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도의 아이스크림 천재영문법 1 : 백살 공주와 일곱 아이돌 - 영재로 키우고 싶은 우리 아이에게 꼭 필요한 미국식 영문법
이미도 지음, 최진규 그림 / Faust(파우스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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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올해 가장 잘 한 일은 몇 권 되지 않지만 꾸준하게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정말 몇 편 되지 않지만,  한달에  한 편 씩이라도 리뷰를 올린 것이다.  요전날 블러그에 어느 방문객이 댓글을 남겼다.  정말 `착실하게' 읽고 쓰고 계시네요... ` 착실하게'란 말에 방점이 찍혔다.   참, 듣기 좋은 말이다.

올해 내가 가장 못 한 일도 있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거창하고, 근사한 영어 공부 계획을 세웠다.  영어 학습 방법론에 대한 독서를 시작으로,  토익공부를 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어느 순간 영어책은 나와 멀어졌다.  생각해보니 매년 비슷했다. 연초에 계획을 세우고, 매번 영어공부는 다른 바쁘고 재밌는 일에 밀려, 중도 포기하기 일수였다.  

문제점을 분석해보니, 문제는 의외로 간단했다.   영어학습이 내 시간을 점유하도록 규칙적인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  영어학습은 싫어도 해야 하는 `공부'로 전락했던 것이다.  영어를 위해 내는 내 시간이 하기싫은 공부가 되자, 그건 의무로 추락했고, 결국  흥미를 떨어뜨렸다.  책읽기를 1년 내내 `착실하게' 해 왔던건, 책읽기가 일종의 공부이기도 했으나, 그건 재미라는 측면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책을 잡았고 거기엔 아무런 부담감이 없었다. 

문제는 그러니까, `재미'라는 것!   재미있으면 하기싫어도 하게 된다.  맛있으면 먹기 싫은 약도 먹게 된다.  그래서 몸에 좋은 약을 먹기도 좋게 만들기도 하잖은가?   내 영어공부의 특별한 처방전은 바로 시간이 조금만 남아도 책을 잡는 습관처럼,  그게 의무가 아니라 `즐거운 놀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새해에는 그래서 딱딱하게 영어 공부를 하지 않을 작정이다.  영어공부를 재미있게 하는 방법을 먼저 궁리해 보겠다.  

유명한 외화 번역가인 이미도씨가 최근에 펴낸 만화 영문법 책, <이미도의 아이스크림 천재 영문법>은 내 영어공부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떤 힌트를 제공해 준다.  우연하게 저자 친필 사인본을 증정받았다.  마침, 12월은 올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물론, 올해 실패한 영어공부에 대해 반성하고 있던 찰라 내 손에 들어온 이 책은 뜻밖에도 그간의 내 오랜 영어학습의 오류를 수정하는 계기가 될 듯 하다. 

물론, 이 책은 어른들을 위한 책은 아니다.   이제 영어공부에 입문하는 초등학생에게 미국식 영문법 학습 방법을 흥미있는 만화를 곁들여 설명하려 한 책이다.  제 1 권 백살공주와 일곱 아이돌이란 제목에서 보듯이,  아이들에게도 익숙한 에니메이션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것을 패러디하고, 살짝 비틀어서,  영어공부와 창의적 사고의 연습이란 두가지 목표에 아이들이 무리없이 안착하도록 이끄는 책이다.   왠 영문법에 아이스크림이냐 ? 

" <이미도의 아이스크림 천재영문법>의 제목에서 아이스크림의 영어는 Ice Cream도 되고, I Scream도 됩니다. I Scream for Ice Cream의 문장이 잘 보여주듯이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들고는 기분이 좋아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는 뜻이 녹아있지요. "  이미도,  - 작가의 말 

제 1 편 영문법 Introuduction 에서는 앞으로 시작될 본격적인 영문법 학습에 앞서,  만화의 등장인물들을 소개하고, 이 책이 나아갈 방향을 해설하고 있다.  최진규 씨의 재미있는 그림은 독자에게 미국식 영문법 습득이라는 목표를 알게 모르게 감추면서도,  영어 공부에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앞으로 나올 시리즈가 무척 기대되는 책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기획자는 영어공부의 가장 큰 방해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음을 주지해야한다.  재미와 학습을 조합한다는 것,  한번 잘못들이면 영원히 공부라는 재미없는 벼랑으로 떨어질 수도 있을 영어공부에 흥미를 불어 넣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줄만한 책이다. 

성인인 나도 영어공부는, 공부일 뿐이었다.  만약, 그것이 재밌었다면 능률은 몇 배 더 늘어났을 것이고, 내 영어실력은 일취월장 올 한 해 순풍에 돛단배 같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에서 영어실력은 평생 한 인간을 따라다니며 스토킹하게 마련이다.  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직장에서도 영어실력이 좋으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는다.  영어실력은 대한민국에서 허리펴고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한 자신만의 필수 무기가 된지 오래다. 

반성하고, 새해부터는 흥미와 학습이란 두가지 요소를 잘 조합해서 영어실력 배양에 나서리라.  단, `재미'있게 공부하리라.  올 한 해 책읽기와 글쓰기 측면의 성공을 영어학습이라는 영역에 응용하고 싶다.  그것의 핵심은 `재미있게'하는 것이다. 




