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중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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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의 원초적 즐거움

너무 오랜시간 소설 읽기와 멀어졌다.  내가 기억하는 소설가의 폭이란 내가 아는 유행가요만큼 비좁다.  나는 열심히 책을 읽어왔으나 상당히 게으른 독자였다.  어쩌면 그건 책읽기의 편식 때문일 것이다.   더 열심히 찾아읽질 못했단 생각을 하기에 충분한 책 한 권을 만났다.  문학동네가 마련한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도 아니요, 그렇다고 가장 잘 팔리는 작가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젊은 작가들일 뿐이다.   젊다는건 몹시도 주관적인 것이기에 몇 살 부터 젊은 작가들인가,  기준이 모호하다.  그러나, 이 작가들의 프로필에서 나는 유독 그들의 나이에 포커스를 맞춘다.  내 또래의 서른 초중반 작가들이다.  내 또래의 작가들은 이렇게 이제 문학 마당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었다.  신세대의 시초라 할 수 있는 X세대들이다.   X세대는 네트워크 세대인 N세대와 2000년 이후에 등장한 Y세대의 선배격이다.  X세대는 우울과 반항 그리고 자아를 중요시했다.  이전 세대와 확실히 다른 성향을 보여준 젊은 신세대의 상징을 우린 X라는 알파벳으로 정의했으나,  이제 이들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새로운 세대에 자리를 비켜준다.   어른 작가들의 작품만을 탐독하고 항상 존경을 품고  독자로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서서히 문학세계의 중심부에 진입하고 있다.  이들을 우리 사회는 이제 젊은 작가로 품어안게 된 것이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선배 작가들은 이념과 시대라는 거대한 틀로 자신의 문학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X세대는 이념과 시대라는 거대한 인식틀에 식상해 한다.  이러한 틀은 솔직히 너무나 거창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자아다.   나또한 그렇다.  20대부터 내 관심사는 나의 존재와 나의 인식틀 안의 세계였다.  주체는 나였고, 세계의 중심은 나였다.  그러므로, 어쩌면 X세대가 이기적이란 혐의를 얻게 된 지점이 거기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어느 세대나 모두 이기적인 면이 있고, 본래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문학의 중심은 언제나 자아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하는것 아닐까?   

이 작품집에 수록된 소설가 중, 내 눈에 익은 작가는 오직 `편혜영' 정도였다.  그것도 신춘문예의 평론 소재로 그의 소설이 쓰였다는 게 내가 편혜영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다.  그러니, 대상을 받은 <1F/B1>의 김중혁이나 이 작품집에서 주목할만한 능력을 보여준 이장욱과 김미월에 대해선 아는게 전무하다.  이 작품집에는 일곱편의 수상작이 담겨 있다.  상당히 엄격한 방식으로 선정된 작품들의 모음집이자, 아직 자신의 능력을 펼쳐보이기도 전에 익명속에 숨어 버린 작가들이다.  출판사 문학동네는 이들에게 젊은 작가상을 주고, 작품집을 내주었다.  그것도 실가 1만원이 넘는 책을 그 반값에 한시적으로 판매하고 있다.  목적은 그들의 이름과 그들의 작품을 알리자는 것이다.   소설이 잘 팔리지 않고, 한국 문학이 위기에 처했다고 아우성이 인지가 오래이지만 누구하나 그들을 구원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았다.  인문학이 위기에 처했다는 엄포가 대학가에 울린지 십수년이 되었지만, 그렇게 현재 인문학은 고사되고 있다.  그러나, 한 쪽에선 이렇게 희망과 용기를 주려는 시도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작은 노력이 독자의 관심을 살 것이고 식어버린 문학에 대한 독자의 열정과 작가들의 생산력을 자극할 것이다.  이 시도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아직  설익다.  수준높은 성취와 기교, 능숙한 작가적 역량을 보여주진 못한다.  그러나, 작품들을 읽어줄 독자들이 존재할 때 좋은 작품이 나올 토양은 생성되는 것이다.  관심은 언제나 사랑을 부른다. 젊은 작가들은 작품속에 패기와 실험정신을 담았고, 사회를 바라보는 한 세대의 진지한 시선과 반성을 응축해 놓았다.   이 작품집의 가치는 그것에서 찾아야 한다.

 

1.  세계의 그물망, 나와 타자와 이방인 -  김미월 <중국어 수업>,  정소현 <돌아오다>

희곡,배우,관객을 연극의 3요소라 한다.   세계를 촘촘히 엮고 있는 그물망 속에는 어떤 구성요소들이 존재하고 있나?  나와 타자과 이방인이란 구성 요소는 자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를 엮는 그물망으로 세가지 요소를 김미월과 정소현의 작품속에서 만났다.   그들 사이의 관계망이 이야기를 짓고, 인물의 길을 닦는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와와 타자간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 존재를 증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적 상황에서 제3세계의 이주민(노동자)은 현재의 우리를 비추는 또다른 거울이 되기도 한다.  김미월의 <중국어 수업>은 한국에 값싼 노동을 팔러 온 중국인 쓰엉과 멍의 엇갈린 운명과 사랑을 통해 이 관계망의 불균형과 실태를 고발한다.  

아침마다 지하철 출퇴근길에서 발견한 화교가족,  콩나물 시루처럼 붐비던 지하철이 어느 정거장을 거치며 한산해질때 어린 화교 남매는 좌석을 책상삼아 공부를 시작한다.  지하철 바닥에 덜컹 주저안고 좌석을 책상 삼는 어린애들이 불편하게 보이지만, 매일 반복되는 그들의 방식에 익숙해진다.  한 할아버지는 이들의 엄마에게 말을 건다.  말을 튼 할아버지는 남매의 엄마에게 매일 아침 중국어 한 가지씩을 배운다.  며느리, 는 중국말로 뭡니까?   밥 먹었냐?, 는 뭐라고 하지요?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중국어를 하나씩 배우는 할아버지를 유심히 쳐다보는 나, 는 타자(할아버지)와 이방인(화교)과 소설속에서 최초로 관계망을 형성한다. 

