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르 : 인생의 아름다움을 즐긴 인상주의 화가 마로니에북스 Art Book 17
가브리엘레 크레팔디 지음, 최병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지난 달 중순 쯤, 서울에 일이 있어 간 김에 전시회나 보자 싶어 르누아르 전(展)을 관람하고 왔다. 전시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다 평일이여서 그나마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국내에서 열리는 유명 전시회를 몇 번 다녀봤지만, 늘 사람에 치여 그림보단 사람구경을 더 많이 하고 온 기억밖에 없다. 소란스럽고 복잡하기만 한 전시회의 풍경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면 어쩌나 싶었는데, 비교적 한산해서 여유롭게 그림들을 보고 왔다. 그러나 12,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내가 관람한 시간은 30분 남짓이었다. 미술관에 사람이 정말 눈에 띌 정도로 없었다면 3시간이고 보고 왔겠지만, 줄줄이 들어오는 사람들에 약간의 답답함을 느껴 후다닥 보고 나와 버렸다. 거기다 그림에 대한 설명을 읽는 것을 싫어하므로, 그야말로 그림에 눈도장만 찍고 온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을 관람하고 왔다. 그럴 거면 뭐 하러 비싼 입장료 내고 전시회를 가냐 묻겠지만, 사람들이 가까이서 그림을 들여다 볼 때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그림의 맛을 잊을 수 없기에 가는 거라고 억지스런 핑계를 대 본다.
 

  그 때 보고 온 그림들의 아른거림이 희미해 질 때쯤, 이 책이 내게로 왔다. 르누아르 전시회를 다녀 온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아 괜찮은 연결이 되겠다 싶어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미술책이므로 그림이 많아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소책자였다. 나 또한 전시회에서 본 그림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편안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책의 구조에 질려 책을 읽다말다 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림을 많이 실어야 하는 책의 구조상 여기저기 글들을 펼쳐놓아야 함을 이해한다. 그리고 작은 책에 다양하고 많은 정보를 싣고 싶었음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상, 그림들이 조각조각 실려 있고 글들이 여기저기 퍼져 있는 구조가 르누아르의 그림 세계를 이해하는데도,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는데도 거슬렸던 것이다.

 

  이 책에 당연히 르누아르의 그림과 생애, 그리고 그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그림들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가 실려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르누아르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 시대에 같이 활동했던 화가들의 작품을 묶기도 하고, 비슷한 화풍의 화가들을 묶어서 독자들을 이해를 도왔다. 거기다 르누아르가 활동했던 시대의 배경도 알려주고 있어 거시적 시점을 키워주고 있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겐 오히려 그런 시점이 초점을 흐리게 했고 이해를 분산시켰다. 르누아르의 그림세계를 느끼기도 전에 다양한 정보들이 동시에 드러나니 집중력 약한 내가 그것을 견뎌낼 리 없었다. 미술책일지라도 활자에 중독된 나로서는 글씨에 먼저 관심이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글을 모조리 읽어야 그림이 보였기에, 글을 읽고 그 다음에 다시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과정을 되풀이하다 보니 쉽게 지쳐 버렸다.

 

  미술 책을 미술 책으로 보지 않고, 읽기에 치중한 나의 시각이 어리석었을 수도 있다. 책에 따라 읽는 방법을 달리 하고, 미술 책일 때는 그림을 보는 시각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앎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미술 책이라도 눈에 확 들어오는 동시에 그림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는 책들도 있다. 그렇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과 감정의 이입으로 르누아르의 그림들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며 이렇게 긴 푸념을 읊어대고 있는 것이다. 전시회에서 본 그림들이 종종 나왔음에도 현실감이 떨어졌음은 당연했다. 책의 끝까지 그 과정을 뚫고 나오지 못한 사실이 아쉽긴 하지만,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르누아르의 화풍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고흐만 보더라도 시기에 따라 그림이 사뭇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기마다 드러나는 특징을 조금씩 감지해 내며 좋아하는 작품을 골라내는 재미가 있는 고흐 그림을 보다보니, 르누아르의 그림들을 보면서도 그런 변화를 조금씩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유명한 화가를 기억할 때는 역시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그림들을 먼저 보게 되며 기억하게 된다. 그렇다보면 그 외의 작품들이 낯설 수밖에 없고, 초기작이라든가 경지에 오르기 전의 과정을 짐짓 놓쳐버릴 수도 있다. 고흐를 통해 그 과정을 다져 놓아서인지 이 책에서 그 흐림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어떠한 환경에 놓여있냐에 따라, 어떠한 시대에 살아가며 주변에 어떤 사람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성향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이 화가다. 모든 화가들을 이 조건에 결부시킬 수는 없지만, 르누아르 또한 그러한 변화를 뚜렷이 드러냈으므로 화가의 탄생에는 많은 것들이 시기적절해야 한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닫게 되기도 했다.

 

  그런 시기적절함을 만나지 못한 화가들도 많고, 시기적절했다 하더라도 더 큰 잠재력을 뚫고 오지 못한 화가들도 많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신을 뚫고 온 화가라고 생각한다. 마치 자신의 삶을 대변하듯 그림에 온 열정을 쏟은 그의 그림을 시대별로 나눠보면 뚜렷한 개성이 드러난다. 그의 화풍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모든 것이 순탄한 듯 보이다가도 건강에 이상이 있을 때는 조금씩 어두워지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한때는 인상주의의 화풍을 따라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기도 했지만, 인상주의가 시들해지자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며 자신을 자극시켜 줄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등 그림으로 자신을 내면을 표현해 내는 것에 진솔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붓 터치의 미세한 변화에도 여러 감정에 휩쓸리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가 그려낸 그림들과 변화시켜 가는 그림들 속에서 르누아르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 이면에 보이지 않은 아름다움과 인물들의 소리 없는 외침을 들은 것 같다. 그의 그림을 보는 내내 그런 이끌림을 끌어낼 수 있는 화가들이 현 시대에도 많이 나타났으면 하고 바랐다. 거기다 획일화된 시각 속에 갇혀 자유로운 내면을 표현해 내는 화가들이 묻히지 않도록, 넓은 시각을 가진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이 드러났으면 좋겠다는 조심스런 생각을 하며 르누아르와의 여행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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