2009.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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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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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년만에 알랭 드 보통의 책과 다시 만났다.  일년 전 여행중에 읽은 보통의 책은 그의 <여행의 기술>이었다.   여행한다는 것의 의미를 내게 새롭게 인식시켜주었던 그의 이 책은 일년이 다 되었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세상이 아는 만큼 보이고,  생각하는 것만큼 풍요로울 수 있다는 교훈을 그는 가르쳐주는 작가다.   쉽게 지나칠 수 있을 삶의 장치들에 그는 예사롭지 않은 시선들을 던진다.  그래서 그는 일상의 철학자라는 애칭을 부여받았다. 

보통처럼 생각하고, 보통처럼 느낄 수 있으려면 좀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겠단 생각을 했다.  아니 그것은 선천적인 직관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세상을 작가의 눈과 감성으로 바라볼 때, 세상이 좀더 넓고 깊이 보인다는 진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은 이 무딘 일상이 권태로움과 반복성, 가끔 엄습해오는 지겨움과 슬픔만이 있는게 아님을 설파한다.  그 반대편에는 무한한 신비로움, 낯섬과 설레임, 그리고 기쁨이 있음을 주지시킨다.

알랭 드 보통은 신간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일의 본질을 해명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건, 이 세상의 무한한 일터를 직접 목격하고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항구의 화물선을 바라보다 물류 현장의 트럭 속에 동승하며, 비스킷 공장의 맛있는 업무를 훔쳐보며, 로켓이 쏘아지는 발사대의 긴박한 현장을 함께한다.  화가의 난해한 작업과 회계 사무소의 분주함을 직접 체험한다.   현대인의 일상과 일, 그것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종다양한 직업 현장과 그들의 평온한 가정에 몇 주, 아니 몇달 작가의 시선과 사진가의 카메라를 들이밀 생각을 누가 했겠는가?  이 책은 의외성과 발견이란 보통다운 글쓰기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신선하고, 재미있다.

일이란 생계 수단이자, 인간에게 안정감을 선사하는 가장 주요한 수단이다.  더불어, 삶은 곧 일과 일의 연속이란 진실을 우린 회피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일은 단순히 하나의 의미로 고정시킬 수 없는게 아닐까?  현대인은 일과 휴식을 명확히 구분한다. 그 둘을 명확히 구분하는 사람일수록 일을 지겹고, 괴롭게 바라보는 성향이 짙을 수 있다. 행복한 직업인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일과 휴식의 경계선은 옅어야 한다.   즉,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분야를 생계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직업인이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는 좋아하는 취미가 직업이 되는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 선언한 적이 있다.

그러나 세상엔 취미가 직업이 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람들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관계없이 자신에게 부여받은 일을 묵묵히 수행할 때 세상은 유지될 수 있다.  길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는 청소가 취미일 수 없다.  고속도로의 톨케이트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보면, 하루종일 수천명을 상대로 똑같은 표를 끊고 있다.  버스 운전기사는 하루종일 같은 노선을 반복해 운행해야 한다. 대개 일상에서의 일이란 이렇게 단순하고, 반복적인 것들이 많다.  이러한 일의 반복성에서 우린 어떻게 일의 슬픔이 아닌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까? 

" 할 일이 있을 때에는 죽음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금기라기보다는 그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일은 그 본성상 그 자신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면서 다른 데로는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일은 우리의 원근감을 파괴해버리는데, 우리는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에 감사한다."   p.364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많은 직업군을 탐색한 후 알랭 드 보통이 내린 일에 대한 명상은 비교적 싱거운 것이었다.  일은 우리에게 달콤한 휴식을 제공하며, 일은 끝없는 불안을 잠재워줄 것이며, 인생의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고, 보통은 결론짓는다.  그러나 농담이라도 사람들은 로또에 당첨이 되면, 자신의 직장부터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한 사람들의 행위란  일이 지금껏 안겨준 품위있는 피로와 안정감을 배신하는게 아닌가?  일이 시시때때로 사람에게 다른 의미를 선사한다는 건, 일이 가진 고정적인 개념을 우리가 정의할 수 없다는 난처함을 대변해주는건 아닐까?  

일에 대한 명상을 담은 이 책을 읽으며,  오히려 알랭 드 보통의 작가로서의 직업이 무척 부러웠다.  사물은 멀리서 보면 무척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가까이 다가갈 수록 사물의 얼룩과 때가 선명하게 잡힌다.  "체험 삶의 현장"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라.  누구하나 불평 불만이 없다.  흘리는 땀방울과 뒤집어쓴 먼지, 일그러진 표정 어디에도 불만족스럼보다는 삶에 대한 기쁨과 감사, 낯선 체험에 대한 신비감과 설레임이 묻어있질 않은가?   알랭 드 보통이 한 권의 책으로 풀어낸 일에 대한 철학적 명상은, 내게 몹시도 한가한 놀이처럼 여유롭게 보인다.

이 책은 1년전 읽은 <여행의 기술>보다 덜 인상깊었다.  그러나 보통식 글쓰기의 매력은 여전하다.  지리적,민족적 거리감이 있긴 하지만, 독자와 보통은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동질감을 공유하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은 이 동시대의 동질감, 현대 문명의 문제점에 대한 공유를 바탕으로,  공감가는 책 한 권을 집필해 냈다.  한 작가의 다른 책이지만, 낯익은 뭔가를 독자는 발견해 냈을 것이다.  책을 펴면,  작가가 보인다.  그의 문체와 글쓰기는 일에 대한 현대인의 기쁨과 슬픔을 잘 포착해 냈다. 비록 그것이 평범한 것일지라도, 낯익어서 시선두기를 포기하는 것들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은 낯선 시선 두기를 거두지 않는다.  이 책의 가치는 바로 그것이다. 





