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 발췌 지만지 고전선집 395
제인 오스틴 지음, 이미애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내게 가장 좋아하는 장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문학이라고 말한다. 구체적인 문학을 물으면 '19세기 러시아 문학'이라고 대답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문학의 분위기를 속 시원히 말할 수 없었다. 장르를 나눈다는 것도 경계가 모호했을 뿐더러 좋아하는 분위기를 감지할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구체적으로 찾아보려는 노력도 해 보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지인과 나누면서 내가 좋아하는 책의 분위기를 설명하자 순문학을 좋아하는 거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 한마디에 내가 모호하게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던 장르들의 갈림길이 정해지는 듯 했고, 좋아하는 분야를 뚜렷이 알게 되어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 사실을 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만지 출판사에서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관심이 갔다. 제인 오스틴의 명성에 대해서 익히 들었고, <오만과 편견>도 구입해 두었지만 아직 읽어보지 않아 그의 소설에 대해 할 말은 많지 않다. 번역 된 6권의 소설 중 <설득>을 먼저 선택했다. 순전히 서정적이라는 설명 때문에 선택한 것인데 책을 읽는 내내 그 분위기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고, 순문학을 좋아한다는 개인적인 발견에 충족시켜 주는 소설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다른 소설을 읽어보지 않아서 이 작품의 특징을 비교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무(無)에서 만나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스펀지에 물이 흡수되듯 내 안으로 흠뻑 들어왔다. 책의 분위기는 주인공 앤의 시선으로 담담하고 차분하게 써내려가면서도 섬세한 묘사를 잊지 않았다. 사건이 연이어 발생해도 크게 부각되기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서술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그 사실을 책의 초반부터 파악한 터라 지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중력이 좋을 때 읽으면 무척 서정적이지만, 그 반대일 때는 겉돌기 십상인 소설이었다. 그래서 깊은 밤 사위가 고요할 때 책을 펼쳐 들었는데, 의외로 잘 읽히고 묘사에 푹 빠져 현실을 잊을 정도였다. 앤이 가족 안에서 존재감이 없는 것처럼 나를 드러낼 필요 없이 관찰자의 입장에서 읽기 좋은 소설이었다.

 

  앤은 특별히 눈에 띠지 않는 존재였다.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여의고 허영심과 낭비벽이 가득한 아버지와 큰 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준남작이란 칭호에 무척 애달아했고, 언니 엘리자베스도 아버지와 만만치 않았다. 셋째 메리는 시집을 가서 다른 곳에서 살고 있었다. 허영심에 가득한 아버지 때문에 가족이 살고 있던 켈린치 홀을 떠나야 했다. 지출이 너무 많아 빚더미에 앉게 될 위기에 처해 해군 제독에게야 집을 임대하고 그들은 다른 곳으로 떠난다. 그러나 앤은 바로 식구들을 따라가지 않고, 어머니의 친구이자 조언자인 레이디 러셀, 동생 메리네 집, 다시 켈린치로 돌아와 바스로 이동한다. 공간의 이동에 따라 앤의 내면도 사건도 모두 달라지는데, 처음에는 그런 흐름이 굴곡이 있었지만 특별한 목적 없이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설에서 이 소설은 로맨스라고 했기 때문에 앤의 내면에 초점을 더 맞춰가며 읽어 나갔다. 

 

  앤은 8년 전 앤트워스 대령과 약혼을 했다가 주변의 만류로 인해 파혼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앤의 내면은 많이 닫혀 있었고, 한 번의 청혼을 거절하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섬세한 만들어간다. 그런 그녀 앞에 앤트워스 대령이 다시 나타났는데, 다름 아닌 켈린치 홀로 들어온 해군 제독의 처남이었다. 앤트워스 대령은 한 번의 결혼을 하긴 했지만 다시 혼자가 되었고, 어느 정도의 부도 거머쥐게 되었다. 그런 앤트워스 대령이 등장했으니 딸을 둔 부모들과 젊은 처자들도 앤트워스 대령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실제로 두 자매 사이에서 앤트워스 대령은 갈팡질팡 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본 앤은 혼란스러웠다. 그와의 대면이 어색하고, 그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마음 저편에는 그에 대한 애정이 싹트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했다.

 

  앤트워스 대령의 내면에 대해서 거의 드러나는 것이 없어 앤의 시선에 비춰진 그의 행동들로 추측할 수 있었다. 모호하고 우유부단해 보이는 그의 행동으로 앤은 8년 전 자신의 행동을 용서하지 않았음을 안다. 그리고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남자들에 대해 질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 시원히 대화할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앤이 공간 이동을 할 때마다 곁에 있거나 근거리에서 머물렀던 앤트워스 대령과 직접 대면했을 때, 앤트워스 대령이 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고 다시 돌아온 것이 앤 때문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많은 심경의 변화 가운데서 앤트워스 대령에 대한 애정을 확신한 앤 또한 기꺼운 마음으로 대령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둘은 행복한 결혼을 앞두게 된다.

 

  앤과 앤트워스 대령의 결합 과정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대부분 앤의 가족이나 친인척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그 안에서 앤은 서서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앤의 노력으로 인해서가 아닌 현실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통해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깨어 나오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앤트워스 대령과의 파혼 이후로 쭉 그를 사랑했다고 볼 수 없지만, 자신이 사랑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자신과 맞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관해서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성숙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8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해도 어찌되었든 앤과 앤트워스 대령은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이렇게 줄거리를 잡고 보면 그들의 사랑이 매우 구구절절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앤트워스 대령이 이 책에서 앤의 눈을 통해 비춰지는 모습은 큰 두각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앤의 생각을 엿봄으로써 그 시대의 상황을 추측해 볼 수 있는 모습들이 더 많았다.

 

  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여성에게 치명적인 미래가 있는 모습이 짙었다. 결혼이야말로 여성의 종착지이며, 훌륭하고 넉넉한 가문으로 시집을 가는 것만이 성공한 모습으로 비춰지는(이렇게 적고 보니 현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여성들이 많은 사회활동을 하고 주체적인 모습을 갖춰가지만, 결혼이 삶의 종착지로 비춰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결혼 자체로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의 부정적인 면을 보았을 때 드는 생각일 뿐이다.) 시대였다. 앤트워스 대령과의 결혼을 반대한 것도 그의 능력의 부족함 때문이었으니 앤이 그 경험으로 말미암아 자신 안에 갇혀 지낸 것도 어쩜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지만지 출판사에서 원본의 절반 분량으로 다시 출간한 책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책이 그다지 두껍지 않아서 좋아했었는데, 읽다보니 분량을 줄여서인지 곳곳에 흐름이 끊기고 어색한 부분들이 드러났다. 앤의 내면을 지켜보는 것이 흥미롭지는 않았지만 지루하지도 않았기에 완역된 책을 찾아서 한 번 더 읽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이 내가 만난 제인 오스틴의 첫 작품이기에 다른 작품들은 어떨지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가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오탈자

 

* 그녀를 일으켰지만 생기가 보이지 없었다. -> 않았다. <116쪽>

 

* 그렇지만 내가 엘리엇 씨에게 큰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하만 나를 그저 엘리엇 씨의 친척으로 생각해줘요. -> 다만

  <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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