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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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도 봤고, 소설『시라노』도 읽었다. 그럼에도 원작은 희곡이기에 꼭 읽어보고 싶었다. 영화와 소설과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했고, 8년 전에 읽는 소설의 감정이 되살아날지도 지켜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희곡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니라 소설처럼 깊게 집중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희곡의 특징 때문인지 정신이 없긴 해도 생생함은 충분히 전해졌다. 이미 접한 이야기고 알고 있는 결말임에도 희곡은 마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생동감이 넘쳤다.


 

8년 전에 소설『시라노』를 읽었을 땐 짧은 연애가 끝난 뒤였고, 현재의 남편을 만나기도 전이었다. 그래서인지 시라노에게 완전 몰입해서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탓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이성과의 사랑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지금 접한『시라노』는 달랐다. 그 사이 나는 사랑의 쓴맛(?)을 본 건지, 사랑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버린 건지 시라노가 그저 답답했다. 그렇게 절절하게 느껴졌던 시라노의 사랑이 이렇게 달리 보일 수 있는지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아무래도 소설을 읽었을 때와 상황이 달라진 탓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사랑의 결이 다른 것뿐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유난히 코가 못생긴 인물로 나오는 시라노는 록산을 사랑하지만 직접적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하지만 시라노는 그런 이유보다 록산을 사랑하는 자체를 그저 자신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크리스티앙을 사랑한다는 록산의 고백을 듣는 순간부터 시라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처럼 혼신을 다해 그들의 사랑을 돕는다. 시라노에겐 그것도 록산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그의 마지막 고백을 통해서 어렴풋이 깨달을 정도로 나는 시라노에게 눈에 보이는 사랑만 강요했던 것 같다.

 

크리스티앙 대신 록산에게 진심 가득한 편지를 쓰고, 크리스티앙이 죽었을 때 진심으로 슬퍼하고, 그녀가 혼자가 된 뒤에도 오랜 시간 그녀의 곁을 지키고 그녀에 대한 마음이 한 번도 거짓인 적 없고, 변한 적이 없었던 사람 시라노. 옮긴이는 ‘결국 록산을 -동시에 관객이나 독자를-감동시키는 것은 잘생긴 외모나 재치 넘치는 말솜씨가 아니라 최후의 순간까지 지킨 사랑, 그리고 침묵과 헌신이다.’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시라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당당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자유의 정신을 실현한다.’고 했다. 그게 안타까움을 넘어 답답함을 느낄 정도였는데, 그렇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시라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실이 늘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가 그의 사랑을 부정할 것이며, 왜 다른 방법으로 사랑하지 못했냐고 탓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온전히 몰입해 사랑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럼에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록산과 이제 시작할 수 있는데 그의 생명이 끝난 버린 것이, 록산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또 잃어버린 것이 안타깝고 안타깝다. 시라노는 록산을 혼신을 다해 사랑해서인지 이상하게 마지막 순간에는 어떤 후회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제 막 시라노의 사랑을 알게 된 록산이 가여웠고, 시라노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그제야 록산의 남겨진 시간이 염려되었다. 사랑의 기억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감히 논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부디 시라노가 없는 록산의 시간들이 외롭지 않길, 쓸쓸하지 않기를 시라노의 걱정이 내게도 전해져왔다. 결국 시라노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나 보다. 나의 시선도 그가 사랑했던 록산에게 향해 있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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