  

200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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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09-11-25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물원에 가기>를 읽고 보통은 제게 더이상 보통이 아닌존재가 되어버렸어요. 기회가 되는대로 책을 모으다보니 이제 읽는 일만 남았는데 이 책 역시 개츠비님 덕분에 추가해 둡니다. 고맙습니다.

개츠비 2009-11-27 08:04   좋아요 0 | URL
모든 독서는 궁극적으로 전작주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 작가에 대해 수권의 책은 읽어야 그를 읽었다고 할 수 있겠죠. 반딧불이님은 저와 독서취향이 비슷한가봐요. 좋은 작가와 글에 대한 안목 때문일까요? ^^
 
슈퍼라이터 - 대한민국 베스트 여행작가들이 공개하는 여행.글.사진의 트리플 노하우
박동식 외 지음 / 시공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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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우리 삶의 블루오션은 지천으로 널려 있다.  그 블루오션에서 황금을 건져올리는 것도 조그만한 용기에서 시작된다.  타고난 재능이나, 풍부한 자금도 그리 중요치 않다.  삶은 단순한 것이다.  특히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여행자에겐 용기는 선택이 아닌 필수적 지참물이다.  여행기를 읽을 땐 항상 생각한다.  언젠가 나도 떠날 것이다.  주문처럼 마음 깊숙한 곳에서 새어나오는 다짐은 매번 똑같다.  그러나 나는 아직 떠나지 못했고, 언제 그들처럼 용기있고, 자유롭게 배낭을 꾸릴 수 있을지, 여전히 미지수다.  그러고서 칸트처럼 일평생 자신이 살았던 마을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음을 상기한다.  중요한 것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남으로서 우리가 얻게 되는 무엇이 아닐까?

<슈퍼라이터>는 4명의 여행작가가 자신이 걸어온 여행을 기록하고, 찍는, 작가로서의 삶을 소개한 책이다.  여행은 직업인에겐 휴식의 개념이긴 하지만, 그들에겐 첫째 의미가 생계수단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  우리의 일은 재밌거나 즐거워서 하는게 아닐 수도 있지만, 그들은 여행을 좋아하고 그것을 통해 생을 꾸린다.  더군다나 자신의 일을 모두 다 사랑하고, 더 잘 하고 최고가 되기 위해 모든걸 걸고 노력한다.  싱거운 월급쟁이 직장인이 상상할 수 없는 일과 삶이다.

여행작가, 여행가, 포토그래퍼, 등 이들의 직함은 그럴 듯 하게 세련되고, 멋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나니 그게 몹시도 피상적인 느낌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화려한 직함과는 다르게, 그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름 처절한 노력과 삶을 견뎌내고 있기도 하다.

글로벌 경제위기와 신종플루 여파 전까지  우리 국민의 해외여행은 국가 무역적자에 일조할만큼 붐을 이뤘다.  이제, 누구나 `쓸 만큼의 돈, 머물 만큼의 시간, 떠날 만큼의 용기'만 있다면 해외 여행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산다.  외국을 드나드는 일은 더이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만큼 희귀한 체험은 아니다.  그러니 경쟁이 이곳에도 움트기 시작한다. 

블러그 등 개인 미디어의 발전으로 이제 인터넷에는 수많은 국내,국외 여행기와 사진들이 넘쳐난다. 진정 여행작가로서 살아가는 이들에겐 이러한 붐 자체가 그리 반가울 것도 없다. 여행기 출판 시장은 좀 더 벽이 높아지고, 컨텐츠의 충실성과 독창성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그 비좁은 업계에서 이들은 자신만의 색깔과 개성, 열정을 바탕으로 여행작가로 당당히 이 시대를 걸어오고 있다. 이러한 배짱과 용기가 바로 평범하게 똑같은 하늘밑에 갖혀 살아가는 우리와 여행작가들을 가르는 차이점이다.  비록, 경제적인 궁핍함을 예상하면서도 그들의 삶이 부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책에는 4명의 여행 작가들의 삶과 역경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리 큰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때론 불안정한 미래가 걱정되기도 하다고, 토로한다.  일이 곧 여행인 이들 작가들에겐 여행지가 그들이 생과 맞닿아 치르는 험난한 싸움터가 되기도 한다.  여행지에는 예상키 어려운 수많은 난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 모든 것들에도 그들을 여행작가로 살아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그것은 천성적인 방랑기나 평생 한곳에 정착하지 못할 역마살의 기운인가 ?  이들 여행작가 4명은 여행을 위해 잘 나가던 직장을 포기하고, 안정된 생활에 대한 미련을 일찍 버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때론 떠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돈이 모이면 다시 모든걸 팽개치고 배낭과 카메라를 챙긴다.  여행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찾은 가장 훌륭한 직업이며, 생계 수단이다.  쓸만한 직업과 생계수단은 때론 목숨과도 같은것이기에, 그것과 맞바꾼 자유로운 삶은 얼마나 크고 높은 가치를 지닌것인가? 

