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기록 - 시 소묘 사진 1956-1996
존 버거 지음, 장경렬 옮김 / 열화당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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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버거의 직업으로 거론되는 명칭은 너무 많다.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외에도 너무 많은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닌다. 한 인간이 이렇게 다방면에 능할 수 있음을 존 버거를 볼 때마다 느끼곤 한다. 그러나 그가 문학적인 면모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소설과 산문이었다. 산문에서 종종 그의 시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시집이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그의 주된 활동 영역에 시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데, 그래서 존 버거를 '시인'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은 것일 수도 있다고 옮긴이는 말하고 있다. 번역을 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옮긴이는 존 버거를 '시인'의 영역으로 들여 놓지만, 그의 시가 낯선 나에게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아픔의 기록>에 주로 실린 것은 시詩지만, 간간히 소묘와 사진이 보이기도 한다. 중간중간 감칠맛 나게 묶여있는 소묘와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소묘와 사진을 구경하다가도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은 존 버거의 시였다.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문학 장르가 '시'라고 생각하는 나는, 시를 좋아하지만 잘 알지 못한다. 한 권의 시집을 읽을 때 시 한편만 건져도 읽은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시인'이라는 표현의 적절 여부가 확실치 않은 존 버거의 시가 내게 어려웠음은 당연했다. 개인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시보다 읊었을 때 읽기 좋은, 운문이 맞고 정갈한 시를 좋아한다. 많은 시를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생면부지의 시인에게서 나온 괜찮을 시를 만났을 때 문학의 즐거움을 느낀다. 몇 번의 그런 경험으로 시집을 가끔 구입하지만, 존 버거와 비슷한 시를 만났을 때는 잠시 갖었던 용기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존 버거의 산문을 읽어 보았다면, 그의 깊이 있는 성찰에 감탄 혹은 난해함을 느껴 보았을 것이다. 그의 문체를 조금이나마 안다고 자부하던 나는, 산문에서 보았던 깊이를 시에서도 마주하자 당황하고 말았다. 이 책에 실린 첫 시 <길 안내>는 내가 발견한 존 버거의 가장 좋아하는 시라고 찜해놓을 정도로 명확한 안내를 해주었지만 말이다. 한 편의 시만 건져도 좋다는 평소의 다짐이 있었기에, 나머지 시가 어려워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언젠간 기회가 되면 다시 읽고, 새로운 느낌을 갖을 수 있을거란 느긋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길 안내>는 첫 연부터 나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열두 살 때부터 시를 썼다. 무엇이든 다른 것을 할 수가 없을 때면. 시는 무력감에서 탄생한다. 그러므로 시의 힘은 무력감에서 나온다.]
 
  지극히 단순한 고백에서부 시작해 시의 탄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고백에 마음이 동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시를 썼던 무력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때문이었다. 3연에 보면 '시는 사실事實앞에서 무력하다. (중략) 시는 결과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결정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않는다' 라고 했다. 시의 무력감과 시의 재료가 될 수 없는 '사실' 앞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고, '시는 우리 앞에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던 그의 시는 시작에 불과했다.
 
  옮긴이는 존 버거의 시를 번역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고 했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가슴이 절절해 지기도 하고, 깊은 감동을 받기도 했지만 역시나 자신이 옮긴 시에 대해 많이 자신 없어 했다. 그가 한 줄의 시를 옮길 때의 어려움에 대해서 피력하는 부분을 이해 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나에게도 그런 어려움으로 존 버거의 시가 다가왔던게 사실이다. 그의 첫 시는 내 마음에 깊이 와 닿았지만, 중간 중간 나의 역량에 맞는 시 몇 편을 발견하는 것 외에는 모호함과 낯선 세계의 배경이 된 시들을 마음껏 흡수하지 못했다. 일일이 시의 배경이 된 시대를 들춰서 공부 한 후 시를 읽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옮긴이는 공부를 하면서 시를 옮겼다.), 주석을 읽어 보아도 약간의 수긍이 갔을 뿐, 온전한 이해를 하지 못했다. 시를 읽는데 배경지식이 있다면 더 읽기 좋겠지만, 마음으로 읽을 때 시가 가장 와 닿으므로 낯선 세계로 여행하는 듯한 느낌 밖에 없었다.
 
  존 버거의 시들은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소재 또한 다양했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세월을 뛰어넘는 시들도 많았다. 일상을 노래하고,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며,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그의 시에서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은 감수성을 느끼기도 했다. 그가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은 그는 썼고(시를), 우리는 읽기만 할 뿐이라는 사실이 아닐까. 시를 읽는 시간 내내 공감하지 못하고 띄엄띄엄 존 버거의 마음을 읽었지만, 그와 함께 했던 모든 것이 좋았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낯섬, 이질감, 난해함, 색다른 공감 등 많은 감정이 지배했던 존 버거의 새로운(역시나 '시인'이라는 표현을 나 또한 어찌해야 할지 모르므로) 시와 함께 한 시간은 묘한 공감각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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