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2 - 7月-9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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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이렇게 두꺼운 소설책을 읽은 적이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이후, 내가 읽은 책 가운데 페이지 수로만 1000 페이지가 넘기는 처음이다.  물론 분량으로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마침 이 책의 광고문구는 작가의 나이를 고려한 듯, <카라마조프네 형제들>을 썼던 도스토옙스키의 나이에 하루키가 이르렀다고 언급한다.   이 두 소설은 단순 우열을 가늠하기 어렵겠지만 비교할만한 게 못 된다.   19세기 러시아 소설가는 묵직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다.  인간과 신, 그 사이의 구원의 문제를 다뤘다 .  큰 스케일,  거대한 서사, 치밀한 전개, 그리고 환상적인 기법은 보이지 않는다.  21세기 일본의 소설가, 하루키의 신작 <1Q84>에서 우리는 거대한 서사도, 치밀한 전개도, 현실을 굳게 짚고 있는 우뚝한 리얼리즘도 발견키 어렵다.  

그러면 이 소설은 왜 일본에서 수초에 한 권씩 팔려나가는 걸까?  <상실의 시대>이후, 또다시 불고 있는 일본과 한국(그외 세계?)의 하루키 열풍의 정체는 뭘까?   10억이란 통큰 선인세를 지불할만큼, 이 작품은 대단한 걸까?  소설을 꾸준히 읽어왔지만 나는 하루키라는 작가와 그리 친숙하지 않다. 10여년전 <상실의 시대> 바람이 불었을 때, 나또한 그의 작품을 읽었었다.  약간 가벼운 붓터치에 가깝게 소설을 쓴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의 스타일, 그의 이야기에 크게 매료되진 못했다.  아마도, 소설을 막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을때여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상실의 시대>에서 하루키가 차용한 무대 장치는 내게 가볍게 보이기조차 했다.  나는 그때 한창 서양 고전에 심취했었다.  그가 작품의 후반부에 설정한 깊은 산속 요양원의 배경은, 내가 그 시절 흠뻑 빠져 읽고 있었던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의 중심무대인 사나토리움을 그대로 옮겨온 하나의 짝퉁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키는 이 소설의 후기에 이것을 밝힌다. 

그 이후, 군대에서 나는 다시 하루키와 만났다.  군대의 서가에는 약 100권의 서적이 자리하고 있었다. 때가 타고, 찢어지고, 상태가 좋지 않은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책을 읽은 이들이 없었던 군대 환경, 누구도 신경쓰지 않던 서가에서 나는 하루키의 단편집을 발견했다.   하루키를 <상실의 시대>라는 작품보다 높게 평가한 것은 바로 그 단편들을 읽으면서였다.  그 이후, 10여년 동안 내 안에 하루키는 그저 <상실의 시대>로 유명해진 일본작가라는 고유명사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2009년 곧바로 대중의 선호에 휩쓸려서 자연스럽게 그의 신작 <1Q84>에 이르렀다.  그러니, 나는 하루키 마니아는 아닌 것이다.   제목조차 특이한 이 책을 `아이큐IQ84'로 한동안 착각했다.  이제는 그를 차분히 읽을만한 환경에 이르렀다, 는 생각이 들었다.  10여년 전보다 내 환경은 평온해지고 침착해졌다.  청춘의 불안감이나 조급함이 사라진 채, 이제 여유를 갖고 읽는 하루키는 어떤 분위기로 나를 맞이할까?  설렘으로 책장을 폈다. 

<1Q84>의 서사는  복잡하게 베베 꼬인듯 하면서도 속살을 파고들면 매우 단순하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이 소설의 두 주인공이다.  아오마메는 킬러고, 덴고는 작가다.   킬러와 작가라는 직업은 그들을 먹여살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또다른 직업을 갖는다. 아오마메는 일종의 스포츠 안마사, 덴고는 수학강사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공유한다.  덴고와 아오마메가 초등학교 시절, 한 교실에서 손을 잡았다는 것, 그 감촉의 기억이 서른살 남짓한 나이를 먹도록 그들의 기억속에 잠재돼 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손을 한번 잡았지만 그것이 영원한 사랑으로 각인된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이지만 무척 현실적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강렬하고, 그게 사랑이란 감정이라면 평생을 갈 수도 있기에.   이들은 어느 순간 1984년이란 현실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1Q84년이란 의문의 세계에 공존한다.  그 현실 세계와 1Q84년을 가르는 특이점은 하늘에 달이 두 개 떠 있다는 것이다.  