"하지만 여행이 깊어갈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아파트 평수나 연봉이 아니라 매 순간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일에 가치를 두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선명해졌다. 사람들이 정한 시간표에 꼭 맞춰 살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직업이 되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 시작할 때 이미 내 발은 그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슈퍼 라이터>, p,163, 조현숙

여행작가는 빛좋은 개살구인가 ?   누구나 현재의 직장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대개의 일상이란 인간을 기계 부속품의 일부분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기계란 반복해 돌아가야 하는게 첫째 매카니즘 아닌가?  찾아온 휴일,  찌든 피로에 정신줄 놓다보면 정작 늦은 브런치를 먹고, 내려앉는 하루 해를 안타깝게 지켜보아야 한다.  그것이 직장인의 평준화된 자화상이다.  우리는 자유, 즉 시간을 팔아 빵을 살 돈을 번다. 요즘같이 제대로 된 직장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운 시절은 여러가지 불안감이 직장인을 엄습해온다.  여기서 밀리면, 벼랑인데 라는 일종의 공포증이 직장인의 자유를 좀더 좀먹고 있는 시절이다.

그러니 자유로운 정신을 추구하는 작가들에겐 직장인이야말로 빛좋은 개살구다.  그들에게 여행은 생을 숨쉬게 하는 공기같은 것이다. 공기없이 인간이 살 수 없듯이, 그들에게 여행은 오래된 외투처럼 몸에 맞고 즐거운 생의 도락이다.  이 책에 소개된 4명의 여행작가는 하나같이 경제적 여유를 누리고 있진 않다.  허나, 자기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둔 세상에서 직업만족도가 가장 높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 만족도는 직업뿐만 아니라 생의 만족도 높일 것이다.  부러울 수밖에.

내 방에는 두 대의 카메라가 놓여 있다.  큰 맘 먹고 샀던 캐논사의 DSLR 카메라와 똑딱이 디카. 아무래도 저들을 볼 때마다 미안하다. 주인을 잘못만나 제 역량을 맘껏 발휘해 볼 기회도 찾질 못하고,  방 한 구석에 쳐박힌지 기삼년이다.  이 책에 수록된 저 이국의 사진들을 바라보며, 내 카메라에 미안한 감정이 가득하다.   여행작가의 손과 눈, 발이 합심하여 잡아낸 풍경과 인물들을 쳐다보며, 생이 이렇게 아름답고 다채롭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 사진들을 보면 이들이 여행에 생을 내맺긴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된다.   내 삶의 터전인 이 도시 근교에는 전국에서 발품을 팔아 올만한 관광지들이 넘쳐난다.  문화와 역사가 오랜 시간의 세례를 받고, 그 자체로 빛을 발산하고 있는 저 보물같은 풍경들에도 나는 한참을 무심했구나. 

"몇 년만 더 다니면 해외 지사에 파견 나갈 수도 있었고 평상시에도 할인표가 나와서 여행하기에는 정말 좋은 직장이었다. 몇 달을 망설였으나, 결국 사표를 내기로 결심했다. 즐기고 돌아오는 짧은 여행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사건들이 매일 매일 축제처럼 터지는 `삶의 모험'을 원했기 때문이다."  <슈퍼 라이터>, p,314, 이지상

이 책의 제목이 왜 슈퍼라이터Super Writer일까?  여행작가로서 글과 사진 모두에 능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떠날 수 있듯이, 누구나 여행작가로 살아갈 수 있다.   꼭 직장을 내팽겨쳐야 하는건 아니다. 전업작가로 클 만한 능력이 되지 못하더라도, 여행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화려한 왕관을 씌어줄 것이다.  현실이 고달프다면, 여행은 그 여행지에서 만난 삶또한 고달프기 마련이란 진실을 알려줄 것이다.   이 책은 내게 용기를 건내준다.  이 4명의 열혈 여행작가님들의 패기와 자유의 정신을 수혈받는 기분이었다. 이 책이 내 옆구리를 찌른다.  휴일날 브런치는 그만먹어야 겠다.   블러그와 성능좋은 카메라 그리고 내 사랑스런 애마가 저 아파트 주차장에 하루종일 버려져 있다.   흰 색의 차 윗 본넷에 붉은 낙엽이 스잔히 휫날린다.  아, 보기 민망하구나.

4명의 여행가, 사진가의 열정적인 여행 작가로서의 삶을 체험하는 소중한 기회,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생이 이렇게 아름답고 생기로울 수 있나를 깨닫게 해준, 이 평화롭고, 권태로운 일상에, 한 명의 구원투수처럼 나타난 이 책을 칭찬해주고 싶다.   프로 작가들의 글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열정, 성실함, 열혈인생에 훌륭한 사진들까지 보고 느낄게 많은 책이다.  



2009.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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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2 - 7月-9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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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이렇게 두꺼운 소설책을 읽은 적이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이후, 내가 읽은 책 가운데 페이지 수로만 1000 페이지가 넘기는 처음이다.  물론 분량으로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마침 이 책의 광고문구는 작가의 나이를 고려한 듯,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을 썼던 도스토옙스키의 나이에 하루키가 이르렀다고 언급한다.   이 두 소설은 단순 우열을 가늠하기 어렵겠지만 비교할만한 게 못 된다.   19세기 러시아 소설가는 묵직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다.  인간과 신, 그 사이의 구원의 문제를 다뤘다 .  큰 스케일,  거대한 서사, 치밀한 전개, 그리고 환상적인 기법은 보이지 않는다.  21세기 일본의 소설가, 하루키의 신작 <1Q84>에서 우리는 거대한 서사도, 치밀한 전개도, 현실을 굳게 짚고 있는 우뚝한 리얼리즘도 발견키 어렵다.  