경력을 쌓기 위해, 인천의 이주노동자 어학원 강사로 일하는 `나'는 서울 중심가의 어학원의 어엿한 강사를 꿈꾸고 있다.  불법 체류자가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 위장 등록을 일삼는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는 것은, 이같은 `제대로 된 미래'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 이주민들이 어학원에 등록한 것도 마찬가지다. 학생비자를 통해 입국해, 중국에서 여섯달치 벌이를 한국에서 한달 아르바이트로 대신하기 위해서다.  `나'와 `타자(이주노동자)'의 처지는 별반 다르지 않다.  이같은 엉성한 관계망은 돈벌이와 안정된 미래를 위한 것이지만, 그들의 정상적 삶을 왜곡한다.  왜곡의 정점에서 사랑하는 사이였던 두 연인 쓰엉와 멍의 운명이 갈린다.  한국인과 결혼해 임신한 체로 멍은 이제는 강제추방의 운명에 놓인 쓰엉과 경찰서에서 마주친다.

"시아꺼위에 위 땅 마마, 워 시앙 하이쯔...짜이찌엔"
나는 다음달에 엄마가 돼. 안녕. 이 급박한 상황에 여자는 대체 자신이 엄마가 된다는 소리를 왜 하는 것일까
.   <중국어 수업>, 김미월 p.208

소설은 절묘하게도 중국어 수업을 화교에게 듣는 낯선 할아버지를 이 경찰서에 등장시킨다.  바로, 멍의 시아버지이자 뱃속 아이의 친할아버지로 말이다.  세계라는 관계망은 그물망처럼 촘촘했다.  너무나 촘촘하기에 우리는 이 그물망의 난처한 포괄성에 희생된다.  그러나, 그것이 매일의 출퇴근길에 만나는 엇비슷한 인간들의 운명 같은게 아닌가?  

정소현의 <돌아오다>의 공간적 배경은 `퇴락한 일본식 2층 목조건물' 이다.  이 소설속 등장인물은 나와 타자(할머니)와 이방인(임신한 윤옥)이다. 이들은 어떤 관계망을 형성하는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나, 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지만 아무런 정도 사랑도 할머니란 존재로부터 받질 못한다.  그러나, 그 사랑을 갈구하지도 않는다는게 더 문제다. 작가는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나의 빈궁함과 아픔을 서술하지만 이것은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적 성향을 강화하는 쪽으로 비춰진다.  이러한 성향이 결국 타자(할머니)와 이방인(윤옥)과의 관계망을 짓는데 방해 요소가 되고 만다.  할머니는 눈도 보이지 않지만 이 집안의 권력자처럼 행세한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모든걸 손녀에게 의존해야 할텐데 집안의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은 부조화를 일으킨다.  우연하게 찾아든 임신한 젊은 여자 윤옥은 이층집에 살면서, 집안의 유령이 되지만 할머니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지나친 상처와 아픔에 대한 호소가 관계망을 흐트러뜨리고, 이야기의 흐름을 단조롭게 한다.  

그러나, 작품은 마지막 이방인(윤옥)의 정체에 신비적인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이 궁지로부터 스스로 탈출한다.  아사다 지로의 소설<철도원>의 어린 딸들처럼 윤옥은 환상적인 방식으로 나의 자아와 그물망을 복원시킨다.  환상적 기법은 에고이스트 내가 치유되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남겨둔다.  떠난자들이 `퇴락한 일본식 2층 목조건물'로 되돌아 올 수 있다는 그것. 그게 희망이다.

"그 아기는 나였다.  내가 할머니에게 왔을 무렵 찍은 사진과 같은 얼굴이었다.   아기수첩을 펼쳤다.  거기에는 열 달 동안 윤옥이 받은 진료가 기록되어 있었고, 아기의 출생일, 예방 접종 내역이 적혀 있었다.  아기의 출생일은 1975년 5월 3일, 내 생일과 같았다."  정소현 <돌아오다>, p. 257

 

2. 삶과 죽음의 간극을 배회하는 군상들 -  이장욱 <변희봉>,  김성중 <개그맨>

삶과 죽음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은 때로는 너무나 크다.  왜냐하면 그게 삶의 요체요,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덩어리는 중심을 의미하고, 그게 바로 인간이 세계속에 존재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 실체들의 삶이란 다채롭다.  정형적인 성향을 벗어난 한 인물을 만날 때 우리가 삶에 가진 긴장감은 그 무게감을 벗는다.  변희봉을 아시나요? 라고 묻는 이장욱의 소설과 평생을 남은 웃기는데 소비했지만, 자신의 인생은 약간은 비극이었던 김성중의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삶이 가진 균형감을 주지시키는 것일까? 

동대문 운동장역 근처의 한 포장마차, 나와 만기가 소주잔을 앞에 두고 앉았다.  만기의 처지가 말이 아니다.  아내와 얼마전 이혼했고, 병석에 산소호흡기를 끼고 부친은 누워있다.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빚은 매일 늘어만 간다.  그러던 어느날 만기는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쓴다.  연극 한 편을 보더니 `변희봉'과 같은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대학로에 드나든다.  그가 맡은 역할은 형편없고, 그는 매번 실수를 한다.   그러던 어느날 지하철의 어느 계단에서 변희봉 선생을 만난다.  평소 그가 존경하던 연기자, 70년대 성우로 데뷔했으나 수십년 조연역할에 만족하다 최근에 와서야 진국같은 연기로 각종 영화에서 빛을 내기 시작한 연기자, 변희봉 선생.  문제는 주위 사람 누구도 변희봉을 모른 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기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되묻는다. `변희봉을 아시나요?'  답은 물론 `김인문'은 알겠는데, 변희봉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의 관심사외엔 철저히 무관심한 경향이 짙다. 소설속 인물들이 시종일관 변희봉을 모른다고, 답하는 것은 독자인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고, 답답하다.  더군다나 <괴물>의 주인공 송강호의 아버지 역으로 나온 이가 `김인문'이라 하는데는 깜빡 속았다.  이혼한 아내에게 너그러운 그,  병든 부친과 궁지에 몰린 가정을 내팽게치고 일본으로 이민가 오르골을 만드는 오타루에 정착하겠다는 아내의 꿈, 에 만기는 반기를 들지 않는다. 

