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기다리며
츠지 히토나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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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츠지 히토나리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를 연애소설 작가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도 비슷한 분위기일거라 생각했다. 책이 좀 두꺼웠지만, 흡인력 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이기에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는 시간은 무척 더뎠고, 지금껏 만나온 그의 소설과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 소설로 인해 그에게 붙은 만능 엔터테이너라는 수식어를 부정할 수 없었을 뿐, 오랜만에 일본소설을 폄하하지 않으며 읽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일본 현대 소설은 가볍고, 남는게 없다는 인식이 깊이 뿌리 박혀 있기에 지극히 편안한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다. 최근에 읽은 일본소설도 그런 인식을 깨트려주지 못해 책을 대하는 나의 시선은 좀 시들했다. 얼른 읽어버리자라는 마음만 팽배했던 내게 <태양을 기다리며>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소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용이 묵직하거나 잘 읽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가볍다고 할 수도 없지만, 쉽게 넘겨버릴 수 없는 장면의 연속이었다. 소설이라기 보다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장면을 전환하는 것처럼 이어진 탓이었다. 전쟁 중인 중국의 난징,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의 히로시마, 뇌사 상태인 사람에게 펼쳐지는 세계 등등 시대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로 독자를 이끌었다.

 

  이야기의 조각을 잘 맞춰나가는 저자의 이끔을 따라가다 보면, 현재의 나를 잊게 된다. 한 권의 책속에 펼쳐지는 다양한 시대와 상황들은 나를 챙길 겨를도 없이 흘러갔고, 상황에 따라 이동하기 바빴다. 책의 시작은 영화 촬영 현장부터 시작된다. 천 명의 엑스트라와 감독, 스탭들이 촬영하기 적절한 태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을 다룬 영화였고, 이노우에 감독은 이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될 정도로 노쇠했다. 하지만 깐깐한 일처리 탓에 벌써 2주 째 맘에 드는 태양이 나타나지 않아 모두들 제작비만 까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술부 담당인 시로와 혼수상태에 빠진 형의 옛 애인이자 스크립터인 도모코가 그나마 이노우에 감독을 이해하고 있는 정도였다. 

 

  시로의 형 지로는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마약을 밀매하던 형은 공원에서 총을 맞았고 여지껏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로는 총을 맞기 전, 위험한 일에 몸담았던 듯 시로에게 계속 협박 전화가 걸려왔다. 자꾸 란도셀(에도시대 일본을 방문했던 네덜란드 군인의 군장 가방 란셀(Rancel)을 보고 제작하면서 유래된 일본의 어린이용 책가방)을 돌려 달라는 후지사와라는 남자의 전화는 끈질겼다. 형의 혼수상태만 해도 시로의 마음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데, 느닷없는 한 남자의 전화가 반가울 리 없었다. 형이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한 도모코에 대한 묘한 마음도, 영화촬영의 진전 없는 압박감도 벅차오르는데 그에겐 다른 사람들의 과거가 끊이질 않는다.

 

  시로의 현실을 제외하고 이 책에서 거듭되어지는 이야기는 많다. 이노우에 감독이 잊지 못하는 '훼이팡'이라는 여성의 이야기, 자신을 협박한 후지사와의 이야기, 후지사와의 아버지인 '크레이크 부샤르의 수기', 혼수상태에 빠진 지로의 세계 등 이야기의 갈래와 연결은 계속 이어진다. 이노우에 감독은 1937년 난징에서 보았던 태양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기억의 이면에는 '훼이팡'이라는 사랑하는 여성과 '난징 대학살'이 있었다. 후지사와는 미군 파일럿인 크레이크 부샤르와 간호사였던 레이코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으로 사망하기 전까지의 기록이 담긴 이야기가 '크레이크 부샤르의 수기'였고, 유일한 부모의 흔적인 셈이었다. 독특한 외모 때문에 더욱 더 외로운 삶을 살아온 그는 마약 밀매범이긴 하지만, '란도셀'의 행방을 찾기 위해 시로와 만나 자신의 삶과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 모두 들려준다. 혼수상태에 빠진 지로는 좀더 광범위한 세계에 머물러 있었다. 란도셀을 메고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책 속의 시대를 거리낌없이 이동하는 인물이다. 지로의 행동반경으로 인해 잠시 헷갈리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교묘하게 엮어주는 지로의 등장은 보통 사람이 닿을 수 없는 세계였다.

 

  이노우에 감독이 난징에서 보았던 전쟁의 참혹함과 훼이팡에 대한 기억, 크레이크 부샤르의 수기, 지로를 잊지 못하는 도모코의 내면에는 모두 '사랑'이 있었다. 현실의 안락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전쟁 속의 두 남자는 너무 처절했다. 사랑의 광기로 점철되다 비극으로 끝나는 훼이팡의 이야기는 감독이 평생 지고 온 죄책감이었다.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는 임무로 왔지만 부상을 당하고 원자폭탄에 의해 죽게 되는 크레이크 부샤르는 어떤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고, 한 여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의 씨를 남기고 싶어하는 마음은 수기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후지사와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하고, 아버지의 부탁을 위해 뉴욕으로 날아가지만 '수기'를 통해 아버지의 내면을 들여다본 탓인지 일련의 과정들이 마음 아팠다. 혼수상태에 빠진 지로의 기억 때문에 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도모코도 사랑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시로는 후지사와가 찾는 '란도셀'을 추적하다 형이 훔쳐낸 것이 '루즈 마이 메모리'라는 기억을 없애주는 신종 마약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시로가 그 마약을 훔쳐냈기에, 시로도 모르는 곳에 감춰뒀기에 후지사와는 난처한 입장에 빠졌고 그 수 많은 이야기가 어떤 결말을 만들어낼지 무척 궁금했다. 퍼즐을 맞춰나가듯 끝을 향해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순탄(?)했다고 해야 하나. 모두들 제자리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훼이팡도, 크레이크 부샤르도, 혼수상태에 빠진 지로도 자신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미 돌아가 있는 그들의 세계를 탐험한 듯한 꿰어맞춤을 읽었을지는 몰라도 여러 시대를 넘나드는 대장정은 그렇게 끝이 났다.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기억을 간직한 채(루즈 마이 메모리를 자신의 의지와 달리 복용하게 된 이노우에 감독의 기억은 어떨런지.).

 

  그제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다. 이미 흘러버린 과거도, 흘러가고 있는 현재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잠재해 있지만, 복잡한 길을 통해 제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다. 이노우에 감독이 그토록 찾아 헤메던 새로운 태양이 솟았으므로 그 빛을 향해 나아갔으면 한다. 기억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태양의 빛이 따스하게 비춰지길. 아픈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라도 꿋꿋하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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