그러면 이 소설은 왜 일본에서 수초에 한 권씩 팔려나가는 걸까?  <상실의 시대>이후, 또다시 불고 있는 일본과 한국(그외 세계?)의 하루키 열풍의 정체는 뭘까?   10억이란 통큰 선인세를 지불할만큼, 이 작품은 대단한 걸까?  소설을 꾸준히 읽어왔지만 나는 하루키라는 작가와 그리 친숙하지 않다. 10여년전 <상실의 시대> 바람이 불었을 때, 나또한 그의 작품을 읽었었다.  약간 가벼운 붓터치에 가깝게 소설을 쓴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의 스타일, 그의 이야기에 크게 매료되진 못했다.  아마도, 소설을 막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을때여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상실의 시대>에서 하루키가 차용한 무대 장치는 내게 가볍게 보이기조차 했다.  나는 그때 한창 서양 고전에 심취했었다.  그가 작품의 후반부에 설정한 깊은 산속 요양원의 배경은, 내가 그 시절 흠뻑 빠져 읽고 있었던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의 중심무대인 사나토리움을 그대로 옮겨온 하나의 짝퉁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키는 이 소설의 후기에 이것을 밝힌다. 

그 이후, 군대에서 나는 다시 하루키와 만났다.  군대의 서가에는 약 100권의 서적이 자리하고 있었다. 때가 타고, 찢어지고, 상태가 좋지 않은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책을 읽은 이들이 없었던 군대 환경, 누구도 신경쓰지 않던 서가에서 나는 하루키의 단편집을 발견했다.   하루키를 <상실의 시대>라는 작품보다 높게 평가한 것은 바로 그 단편들을 읽으면서였다.  그 이후, 10여년 동안 내 안에 하루키는 그저 <상실의 시대>로 유명해진 일본작가라는 고유명사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2009년 곧바로 대중의 선호에 휩쓸려서 자연스럽게 그의 신작 <1Q84>에 이르렀다.  그러니, 나는 하루키 마니아는 아닌 것이다.   제목조차 특이한 이 책을 `아이큐IQ84'로 한동안 착각했다.  이제는 그를 차분히 읽을만한 환경에 이르렀다, 는 생각이 들었다.  10여년 전보다 내 환경은 평온해지고 침착해졌다.  청춘의 불안감이나 조급함이 사라진 채, 이제 여유를 갖고 읽는 하루키는 어떤 분위기로 나를 맞이할까?  설렘으로 책장을 폈다. 

<1Q84>의 서사는  복잡하게 베베 꼬인듯 하면서도 속살을 파고들면 매우 단순하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이 소설의 두 주인공이다.  아오마메는 킬러고, 덴고는 작가다.   킬러와 작가라는 직업은 그들을 먹여살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또다른 직업을 갖는다. 아오마메는 일종의 스포츠 안마사, 덴고는 수학강사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공유한다.  덴고와 아오마메가 초등학교 시절, 한 교실에서 손을 잡았다는 것, 그 감촉의 기억이 서른살 남짓한 나이를 먹도록 그들의 기억속에 잠재돼 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손을 한번 잡았지만 그것이 영원한 사랑으로 각인된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이지만 무척 현실적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강렬하고, 그게 사랑이란 감정이라면 평생을 갈 수도 있기에.   이들은 어느 순간 1984년이란 현실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1Q84년이란 의문의 세계에 공존한다.  그 현실 세계와 1Q84년을 가르는 특이점은 하늘에 달이 두 개 떠 있다는 것이다.  

달이 두 개 떠 있는 세계의 이야기는 소설 속 또다른 이야기인 <공기 번데기>란 작품과 혼합되면서 다소 환상적인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달이 두 개 뜬 세계를 보는 사람들이 덴고와 아오마메를 비롯한 소설 속 인물들이다.  그들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어느 순간 1Q84년이란 시간속으로 인도된다.  그러나 작가는 1Q84년이 가진 의미를 정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이 환상적 공간에서 신비감을 발산하고 있는 인물들인 `리더'와 `리틀 피플'의 공상적인 초능력과 기괴함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작품 내 또다른 소설  <공기 번데기>의 세계가 현실 세계에서 힘을 발휘하는 꼴이다. 그 소설의 기괴한 인물들이 현실의 이야기속에 나와 그대로 두 개의 스토리가 합류한다. 상상한 세계, 즉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한다.  그러나 명확히 그 둘이 어떻게 연결되는것인지, 작가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설명을 안 해 주면 모른다는 건,  말하자면 아무리 설명해 줘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덴고 아버지의 독백, <1Q84>2 , 무라카미 하루키