"그녀는 오르골의 작고 맑은 소리에 반했다.  오타루의 겨울에 내리는 눈송이들과 함게 인생을 보내고 싶었다. 눈을 치운 뒤 앞치마를 두르고 탁자에 앉아 조물조물 오르골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삶이 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앞으로 일하게 될 오타루의 상점까지 알아두었다는 것이다.  만기의 말에 나는 진심으로 화가 나서 쏘아 붙였다. - 지랄한다. 미친년이네, 씨발년이고, 확 지박아뿔라. "  이장욱 <변희봉>, p. 113  

반기를 들고, 분노하는 것은 이 소설속 당사자가 아니다.  삶과 죽음을 견디어 내고 지탱하고 이끌고 마무리 짓는 것은 `만기'이다.  이 모든 궁지에 몰린 것은 `만기'이지 분노하고 위안하는 친구가 아니다.  우리가 만기의 상황에 내몰렸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할까?  정답은 없다.  단, 만기는 만기의 방식으로 이 궁지에 대응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배신한 아내와 산더미같은 빚에 절망하고, 위중한 부친에 슬퍼하는 대신, 그는 좀더 낭만적이고 엉뚱해졌으나 분명한 사실은,  외부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삶과 죽음의 간극을 배회하는 우리들은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에 유머는 하나의 `옵션'이 될 수 있다.  `변희봉을 아시나요?'라고 묻는 그가 더이상 엉뚱하게 보이지만 않는 이유다. 

이에 비한다면, 김성중의 <개그맨>은 하나의 옵션으로 진중한 방식을 택한다.   세상을 온통 웃게하는데 성공한 한 개그맨의 성공과 몰락을 다룬 이 소설은 그 곁을 응시하는 나의 시선과 내면을 통해,  타인의 삶과 죽음에 깃든 의미를 묘파해 낸다.   결국, 이국에서 깡통속의 유골로 재회하는 나와 옛 연인 개그맨은 시간을 거슬러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세계가 어디인지 묻고 있다.  그 유골속에서 영광의 웃음도, 대중의 관심도,  옛 사랑의 낭만도, 자취를 감추었다.  성공한 기억의 1권을 지워버리고,  쓸쓸한 무명의 2권부터 쓰기 시작한 외국 생활에서 개그맨은 연인에게 한 장의 엽서를 남기며, 그 엽서가 깡통속의 유골과의 재회를 이끌었다.   삶과 죽음이 철저히 혼자만의 몫이며, 그 당연한 귀결이 전혀 낯설지 않음에 독자는 어떤 위안을 얻고 안심하게 된다.

"사람들은 노래를 따라 어떤 인생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속에 들어 있는 패배가 그들에게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순수한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온갖 명성과 가십에 둘러싸여 있던 개그맨이 줄에서 떨어진 광대가 된 후 누렸을 그 평화는 내 몫이 아니었다. "  김성중 <개그맨>, p. 288 

 

 3.  존재를 탐색하는 소설의 마력 - 편혜영 <저녁의 구애>,  배명훈 <안녕, 인공존재!>

소설의 역할은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데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훨씬 더 확장돼 있고, 그 끝은 요원하다.  편혜영의 단편을 읽으며 소설이 줄 수 있는 효용이 얼마나 크고 막강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편혜영의 작품은 단번에 소설이 줄 수 있는 최대의 즐거움과 고민을 한꺼번에 벼락처럼 안긴다.  편혜영와 배명훈의 단편들은 존재, 그 어렵고 오래된 질문에 가 닿는다.  존재한다는건 어떤 것일까?  인간이 생명력을 갖고 지구에 두발을 딛고 살아간다는건 얼마나 가슴 뛰는 진실인가? 하는 낡았지만 언제나 새롭기만 한 질문을 안긴다.  이 두 편의 작품은 이 단편집에서 가장 난해하지만 즐거운 퍼즐놀이와 같다. 

편혜영의 문체는 둔중하지만 세심하다.  사유하는 문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의 소설은 죽음과 사랑을 대비시킨다.  그러나 슬픔이나 감동 같은건 애초에 기대할 수 없다.  무감각적인 죽음에 대한 뉘앙스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등장하는 인물, 뫼르소의 태도와 닮아 있다.  조화를 배달하는 그는 죽음의 전화를 매일 기다린다.  죽음의 소식은 그에겐 일상이며, 기쁜 주문의 전화다.  까마득한 친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남쪽으로 380여 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고장의 장례식장에서, 친구는 김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모의 위중한 소식을 전하며 미리 조화 하나를 주문한다.  대금 결제 따윈 얘기 하지 않지만, 장례식장의 위치는 정확히 가르쳐 준다.  낯선 도시로 출발하며, 김은 친구와 무미건조한 대화를 나눈다.   

"이미 죽었거나 곧 죽게 될 것은 영정의 주인이었지 그가 아니었다."  편혜영 <저녁의 구애>  p.73

죽어가는 `어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친구, 그리고 김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고조된다.  한 사람의 죽음과 그 죽음에 쓰일 조화를 배달하는 나 사이에 슬픔이란 감정 따윈 절제 돼 있다.  죽음은 상업화되고, `어른'이 버티고 있는 지상의 시간은 소멸되어야 할 `필연'으로 정리되고 만다.  존재와 존재 사이를 엮고 있는 이 무감동적인 대화와 기류는 이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독자들의 간담을 싸늘하게 한다.  이 치명적인 비인간성 안에서 김은 `여자와의 사랑'을 줄다리기 한다.  컴컴한 어둠속에서 장미가 내뿜는 붉은 빛깔 같은 사랑이야기가 380km를 넘어 전화선을 타고 오간다.  섬뜩하지만, 왠지 아름답고 비정하지만, 왠지 짜릿하다. 

"뭐가 여기까지예요?  재촉하는 여자에게 그가 대답했다. 우리요.  우리가 함께 있는 거요. 여자가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팀장이 찾아서 가봐야겠어요. 조심해서 오세요. 그분이 빨리 돌아가시길 빌게요. 전화는 끊어졌다. 홀가분해지리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p. 76

배명훈은 존재의 문제를 좀더 철학적으로 고찰한다.  데카르트의 명제 "Cogito ergo sum  고기토 에르고 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를 기반으로 한 편의 소설을 짓는다.  자살한 여류 과학자 신수정은 괴상한 발명품들을 만들어 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전기코드가 달린 작은 돌맹이다. 이 돌맹이의 이름은 Cogito이며 Dubito회로하는 것을 통해 데카르트의 존재 추출법을 반복 시행하여 순도 높은 결정 형태의 존재, Cogito를 추출해 낸다. 

