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책장에 쌓아둔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을 다시 꺼냄으로써 저자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이다. 모든 작품이 소설인 줄 알고 있던 나의 무지를 깨치듯 자전적 에세이와 기행문, 짧은 이야기들이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 작가의 소설과 에세이가 모두 좋은 경우에 독자는 풍부한 문학의 세계를 느낄 수 있어, 이런 작가를 만나면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욕심까지 들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독서를 통한 발견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 이런 행위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을 접함으로써 생각의 뻗어감이 마냥 즐거울 정도로 현재 나의 독서는 무척 즐겁다.

 

  <소외>는 저자가 소설가로써 뿐만이 아닌 사회 비평가, 다큐를 다루는 면모까지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나게 해준다. 제목처럼 소외된 것들에 대한 서른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소외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알더라도, 막상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는 광범위함에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 책은 저자가 유대인 수용소를 방문해서 수용소의 한쪽 구석의 돌멩이에서 처절한 글을 보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이 책이 어떠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에 소외된 것이 얼마나 많은지 깨달을 수 있었고, 저자가 쓴 이야기 이외에도 수많은 소외가 여전히 존재하며, 그런 소외를 관심으로 돌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임을 조금씩 인식해 갔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지 않는 짧은 이야기들은 분명 존재하고, 존재해 나가는 사람들의 단상이었다. 단지 그들의 삶에 관심 갖지 않았으며, 함께 뒤엉키기를 거부했을 뿐이다. 자신의 인생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타인의 삶에 어떻게 관여할 수 있냐는 핑계도 소외된 이야기들 앞에서는 부끄럽기만 했다. 너무나 소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입김을 불면 책장의 글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들의 이야기도 뿔뿔이 흩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이야기들이 소소하더라도 행복하고, 기쁨에 넘친 이야기들이 많았으면 나의 마음이 이토록 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자가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듯, 지켜보며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의 향연에 동참할 뿐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세계 각지의 이야기를 흡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존재하는 이야기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고, 곳곳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향연을 느끼기에 바빴다. 너무 광범위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지명의 낯섦에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만큼 내가 알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단락으로 이루어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중간쯤 들어서, 정치적인 주제로 글이 길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흐름 속에는 저자의 다른 작품마다 녹아있는 또 다른 에피소드도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는 순간, 이야기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다. 소외된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소외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분명 관심을 갖고 불법적으로 자행되는 행위에 대한 제재가 필요한 이야기들도 많았다. 환경파괴에 대해, 공동으로 이뤄가야 할 자연에 대해,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랬다. 그것들을 지켜보면서도 먹먹해지는 가슴을 부여잡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누구의 사연을 올릴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그런 자들을 돌아봐 달라고 호소해야 할까. 흩어져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앞에서 나 역시 소외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돌멩이에 적힌 문구처럼, 내가 잊힌다는 사실 앞에서 두려움만이 엄습해왔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물질의 풍요가 아닌 질적인 풍요로움을 간직하며 살고 싶었던 나의 바램들은 한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주목받지 못해서 서글프다는 마음보다, 이것이 인생이고 삶이라는 관념이 밀려오자 잠시 긴장의 끊을 놓쳐 버린 것 같다. 그것을 놓쳐 버렸다고 해서 뒤처진 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앞에 한 없이 마음이 서글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옮긴이는 저자가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보다는 제도권 밖에서 진한 인간미를 풍기는 일상생활 속의 영웅들을 더 선호했다.' 고 말했다. 이 책 속에 담긴 사람들이야말로 제도권 밖에서 머무르고 있었고, 같은 제도권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만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실해진 기분이다.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려고 기를 쓰기보다, 제도권 밖에서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보듬으며 살아가는 것이 내게 주어진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산이 흩어져 버린 이야기들을 통해서 나의 이 다짐까지 흩어져 버릴까 살짝 걱정이 되긴 하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그러모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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