질라 등 과학과 사회현상이 빚어내는 갖가지 일들에 대해 저자의 생각을 읊조려 나갔다.

 

  저자가 읊조렸다는 표현을 쓴 것은 저자의 생각이 풍기는 주관적인 견해와 젊은 지식인으로서의 풋풋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확성기를 들고 나의 생각은 이러하니 이렇게 바꿔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한다고 해서 바뀔 것들도 아니었고, 저자도 그런 형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문제의식과 함께 대두된 저자의 생각은 이제 막 알에서 깨어 나오려는(알은 배움의 단계인 과정, 깨어 나옴은 소설가로써 입지를 굳히는 일) 움직임으로 보였다. 그의 생각이 깊고 고르며, 자신의 생각이 뚜렷하면서도 강요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자잘한 경험과 함께 일상에 녹아 있는 주변의 것들을 들춰내서 새로운 시각을 독자에게 던져 준 것 같다.

 

  정독하며 읽었음에도 눈을 뗄 수 없어 한 호흡에 읽어 버린 책이다. 소설과 에세이가 모두 뛰어난 작가를 특히 좋아하는 나로서는 저자에 대한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 셈이었다. 10년 전에 읽은 소설 두 편과 이제 에세이 한 편을 읽었을 뿐이어서, 책장에 꽂힌 그의 책 중에서 다음 읽을거리로 무엇을 지목해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다. 여전히 내게는 결코 쉽게 읽어나갈 수 없는 작가이며, 숨을 깊게 들이쉬고 큰맘을 먹고 대해야 하는 작가라는 인식이 남아있다. 그의 첫 작품을 읽은 후로 10년 동안 꾸준하게 그의 동태를 살펴왔다고 할 수 없으나,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고맙게 느껴진다. 단숨에 그의 작품을 독파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그의 작품을 만나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호사를 누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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