화자인 나,는 이 기괴한 물건에 태양전지판을 얹어 우주로 떠나 보내는데, 어느 순간 이 기계는 오작동으로 인해 그 존재를 소멸하게 된다. 끝없이 Cogito를 추출해 존재를 생산해 냈던 기계가 오류를 통해 존재를 잃어버리자, 어떤 현상이 발생했을까?

"그러자 존재가 사라졌다.  존재가 사라진 공간을 향해 주변 공간이 밀고 들어갔다.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우주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조그만 공백을 견디지 못했다.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미세한 부분이었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광범위한 시공간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 무렵에, 나는 신우정을 내 안에서 거의 다 지워버렸다. 인공존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배명훈 <안녕, 인공존재!>, p.169 

존재라는 철학적 개념을 소설이라는 장르에 담아내려한 시도는 난해하며, 난해한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은 결코 아니다. 소설의 실험정신은 높게 보아줄만 하나, 텍스트 안에서조차 이 소설은 존재의 개념을 형상화 하는데 실패했다. 허나,  존재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그 영향력을 이어간다는 `존재폭발'의 개념은 신선하다.   돌맹이는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사유를 통해 존재를 증명해낼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다.  돌맹이에게 존재를 증명해내게 한 신수정의 죽음과 존재 증명을 통해 생명력을 얻은 돌맹이의 대비를 통해, 이 작품은 어쩌면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소설속에 담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존재 너머에 있는 존재를 탐구하려는 소설로 비춰진다. 

 
4. 현실을 떠받치는 지하세계의 위용 - 김중혁 <1F/B1>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인 김중혁의 작품은 우리가 사는 공간의 이면적 의미를 들춰낸다.  현실에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것들 말이다. 밤이면 넘쳐나는 쓰레기통이 아침 출근길엔 말끔히 치워진다.  밤 사이에 누군가 와 모두 수거해 갔을 것이지만, 우리는 별다른 인식을 하질 않는다.  사회란 정교한 시스템 안에 거주하며 그 시스템의 혜택을 받고 살아가지만 실상은 시스템을 통제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부 구조임을 잊기 쉽다. 

우리가 흔히 보고 있지만, 누구나 자세히 보지 못하는 결함을 가진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건물 관리인들의 거주지인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1F/B1은 건물의 입주자에겐 금기의 공간이자 감추어진 진실과도 같다.  그러나 감추어진 1F/B1의 위력은 하나의 건물을 무용지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 소설속에서 복면을 쓴 특공직원에게 점령당한 1F/B1의 공간이 사람들을 공포와 범죄의 무방비한 상태로 내몬다.  굳건한 현실, 말끔한 정상, 을 위해 언제나 어둑고 축축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역설, 을 이 소설은 드러낸다.  그리고 그 발견의 과정을 이 소설은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어느덧 독자는 자신의 삶을 정상으로 이끌기 위해 어두움 안에서 온전히 진실을 감당하고 있는 것들을 되돌아 보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일상인의 헌신과도 같이 평범한 것이리라.  종교적 진실을 품고 살아가는 수행자는 수도원의 종교인들이 아니라 바로 그 수도원의 지하에 물을 공급하거나, 전기를 공급하는, 때묻은 작업복을 입은 설비공일 수 있다.  온전한 현실을 유지시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스탭들을 필요로 하는가?  그 가치를 따져묻고 고상함의 경중이나 엄숙함의 종류를 분간한다는 건, 사치이며 오류임을  이 작품은 예리하게 파고들고 있다.

"지하로 내려가다가 윤정우가 깜짝 놀랐던 곳. 기적처럼 매달려 있던 1F/B1의 표지판 아래에 비밀통로가 있었다. 비밀관리실은 숫자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1층과 지하1층 사이의 어떤 곳이었고, 슬래쉬(/)처럼 아무도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는 아주 얇은 공간이었다. 좀 전에 표지판에서 `FBI'라는 글자가 보였지만 이번에는 슬래쉬가 크게 보였다. 1층이나 지하 1층 표시보다 슬래쉬가 더 크게 보였다."  김중혁 <1F/B1>, P.37

 

끝맺는 글

지금껏, 나는 하나의 단편소설집 작품들을 모두 분석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수상작품집에는 각 작품마다 젊은 비평가들의 평론 하나씩이 실려 있다.  이 글을 쓰기위해 나는  그들의 평론을 일부러 건너 뛰고 읽었다.  작품 하나하나를 분석하는 비범함이 담겨 있을, 그 평론들은 나름의 날카로움을 견지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 평론들을 일부러 읽지 않은건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온전히 내 안에서 해석하고 분석해 보려는 의지에서였다.  그러나, 역부족을 느낀다.

수많은 작품 가운데 선택을 받고 수상을 하게 된 이 작품들은 젊은 작가들의 소중한 문학 생산물이다.  내가 부족함 가운데서도 힘겹게 모든 작품을 내 나름의 기준으로 해석하려 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작품집을 읽으며 멀지 않은 미래에 나의 시대(X세대)의 이야기를 제대로 엮어낼 대작가가 탄생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건졌다.  좋은 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이들의 독자가 되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문학의 효용을 생각하기엔 삶이 너무 각박하다.  먹고 사는 일과 전혀 관계 없을 문학을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하는 작가들이 있고, 그들의 독자들이 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는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들이 어렵게 문학을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오늘도 문학작품을 애써 찾아읽는 이유가 아닐까?   

단편으로 만난 젊은 작가들을 장편에서 다시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한다.  