달이 두 개 떠 있는 세계의 이야기는 소설 속 또다른 이야기인 <공기 번데기>란 작품과 혼합되면서 다소 환상적인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달이 두 개 뜬 세계를 보는 사람들이 덴고와 아오마메를 비롯한 소설 속 인물들이다.  그들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어느 순간 1Q84년이란 시간속으로 인도된다.  그러나 작가는 1Q84년이 가진 의미를 정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이 환상적 공간에서 신비감을 발산하고 있는 인물들인 `리더'와 `리틀 피플'의 공상적인 초능력과 기괴함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작품 내 또다른 소설  <공기 번데기>의 세계가 현실 세계에서 힘을 발휘하는 꼴이다. 그 소설의 기괴한 인물들이 현실의 이야기속에 나와 그대로 두 개의 스토리가 합류한다. 상상한 세계, 즉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한다.  그러나 명확히 그 둘이 어떻게 연결되는것인지, 작가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설명을 안 해 주면 모른다는 건,  말하자면 아무리 설명해 줘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덴고 아버지의 독백, <1Q84>2 , 무라카미 하루키

덴고 아버지의 독백은 그대로 작가의 독백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분석하겠다는 입장을, 독자는 어느 순간 포기해야 한다.  편집자 고마쓰의 비아냥처럼, 평론가들은 덴고가 리라이팅한 작품을 17살 소녀의 비범함인냥 칭송할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1Q84년의 난해한 서사를 수학공식처럼 풀이하려 달려드는 시도에 대한 작가의 경고처럼 들린다.  아무리 비상한 머리로도 이 소설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상형문자를 오랜시간 눈이 아프도록 쳐다보고 자기 나름의 해석을 내놓는 일처럼 무위하다.   그러면 10여년 만에 다시 조우한 하루키에게 나는 또다시 실망하고 만건가?   답은 놀랍게도, `아니다 였다.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을  잘 꾸려진 서사에 두는 태도는 내 미천한 소설 읽기의 오랜 습관이다.  이 습관은 하루키의 일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텍스트를 훑는 의식에도 그대로 살아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장엄한  서사의 고리를 형성시키지 못했음에도, 이 소설의 일천여 페이지가 전혀 무위하게 길단 느낌이 들진 않는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하루키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각개 약진적 힘 때문이다. 전체를 놓고 보자면 몹시도 난해한 이야기지만, 하루키는 1,2 권 각개 24장 씩, 전체 48장을 채우고 있는<1Q84>의 장들 하나 하나가 단편 소설적인 밀도와 충실성을 담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집중력이다.  말하자면 서사의 빈약함을 하루키는 특유의 내밀한 문체와 묘사의 충실성,  각 장의 단독적인 스토리의 밀도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고마쓰는 말했다. `덴고, 이렇게 생각해 봐. 독자는 달이 하나 떠 있는 하늘은 지금까지 수없이 봤어. 그렇지? 하지만 하늘에 달이 두 개가 나란히 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적은 없을 거라고. 대부분의 독자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것을 소설에 끌어들일 때는 되도록 상세하고도 적확한 묘사가 필요해"  <1Q84>2, 무라카미 하루키 