덴고 아버지의 독백은 그대로 작가의 독백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분석하겠다는 입장을, 독자는 어느 순간 포기해야 한다.  편집자 고마쓰의 비아냥처럼, 평론가들은 덴고가 리라이팅한 작품을 17살 소녀의 비범함인냥 칭송할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1Q84년의 난해한 서사를 수학공식처럼 풀이하려 달려드는 시도에 대한 작가의 경고처럼 들린다.  아무리 비상한 머리로도 이 소설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상형문자를 오랜시간 눈이 아프도록 쳐다보고 자기 나름의 해석을 내놓는 일처럼 무위하다.   그러면 10여년 만에 다시 조우한 하루키에게 나는 또다시 실망하고 만건가?   답은 놀랍게도, `아니다 였다.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을  잘 꾸려진 서사에 두는 태도는 내 미천한 소설 읽기의 오랜 습관이다.  이 습관은 하루키의 일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텍스트를 훑는 의식에도 그대로 살아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장엄한  서사의 고리를 형성시키지 못했음에도, 이 소설의 일천여 페이지가 전혀 무위하게 길단 느낌이 들진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하루키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각개 약진적 힘 때문이다. 전체를 놓고 보자면 몹시도 난해한 이야기지만, 하루키는 1,2 권 각개 24장 씩, 전체 48장을 채우고 있는<1Q84>의 장들 하나 하나가 단편 소설적인 밀도와 충실성을 담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집중력이다.  말하자면 서사의 빈약함을 하루키는 특유의 내밀한 문체와 묘사의 충실성,  각 장의 단독적인 스토리의 밀도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고마쓰는 말했다. `덴고, 이렇게 생각해 봐. 독자는 달이 하나 떠 있는 하늘은 지금까지 수없이 봤어. 그렇지? 하지만 하늘에 달이 두 개가 나란히 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적은 없을 거라고. 대부분의 독자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것을 소설에 끌어들일 때는 되도록 상세하고도 적확한 묘사가 필요해"  <1Q84>2, 무라카미 하루키 

마치 소설 쓰기의 비법을 전수하려는 듯, 하루키는 이런 문장들을 심심찮게 이 소설속에 흘려 놓는다.  남자 주인공 덴고는 마치 하루키의 전신을 보는 듯 하다.  또한 출판계와 작가, 편집인의 관계를 그리며, 그는 그 시장의 관습들을 고발하고 은근히 비튼다.  그는 수학 강사로 일하며 시시때때로 장편 소설을 쓴다.  그에게 `공기번데기'의 리라이팅 작업을 맡긴 고마쓰라는 인물은 `공기 번데기'를 통해, 평론계를 조롱할 목적을 갖고 있다.  소설은 그 분량만큼 다채롭고 풍성하다.  직접적으로 사회적이고 시사적인 문제를 고발한 것은 종교집단의 추악성을 소재로 삼았다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통해 하루키는 시사성이나 사회적 이슈에 대한 고발 차원의 목적성을 두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작가는 달이 두 개 떠 있는 세계로 독자를 완전하게 데리고 가는 것, 자체가 목적인 듯 보인다.  하루키는 독자가 1Q84년의 시민권을 하나씩 나눠갖길 희망한건 아닐까?  책장을 열면, 독자의 현실은 보이지 않고 오직 1Q84년의 덴고와 아오마메가 존재하는 세계로 독자가 온전히 몰입되도록 하는 그의 능력은, 날고뛰는 소설가들의 세계에서도 그리 흔치 않는 하루키만의 비범함이다.  그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그의 소설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놀라운 재능이다.

통일된 서사로서 이 소설은 정돈될 수 없다.  이 소설은 본류의 스토리와 액자소설의 스토리가 합류하고, 섞이면서 몹시도 난해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종교단체를 이끄는 `리더'나 공기 번데기와 리더를 배후조종하는 `리틀피플'의 정체가 무엇인지,  시원스레 파악할 수 없다.  소설의 끝에 이르렀을 때, 아오마메는 죽음을 선택하고,  덴고는 아오마메를 찾고자하는 의지를 피력한다.  이것만 놓고보면 결말또한 모순이다.  두 연인의 끝과 시작을 동시에 피력하는 마무리는, 아무리 봐도 이 소설의 서사처럼 합리적이라 볼 수 없다.  그 뒷이야기를 기대하는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하루키의 뒷 이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2권 만으로도 이 작품은 완전하게, 새로운 하나의 세계, 달이 두 개씩 떠 있는 4차원의 세계, 그 생경함과 낯섬으로 충분히 완전한 세계를 창조해 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소설읽기의 가장 큰 즐거움을 누렸다.  이것은 <1Q84>가 독자에 제공하는 충분한 선물이다.

소설은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가장 사실처럼 이야기할 때, 독자는 호흥한다. 하루키는 <1Q84>를 통해,  이 세계의 작가와 독자에게 소설 쓰기의 작법을 교수한다.  난해한 서사를 통해서 그러나 가장 순수하고, 절박한, 젊은이의 사랑을 창조해 낸다.  그의 놀라운 붓터치를 통해, 난잡한 포르노 영화가 한 편의 예술 영화로 창조되는 듯한 장면을 우린 이 소설의 곳곳에서 발견한다.  `리더'를 살해하는 장면에서는 등장인물의 숨소리와 땀냄새까지 느낄 수 있는 긴장감과 리얼리티가 전해온다.  고양이 마을의 일화나 달이 두 개 뜬 세계를 이야기할 때의 묘사는 적확성의 최고 단계를 이미 초과한 경지를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그의 능력은 보이지 않는 세계,  오직 작가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현실보다 더 현실다운 세계의 진실을 이야기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1Q84는, 내게 소설 쓰기의 진수를 깨닫게 한다. 