 



 
2010.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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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든 꾸준히 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연초에 세운 운동 계획은 자전거 타기였다.  마지막으로 자전거를 탄게 4월 초다.  나는 더이상 순천만으로 이어지는 사이클 도로에 자전거를 가지고 나가지 못했다. 안한것이 아니고, 못한것이라는 변명을 심어둔다.  허리통증이 발목을 잡은거니까.  작년까지 주로 현장에서 많이 돌아다니는 일을 했다. 나는 항상 걸었고, 걷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작년말부터 사무실에 꼼짝않고 앉아 있는 일을 한다.  처음엔 소화가 안되고, 온몸에 부적응 현상이 돌출됐다.  비싼 러닝머신을 샀고, 안타던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한겨울 북풍을 맞으며 힘겹게 페달을 밟았건만,  갑자기 찾아온 허리통증으로 겨우 4개월만에 자전거 타기를 그만두어야했다.  인생이 항상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을 읽은 것은  작년 말이었다.  <1Q84>.  내게 하루키는 그렇게 끌리는 작가가 아니었다.  스무살에 읽은 하루키와 삽심중반을 넘어선 내게 다가온 그의 신작 소설은 대단한 감흥이라고까진 할 수 없었다.  잘 쓰여진 소설를 읽는 것과 그 소설가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러니까, 독자에겐 자신에게 맞는 작가가 있는 모양이다. 하루키가 그리는 사랑이나 방황은 내게도 공통적인 것이었으나, 그 방향이 달랐다고 해야 하나?  하루키의 소설속 문장들은 너무 추상적이고, 서구적 취향을 많이 드러낸다.  그건 내게 별 어필을 하지 못했다.  일본 작가가 유럽이나 미국식 스타일로 소설을 쓴다는게 좀 어색하게 보였다.  어쩌면 그게 흔히 독자가 갖는 오해의 일종이라도, 아무튼 하루키와 나완 좀 서먹했다.   사실, 내가 하루키에게서 발견하고 싶어했던 것은 그의 삶에서 건져올린 리얼리티같은 거였다.

그러니까, 대체 당신은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고 당신의 일상은 무엇이며, 당신의 취미는 무엇입니까?, 라고 먼저 하루키의 정체부터 파악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글에서도 하루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게으른 독자는 그의 산문을 찾아읽지 못했다.

그러던중에 발견한 이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간의 내 궁금증을 무척 간단하게 해소해 주었다.  2,30대를 거치며 소설만을 간혹 읽어왔고 항상 그에게 불만을 갖고 있던 내가, 이 책을 서점의 진열대에서 만난 직후 느낌은 매우 달랐다. 말하자면, 그가 이제 신비의 장막을 좀 걷어버리고 내게 인간 대 인간으로 악수를 청해 온 격이다.  아,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군요.  반갑습니다. 마음속의 심리적 거리감이 좁혀진 느낌, 문장들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체험, 하루키가 갑자기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이러한 경험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지만 비중있는 작가 하루키에 대해 몰이해를 갖고 있던 내겐 좀 속시원한 것이었다.   하루키를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은 그러므로, 이 책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나는 1982년 가을, 달리기를 시작한 이래 23년 가까이 계속 달렸다."   무라카미 하루키, <내가 달리기를 말할 때...> p.23

하루키는 마라토너였다.  그는 본업은 소설가다.  그것도 세계문학계에서 그의 위상은 남다르다.  그가 발표한 소설들은 40여개국에서 번역돼 팔리고 있다.  그것도 장기 베스트셀러에 올라 세계의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2003년에 발표한 수작 <해변의 카프카>는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올해의 책 TOP 10에 들었다.  하루키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옐리네크와 해럴드 핀터가 받은 카프카 상을 2006년에 받았다.  이 상을 받은 사람은 대개 그해의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다.  아직 하루키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건 그러니까 일종의 미스터리다.  그래서 그의 수상은 매년 유력시 된다.  아, 이웃나라에 이렇게 대단한 작가가 살고 있다니 부럽다. 우리 나라의 날고 기는 소설가들은 뭐하고 계시나?

젊은 시절 하루키는 대학 졸업후 주점을 운영한다.  20대 시절, 일찍 시작한 주점 운영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일을 꾸렸지만,  종업원을 관리하고 매출에 신경쓰고 매일 다른 손님들을 맞으며 웃음을 띠는 것은 하루키에겐 몹시 고통스런 일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을 소개하길 혼자있는걸 좋아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교류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내성적 인간이라 했다.  그가 소설을 쓰겠다고 작정한 것은 우연이었다.

"소설을 쓰자고 생각을 하게 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있다. 1978년 4월 1일 오후 1시 반 전후였다. 그날, 진구 구장의 외야석에서 나는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야구를 관전하고 있었다.  (...) 배트가 강속구를 정확히 맞추어 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구장에 울려 퍼졌다. 힐튼은 재빠르게 1루 베이스를 돌아서 여유 있게 2루를 밟았다. 내가 `그렇지 소설을 써보자'라는 생각을 떠올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일이다. "  p. 53

세상일이 모두 계획하에서 이루어지진 않는다는 걸, 하루키는 몸소 보여준다.   더군다나 소설가가 되는 일은 밥먹고 사는 일로서는 적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날 이후, 그는 한 편의 소설을 썼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신춘문예에 응모했으며, 결국 문예지 신인상을 받고 전업 작가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면 하루키는 언제부터 달렸을까?  지금껏 이야기한 것은 그의 본업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부업이라고 할 수 있는 마라토너로서의 삶은 어떤 사연으로로 시작되었나?  내성적 인간과 소설가, 그리고 마라톤,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전업 소설가가 된 이후로 하루키는 소설 쓰는 일이 정신 노동이 아니라 육체노동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가 달리게 된 이유는 소설을 쓰는데 있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아주 간단한다.   달리는데 거창한 이유란게 있겠나 ?  평소 살이 잘 찌는 체질이었던 하루키가 선택한 운동으로서 마라톤은 여러가지 이점이 있었다.  첫째 동료나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 특별한 장비나 장소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하루키는 집 근처의 몇 백 미터 트렉을 돌기 시작하더니 곧 마라톤 풀 코스 도전에 나선다.  그의 달리기 인생은 업그레이드 되어 100킬로미터 울트라 마라톤과 철인 삼종 경기에 까지 이르게 된다.  그는 최근까지 25회 풀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 경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완주 기록은 선수들에게도 흔치 않다고 하니 대단할 일이다.  