마치 소설 쓰기의 비법을 전수하려는 듯, 하루키는 이런 문장들을 심심찮게 이 소설속에 흘려 놓는다.  남자 주인공 덴고는 마치 하루키의 전신을 보는 듯 하다.  또한 출판계와 작가, 편집인의 관계를 그리며, 그는 그 시장의 관습들을 고발하고 은근히 비튼다.  그는 수학 강사로 일하며 시시때때로 장편 소설을 쓴다.  그에게 `공기번데기'의 리라이팅 작업을 맡긴 고마쓰라는 인물은 `공기 번데기'를 통해, 평론계를 조롱할 목적을 갖고 있다.  소설은 그 분량만큼 다채롭고 풍성하다.  직접적으로 사회적이고 시사적인 문제를 고발한 것은 종교집단의 추악성을 소재로 삼았다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통해 하루키는 시사성이나 사회적 이슈에 대한 고발 차원의 목적성을 두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작가는 달이 두 개 떠 있는 세계로 독자를 완전하게 데리고 가는 것, 자체가 목적인 듯 보인다.  하루키는 독자가 1Q84년의 시민권을 하나씩 나눠갖길 희망한건 아닐까?  책장을 열면, 독자의 현실은 보이지 않고 오직 1Q84년의 덴고와 아오마메가 존재하는 세계로 독자가 온전히 몰입되도록 하는 그의 능력은, 날고뛰는 소설가들의 세계에서도 그리 흔치 않는 하루키만의 비범함이다.  그를 지지할 수밖에 없는, 그의 소설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놀라운 재능이다.

통일된 서사로서 이 소설은 정돈될 수 없다.  이 소설은 본류의 스토리와 액자소설의 스토리가 합류하고, 섞이면서 몹시도 난해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종교단체를 이끄는 `리더'나 공기 번데기와 리더를 배후조종하는 `리틀피플'의 정체가 무엇인지,  시원스레 파악할 수 없다.  소설의 끝에 이르렀을 때, 아오마메는 죽음을 선택하고,  덴고는 아오마메를 찾고자하는 의지를 피력한다.  이것만 놓고보면 결말또한 모순이다.  두 연인의 끝과 시작을 동시에 피력하는 마무리는, 아무리 봐도 이 소설의 서사처럼 합리적이라 볼 수 없다.  그 뒷이야기를 기대하는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하루키의 뒷 이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2권 만으로도 이 작품은 완전하게, 새로운 하나의 세계, 달이 두 개씩 떠 있는 4차원의 세계, 그 생경함과 낯섬으로 충분히 완전한 세계를 창조해 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소설읽기의 가장 큰 즐거움을 누렸다.  이것은 <1Q84>가 독자에 제공하는 충분한 선물이다.

소설은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가장 사실처럼 이야기할 때, 독자는 호흥한다. 하루키는 <1Q84>를 통해,  이 세계의 작가와 독자에게 소설 쓰기의 작법을 교수한다.  난해한 서사를 통해서 그러나 가장 순수하고, 절박한, 젊은이의 사랑을 창조해 낸다.  그의 놀라운 붓터치를 통해, 난잡한 포르노 영화가 한 편의 예술 영화로 창조되는 듯한 장면을 우린 이 소설의 곳곳에서 발견한다.  `리더'를 살해하는 장면에서는 등장인물의 숨소리와 땀냄새까지 느낄 수 있는 긴장감과 리얼리티가 전해온다.  고양이 마을의 일화나 달이 두 개 뜬 세계를 이야기할 때의 묘사는 적확성의 최고 단계를 이미 초과한 경지를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그의 능력은 보이지 않는 세계,  오직 작가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현실보다 더 현실다운 세계의 진실을 이야기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1Q84는, 내게 소설 쓰기의 진수를 깨닫게 한다. 

하루키 신드롬이 불면서 한동안 우리 작가들이 하루키적 글쓰기를 따라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들었다.  모방은 창조의 시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모방을 나쁘게 보진 않는다. 그러나 하루키적 글쓰기는 하루키에게만 어울리는 방식이라 생각된다.  널리 유통되는 글쓰기론 자신의 색깔을 만들 수 없고 독자의 흥미도 끌어낼 수 없다.  선인세 10억을 주고 수입하는 문학에 왠지 모를 서글픔이 앞선다.  우리 문학계에, 왜 하루키가 없는가?   작품이 아니라 그 이름만으로 선인세를 줄 만한 작가를 우린 왜 키우지 못했는가?   이 가을, 다시 찾아온 하루키 신드롬에 부쳐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똑같이 독자에게 물어야할 질문이 될 수도 있다.  하루키를 읽으며 잘 쓰여진 소설이란 무엇이며,  문학의 효용은 대체 무엇일까 생각한다.  지금 우리의 작가들은 그를 읽으며  무슨 생각에 빠져 있을까, 자못 궁금하다. 




 

2009.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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