하루키 신드롬이 불면서 한동안 우리 작가들이 하루키적 글쓰기를 따라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들었다.  모방은 창조의 시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모방을 나쁘게 보진 않는다. 그러나 하루키적 글쓰기는 하루키에게만 어울리는 방식이라 생각된다.  널리 유통되는 글쓰기론 자신의 색깔을 만들 수 없고 독자의 흥미도 끌어낼 수 없다.  선인세 10억을 주고 수입하는 문학에 왠지 모를 서글픔이 앞선다.  우리 문학계에, 왜 하루키가 없는가?   작품이 아니라 그 이름만으로 선인세를 줄 만한 작가를 우린 왜 키우지 못했는가?   이 가을, 다시 찾아온 하루키 신드롬에 부쳐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똑같이 독자에게 물어야할 질문이 될 수도 있다.  하루키를 읽으며 잘 쓰여진 소설이란 무엇이며,  문학의 효용은 대체 무엇일까 생각한다.  지금 우리의 작가들은 그를 읽으며  무슨 생각에 빠져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2009.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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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10월
평점 :
품절


일본 작가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을 읽다가 얼굴이 뜨거워진적이 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문장에 이르렀을 때다. 

"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도둑질을 한다거나 거짓말을 하는 그런 것이 죄가 아니었다.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 "

우리는 작은 것에  감동하지만, 또한 사소한 것에 상처입는 존재다.   매일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면서 우리는 실수나 고의로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때론 맨정신에 때론 술기운에 모르는 척.  그러나 이런 경우도 있다.  작정하고 상처를 주려하는 상대에게 그에 맞서 대응하지 않을 때, 우리가 내뱉은 잔인한 말이나 무례한 행동의 잔상은 그대로, 자신의 귀나 자신의 눈빛 속으로 반사되어 사라진다.  그럴때 고통받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내면의 악마, 곧 자신이다.

아무리 담대한 사람도, 내면의 어느 부분에 감추어진 여린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때론 이용하는 나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나는 그 여린 감성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한다.  그 결정체는 바로 눈물이 될 것이다. 

이 가을날에 한 때 사랑이란 말을 공유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이것은 몹시도 난처한 호기심이다.   컴퓨터의 비상한 검색기능은 난처한 호기심을 푸는데 그만이었다.  그런데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들의 상태 아이콘은 오늘 모두 `행복' 아니면 `사랑'을 부르짖고 있었다.   나는 왜 쓸데 없이 그 공간에 침범했을까, 내심 민망하고 부끄럽다.   이 불청객은 얼굴을 붉히며 애써 다른 곳으로 급히 마우스를 움직인다.   아, 기억이란 질기고 모진 것이다.  그러나 추억이 어찌 아름답기만 하겠는가?    가끔, 그들도 나처럼 이런 쓸데없는 환영에 사로잡힐 때가 있을까?   

아사다 지로의 소설집 <철도원>은 가을날 읽기에 참 좋은 소설이다.  진정한 문학의 힘은 공감에서 나온다.  나를 공감으로 이끄는 이 작가의 놀라운 문체와 상상력은 내 안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다.   이 소설집에는 <철도원>外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철도원>과 <러브 레터>는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영화화 된 작품이다.  철도원은 그 이름 그대로, 러브 레터는 <파이란>이란 제목을 달았다.  흐릿한 내 기억속에 <철도원>의 장면들이 있다.  눈덮인 간이역에 기차가 들어오고,  철도원 오토마츠가 깃발을 높이 들며 기차를 맞이한다.  그러나 원작을 읽지 않고, 어느 비디오방에서 보았을 법한 이 작품에 대한 감동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무래도 건성건성 영화를 본 듯 하다.

그러나 작품으로 읽는 <철도원>의 감동은 남달랐다.  일본 철도의 민영화 과정에 채산성이 없는 호로마이선은 곧 폐지될 예정이다.  오래도록 호로마이 역의 역무원이자 역장으로 일해왔던 오토마츠도 이 역의 폐지와 더불어 정년퇴직을 맞이한다.  이 역과 선로는 오토마츠의 삶 자체였다.  딸아이와 아내를 이 역에서 떠나보냈다.  그러나 홀로 근무하던 그가 딸과 아내의 영면을 함께 하지 못한다.  딸아이의 죽음은 더 극적이다.  그는 딸의 주검을 담은 열차를 맞이하면서도 플렛폼에서 깃대를 흔들며, 기차를 인도한다.  그리고 그 비극적인 날에도, 그는 근무일지에 `이상무'라 적어 넣어야 했다.

" 십칠 년 전 눈 내리던 날 아침. 아내의 팔에 안긴 유키코를 저 홈에서 보냈다. 평소 하던 그대로 수신호를 하여 기차를 보냈다.  그리고 그 날 밤 기차로 유키코는 싸여 갔던 모포에 말려 차디찬 몸이 되어 돌아왔다.  `당신, 죽은 아이까지 깃발 흔들며 맞이해야 되겠어요?" 아내는 눈 쌓인 홈에 쪼그리고 앉아 죽은 유키코를 꼭 끌어안고 그렇게 말했다."  p. 27, 아사다 지로, <철도원>

그러나 어느날 근무중이던 초로의 철도원인 오토마츠에게 한 소녀가 연달아 나타난다.  아이는 인형 하나를 들고 있다.  한번은 다섯살 남짓, 한번은 열살 남짓, 그리고 이제 열 일곱살의 소녀가 되어, 오토마츠와 오랜 대화를 나눈다.  그 아이는 17년전에 이미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그의 딸 유키코의 혼령이다.  남에겐 섬뜩한 이야기겠지만, 아버지에게 혼령은 여전히 사랑스런 딸아이일 것이 분명하다.