대부분의 소설가, 작가들의 일이란게 조용한 공간에서 펜과 노트를 들거나 컴퓨터의 워드 프로세서에 마주 앉아 글을 쓰는 것이다. 집중력을 위해서는 환경이 중요해서, 소음은 절대적으로 차단되어야 한다.  하얀 백지나 하얀 컴퓨터 화면을 대하는 일이 프로 작가들에게도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닌가보다.  글 잘 쓰는 많은 작가들이 엄살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러한 글쓰기의 공포를 이야기하곤 한다.  하루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일찍부터 그는 달리기와 인생에 분명한 철학을 품고 있었다.  내가 작가가 될 것은 아니지만, 그의 태도에서 배울점이 많았다.  대개 사람들은 인생의 중용을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색깔을 감추고 비판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때가 많다.  하루키가 글쓰기와 마라토너로서의 인생을 이야기 할때, 그는 중용을 견지하지 않고 자신의 편파적인 생각을 거침없이 밝힌다. 

"내 생각에는, 정말로 젊은 시기를 별도로 치면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 되어 버린다.  주위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류보다는 소설 집필에 전념할 수 있는 안정된 생활의 확립을 앞세우고 싶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는 특정한 누군가와의 사이라기보다 불특정 다수인 독자와의 사이에 구축되어야 할 것이었다. "  p.65

마라톤으론 5KM 코스도 달려본 경험이 없다.  그러니 하루키가 이야기하는 마라톤의 매력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게 고통스러운 일이란건 안다.  최근까지 왕복 15KM 정도를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페달을 밟으면서 이 거리를 달린다면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본적이 있다.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한번 출발한 자전거는 되도록이면 세우지 않았다.  자전거란게 자신이 두발로 페달을 밟지 않으면 나가지 않는다.  오르막은 두 배의 힘이 들어가고, 근육에 피로는 쌓여간다.  그러나 내리막이 오면 쉴 틈이 존재한다.  페달을 밟지 않아도 자전거는 그 이상의 속도로 나를 태우고 나아간다.  그러나 마라톤은 그런게 없다.  달리지 않으면 걸을 수밖에 없고, 걷지 않으면 주저 앉아야 하는게 이치다.  하루키는 "나는 최소한 걷지는 않았다"고 자신의 마라톤 인생을 회고한다.  멋진 일이다.  그의 소설이 길 위에서 구상되고, 독자를 사로잡은 문장들이 마라톤을 통해 자신의 근육처럼 건강히 단련되었음을 우린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러너가 되시지 않겠습니까?' 라는 누군가의 부탁으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소설가가 되어주세요'라는 부탁을 받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가 좋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말려도, 모질게 비난을 받아도 내 방식을 변경한 일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누구를 향해서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무라카미 하루키, <내가 달리기를 말할 때...> p.228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며 내가 경험한 분명한 사실은, 그의 소설이 처음과 끝이 동일하게 그 끌림과 가독력을 유지 한다는데 있다.  그의 소설 문장들은 슬럼프가 없다.  이야기에 에너지가 넘치고, 쉼없이 재미와 흥미를 발산한다.  하루키가 세계 독자들을 매혹시킨 건, 어쩌면 그가 러너라는 또다른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소설가와 러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혼자 달려왔고 혼자 써 왔다.   우리들의 인생이란것도 여럿이, 둘이, 보다 혼자 감당해 나가야 하는 것이 많다.  아니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기에 혼자가 되면, 먼저 외롭고 두려워 한다.  나는 어느 부류인가?  하루키처럼, 달리기엔 내 뼈 근육이 튼튼하지 못하겠지만, 아무튼 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읽고, 쓰는 일 다음으로, 그걸 건강히 유지시켜줄 뭔가 육체적인 활동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그게 마라톤은 아니더라도 맑은 공기와 나무, 바람, 숲과 강을 소유한 자연속에서 하는 일이라면 모두 괜찮지 않겠는가?  내게 새로운 가르침을 준 하루키가 고마웠다.  달리면서 구상된 그의 건강한 소설들이 이제는 기다려진다.
 



 

201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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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식대로 살아왔다
공병우 지음 / 대원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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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공병우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아주 흐릿하다.  90년대 피시통신 시절이었다. 한국통신의 하이텔에 접속하면 하루에 한번 꼭 그의 이름으로 올라와 있는 글을 볼 수 있었다. 자세하게 읽은 기억은 없지만, 대강 세벌식 자판에 대한 홍보와 두벌식 자판에 세벌식을 사용할 수 있도록 무료 스티커를 제공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은 언제나 그의 직함으로 끝났는데, "한글 문화원 대표 공병우" 라고 돼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분이 돌아가셨단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고령에도 젊은 이들이 사용하던 매체에 글을 지속적으로 올리던 분이라 좀 독특하게 생각된적이 많았다.  나는 군대에 갔고, 그 이후 오랜시간 공병우는 내 기억속에서 멀어졌다.  얼마전 이오덕 선생의 책 <우리 문장 쓰기>를 읽다 공병우의 글과 마주했다.  이오덕은 이 책에서 수많은 예시문을 들고 와 한글 전용과 좋은 글 쓰기를 설명하는데, 공병우의 글도 그가 가져온 좋은 예시문 중에 하나였다.  마침, 두분은 한글 사랑이란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공병우가 91년 8월 조선일보에 발표한 짧은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 나는 현재 나이가 85살로, 젊은 반평생 동안은 한자혼용으로 글자 생활을 했고, 늙은 반평생 동안은 한글전용으로 글자생활을 하고 있다. 나의 이런 경험으로 추측해 보면, 한글 전용으로 1년에 발달할 수 있는 문화수준이 한자혼용으로서는 10년 이상 걸릴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 나라가 한글전용을 단행하여 로마자보다도 능률적인 글자생활을 하기 전에는 선진국의 문화수준을 따라잡을 수도 없고, 날이 갈수록 더욱 뒤떨어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오덕 <우리 문장 쓰기> p.302

이오덕과 공병우는 닮은 점이 많았다.  인상깊었던 것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전생을 추구했던 소임에서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젊은 나이에 이미 쇠락한 정신 자세를 가진 이들은 그에게 배울점이 많다. 그들은 자신이 평생 몸바쳐온 분야에서 죽을 때까지 힘을 다해 싸웠다. 

공병우가 책을 남겼을거란 생각에 서점에서 검색을 해봤다.  유일하게 그의 자서전 한 권이 검색돼 나왔다. <나는 내식대로 살아왔다>라는 제목이 붙었다.  제목부터가 마음에 끌린다.  출판사 소개글은 한국의 고집쟁이 가운데 6위로 공병우를 뽑을 정도로, 대단한 고집불통이었다는, 얘기를 전한다.  바로 사고싶었는데, 절판되었단다.  것도 거의 10년 가까이 됐다.  그러나, 어떤 책은 기어코 손에 넣어 읽고 싶은 책이 있는 법이다. 내 서가에는 얼마전 출판돼 나온 깨끗한 표지의 책들이 가득하지만, 그 모든 책을 제치고 이 책을 손에 넣고 바로 읽고 싶었다.  이후, 절판된 책을 중고서점에서 발견하고 뛸듯이 기뻤다. 도서관으로 발품을 파는 것보단야,  절판된 책을 소유하며 읽게 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 책은 자서전이란 장르로서 평범한 서술방식을 택했다.  시간순서별로 그의 삶을 구성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힘을 두가지 단어로 정리할 수 있겠다.  열정과 확신이다.  그는 평안북도 벽동군 출생이다.  팔삭둥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머리를 따고 서당에 다닌다.  서슬 퍼런 일제 시대였다. 열 네 살에 장가를 가고, 농업 학교에 입학해 평범한 면서기로 나아가는 길을 걷는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그에게 가르쳐준 인생살이의 비법은 6.26 전쟁에서 그의 목숨을 살린다.  "평소 남에게 적선을 하는 사람은 난리가 나도 산다" 라고 할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평생 안과의사로서 봉사에 전념하고, 많은 재산을 기부한 공병우의 삶은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그는 6.25 난리통에 적선한 사람들의 호의에 찬 증언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농업학교 시절 남달리 영특했던 공병우는 작문 시간에 한 편의 글을 쓰게 된다.  학교 교장과 자신의 학교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 작문을 통해 퇴학을 당할 위기에 처할 거란 생각과 달리, 담임과 교장 선생은 그를 격려한다.  교장은 농업학교를 중퇴하고, 의과 시험에 응시해 보도록 권한다.  훗날, 그는 정식코스가 아닌 일종의 검정고시를 통해 의사 시험에 통과했다.  한 편의 작문과 그 작문을 통해 인재를 알아본 일본인 선생이 그의 미래를 열어 준 것이다. 

안과 의사가 되고,   국내 최초로 서울 땅에 개인 안과 병원을 개원한다. 여기까지 그의 인생은 일제시대 한 엘리트의 성장담 정도로 읽힌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삶을 뒤바꿔논 만남이 이뤄진다.  공안과에 진료차 찾아온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은 공병우의 인생을 한글 타자기의 계발과 한글 전용 주창자로서 살아가게끔 만들었다.  그가 평생 안과 의사로서 이뤄냈던 봉사와 학문으로서의 의료 인생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와의 만남이후, 공병우는 최초의 기계식 한글 타자기의 실용화에 성공한 발명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이로써, 1938년 이극로 선생과의 짧은 만남이 그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라고 봐도 되겠다.

" 우리 조선 민족이 갖고 있는 한글에 대해 관심 가져 본 일이 있습니까?"
" 아직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의사 검정시험에 필요한 일본글만 공부했지, 소위 언문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언문이란 글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훌륭한 글인데, 일본놈들이 이 글을 못 쓰도록 탄압을 하고 있죠.
아니, 일본놈들만 그런게 아니라, 우리 조선 사람들까지도 제 나라 글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한 편이죠. 아니, 한술 더 떠 아예 한글은 글자가 아닌 것인 양 무시하는 식자들이 많습니다. "   P. 77 <공병우 자서전>, 나는 내식대로 살아왔다

공병우는 안과 의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한글 타자기를 연구한다.  일제 시대 별다른 연구 기관도, 학교도 없었고, 참고자료 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만, 영문 타자기를 가져와 `신체를 해부하듯 타자기 한대를 발기발기 뜯어 놓고' 연구할 정도로 열정이 넘친다.  나중에는 본업인 병원이 어려워질 정도로 진료조차 미뤄둔채 연구를 진행하다보니, 사람들 사이에선 공박사가 미쳤다, 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가 타자기 계발에 힘썼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지금껏 계발된 한글 타자기가 무척 불편했고, 한글 원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 글자 생산을 더디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글 원리에 맞는 자판 배열을 가지고, 기계적으로 속도가 빠른 타자기를 계발하고자 했다.  그는 의사로서 긴 논문을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제 시대 필경사을 고용해 정서하는데 애로점이 많았던, 개인적 필요성도 작용한다. 

그는 철저히 독학으로 훗날 세벌식에 기초한 실용적인 한글 타자기 계발에 성공한다. 광복후, 70년대까지 그는 안과의사인 본업과 세벌식 타자기의 계발자와 보급자라는 사업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지만, 정부의 표준판은 그가 계발한 과학적 세벌식을 철저히 무시한다.  이후, 그의 삶은 자신이 계발한 세벌식 자판의 보급 운동에 전념하고, 정부의 엉터리 표준 정책과의 기나긴 싸움으로 채워진다.  이 싸움은 90년대 그가 죽기전까지 계속됐다. 이 책은 그의 자서전이긴 하지만,  세벌식 타자기의 계발과 보급 운동이란 큰 테마가 주를 이룬다과 봐야 할 것 같다.  많은 부분, 그는 독자가 지겹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세벌식 타자기의 보급에 얽킨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가 80년대 후반 고령의 나이에 미국에서 한글연구소를 내고, 컴퓨터 시대를 맞이하며, 연구한 것도 세벌식 자판의 보급 문제였다.  그가  한국의 고집쟁이 6위에 오른 이유를, 우린 이 자서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한글 원리와 일치하는 세벌식 타자기 개발을 목표로 삼고 지금까지 연구하던 두벌식 자판을 미련없이 포기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는 기현상이 생겼다. 내가 이미 40여 년 전에 만들었다가 기계 공학적인 무리가 많은 것을 깨닫고 내버린 바로 그 두벌식 시스템을 요즘에 와서 정부 표준판이라고 정해 놓고 있으니, 정말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P. 85

이 자서전의 일부분에서 우린 공병우의 또다른 재능을 확인한다.  그는 평생 동안 꿩사냥을 즐겼다.  요즘에야 수렵이 그리 큰 인기가 없었지만, 광복후 유한층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얻은 스포츠였다 한다.  또, 80년대 초반 정부와의 오랜 타자기 표준판 싸움에 지쳐 버린 그가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사진에 관심을 갖는 이야기가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그는 취미로 하는 일에도 전심전력을 다했다는 데 있다. 꿩사냥과 사진, 모두에서 그는 한국 최고가 된 기록을 남긴다.  사냥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많고,  일흔 고령에 시작한 사진은 국선에 입상할 정도의 실력과 사진집을 펴내는데까지 이른다.  타자기 계발과 정부와의 표준판 싸움에서 보여준 그의 집요함과 승부욕은 본래 그의 기질이었음을 독자는 느낄 수 있다.  