경제논리 앞에 폐선을 기다리는 한 간이역을 배경으로,  오랜 시간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던 철도원의 평범한 삶,  그리고 눈 내리는 철도역 아래 사랑했던 가족과 그 사별을 그려내는 소설은, 환상적인 기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 자체로 한 편의 빛바랜 사진첩을 보듯 정감있고 따뜻하다.  이제 철도 민영화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오래된 역사건물과 선로들은 일본의 전례을 밟아가고 있다.   철도원의 이야기는 충분히 한국적이어서, 소설은 더 간절한 공감을 불러온다.

<러브 레터>는 일본에 몸을 팔러 온 중국의 한 여인과 야쿠자에 이름만 빌려주고 그녀와 거짓 혼인 관계를 설정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가상적인 남편이긴 하지만,  병들어 죽은  이방 여인 파이란의 사후 처리 과정에서 남편인 고로는 한번도 본적이 없는 이 여인이 자신에게 편지를 써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야쿠자의 하수인으로서 생애 그런 따뜻한 마음이 담긴 편지를 받아본적이 없는 고로는 세상이 파이란의 삶과 죽음에 얼마나 무관심한지 분노한다.  파이란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저 이방인으로서,  몸을 팔던 하찮은 여인으로 취급받았다.  어찌 그녀 뿐이겠는가?   

그녀가 가상의 남편인 고로에게 썼던 편지는 심심풀이였을 수도 있다.  그것은 실제의 고로에게 쓴 것이 아닐 것이다.  고로는 돈을 받고 일처리를 한 무심한 야쿠자의 조직원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파이란의 편지에는 눈물의 힘이 담겨 있다.  따뜻한 인간의 온기가 남아 있다. 이 무정한 남자 고로의 가슴을 분노와 슬픔에 휩쓸리게 한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갈망하지만 쉽게 타인앞에 내보이지 않는 눈물과도 같은 진실됨이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이 소설은 간절히 고발한다.

" `아휴, 미치겠네, 진정하세요. 아저씨. 진짜 왜 이러는 거예요?'  자신이 왜 그러는지 고로는 알 수 없었다. 코흘리게 시절 이후로 울어본 기억이라고는 없는 그였다.  `불쌍한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저도 마음이 쓰리다구요. 그치만, 이렇게 대성통곡할 것까지는 없잖아요. 진짜 미치겠네. 아저씨, 혹시 죽은 사람한테 홀딱 반한 거 아니에요?' "   p. 75, 아사다 지로, <러브 레터>

소설집 <철도원>의 다른 단편들도 마찬가지다. <츠노하츠에서>는 어린 시절 버스 터미널에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한 소년의 트라우마(정신적 상처)의 치유와 회복의 과정을 담았다. <백중맞이>에서는 이혼부모에게 버림받은 소녀가 이제는 남편과 시댁에서조차 버림받으려하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혼령이 되어 그녀를 곤경으로부터 구하고, 위로하는 스토리를 담는다.  이처럼 아사다 지오의 소설집 <철도원>은 한 편 한 편 모두가 독자의 가슴을 덥히기에 충분한 작품들로 채워졌다. 

모든것이 경제논리로 좌우되는 세상이다.   1%의 부자들이 부의 70%를 소유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것도 모자라 양극화는 더 진화하고 있다.   공권력에 저항하던 시민 6명이 죽은 용산참사는 아직도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공권력은 언제나 정당한 것인가?  살인까지도?  고개가 갸웃거린다.  G20회의 개최로 대한민국이 선진국 클럽에 가입이라도 된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국격(國格)이 한단계 상승되었다고 자화자찬이다.   정말 그런것인가?   아리송하다.   주위를 돌아보면 밑바닥을 헤매고 있는 인권지수가 우리를 조롱한다.  대의를 위해, 소의 희생은 필수결이라고?   이 세상에 사소한 죽음은 없다.   

아사다 지로의 소설집 <철도원>은 돈과 인간의 이기심, 탐욕 사이에서 인간됨의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는 작품들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언어를 사용한다거나, 사고 지수가 높다거나, 이런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을 가를 수 있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존재'라는데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눈물은 눈물 그 자체가 아니라,  마음으로 흘릴 수 있는, 순수함으로 흘러내리게 할 수 있는 결정체를 말한다.  

첫 문장에 인용한 엔도 슈사쿠의 문장처럼, 우리는 타인의 인생과 교차하면서 거기에 남긴 흔적을 잊기  쉬운 존재다.  그러나 그것이 죄인것을 알지 못한다면 불행하다.    이 계절, 한 편의 소설이 옛 사랑과 추억, 그리고 눈물의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   오래된 소설집이지만,  읽기 참 잘했다.  이 쌀쌀한 계절에 움츠린 영혼이 충분히 덥혀져 온다. 


 

200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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