이 자서전에서 우린 짧지만 분명한 공병우식 인생 철학을 만난다.  교육과 실력에 대한 그의 이야기에 수긍이 간다.  "나는 지금도 매일 공부를 한다. 교육계에서는 평생 교육이란 말이 있는 모양인데 나는 바로 그 평생 교육을 목표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p.36)  "실력 있는 사람이 정당한 대접을 받고 사는 사회가 참다운 민주 사회라고 생각한다."(p.36)  의사로서, 또 전쟁을 거치며 얻게 된 생명에 대한 소신을 그는 피력한다. " 인간의 생명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안전을 위해 예방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문명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여길줄 아는 사람이 남의 생명도 소중히 다를 줄 아는 법이다."(p.123)  90살 가까이 장수했던 그는 건강을 지킨 비밀을 밝힌다. "많이 먹는 것은 만병의 원인이 된다." (p.241) 

300 여 페이지에 이르는 짧은 자서전이지만,  이 책에는 한글을 사랑했던 이름난 고집쟁이 공병우의 90 평생이 힘차게 뜀뛰고 있다.  그의 사후, 몇년 안가 자서전은 사람들의 관심밖으로 밀려 난 모양이다.  이제 절판되었으니, 어느 도서관의 구석진 서가에서나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릴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훗날, 나같은 독자가 공병우의 삶과 그가 남긴 자서전의 매력을 발견하는 날이 많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평생 세벌식 타자기와 세벌식 자판 보급 운동에 전념했던 그의 삶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정당하게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공병우의 말대로라면, 우린 7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공청회 한번 제대로 거치지 못하고, 전문성도 없는 이들이 비과학적 두벌식 자판을 표준판으로 설정한 원죄로,  세벌식에 비해 훨씬 느리고, 한글 원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두벌식 자판을 현재 표준판으로 쓰고 있다.  뭔가 배울때 힘이 든 것은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컴퓨터 자판은 아주 좋은 본보기다. 

독수리 타법으로 연명하는 컴퓨터 사용자들이 많은데, 표준을 바꾼다는 것은 앞으로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까지 자신이 연구한 세벌식 자판 보급에 전념한 것은,  고집 때문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자판 배열에 있어선 한국 최고의 전문가였다. 교육기관과 서적이 전무한 시절, 그는 영문타자기를 갈기갈기 해체하며, 독학으로 타자기 자판 설계를 연구한 바 있다.  그렇게 피땀어린 노력을 70년대 군사정권의 비전문가들은 알아줄리가 없었고, 무식한 관리들은 표준판을 제멋대로 설정해 버린다.  공병우는 실제로 70년대 유신시절, 정부의 표준판 정책에 엇박자를 둔다하여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적이 있다.  현재 전문가들도 세벌식 자판의 실용성과 과학성을 높게 사고 있다.  언젠가는 그의 꿈이 실현될 날이 대한민국의 역사에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공병우의 이 자서전 <나는 내식대로 살아왔다>는 세벌식 타자기의 계발과 보급 운동에 헌신했던, 한글을 사랑했던 안과의사 공병우의 열정과 확신에 찬 90년의 기록으로 우리 앞에 다시 부활할 것이다.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처량하지도 않고, 짜증스럽지도 않다. 그야말로 나는 나의 고독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일하고 싶을 때 일을 하고 편리한 취사 시설을 이용하며 언제든지 먹고 싶을 때 원하는 대로 먹을 수도 있다.  정말 나의 고독은 즐거운 고독이다."  p.243

연구와 열정의 삶은 남들이 보기에 고독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실제 고독을 즐긴 것이고, 그 고독은 즐거운 고독이었다고, 쓰고 있다.  우린 오늘 삶에서 어떤 목표의식를 갖고, 어떤 열정을 태우며, 어떤 고집을 부리며 살고 있는지 묻고 있는 책이다. 그런 분명한 철학이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병우의 자서전은 여전히 많은 질문과 반성을 던진다.   과연 나는 내식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 



201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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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5-19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박사님은 돌아가시고 나서도 외국 사는 자식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고,
본인 시신을 대학에 기증하셨답니다. 장기 기증은 아쉽게 노구여서 안 됐구요.

개츠비 2010-05-20 22:44   좋아요 0 | URL
내식대로 살기가 어려운 시절입니다. 배울점이 많은 분이고, 일제시대,6.25전쟁,유신 군사독재 모든 시절을 겪어서 공박사님 삶이 곧 20세기의 한국 역사같더군요. 올바르게 살기 힘든 시절임에도, 옳게 살기 위해 평생 노력하신 분입니다. 공박사님 삶을 닮고 싶네요.
 
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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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범신 - <촐라체>와 <은교>, 욕망의 층위를 다루는 소설들

2년전 <촐라체>를 읽었을 때다.  배다른 형제인 상민과 영교의 촐라체(히말라야 6000미터 고봉) 등반기를 다룬 소설은 단순한 등반 소설로 읽기엔 아까웠다. 그러나  이 소설을 등반 소설로 읽은 이들이 많았고, 충분히 그럴만도 했다.   히말라야의 최고봉은 아니지만,  4000 미터의 수직 빙벽을 자랑하는 악명높은 산에 도전하는 두 젊은이의 열망을 담고 있는 소설에서 난 그들의 용기와 형제애를 눈여겨 봤다. 또, 그들 앞에 놓인 고봉의 수직 빙벽은 그들이 삶에 마주한 해소불가능할 것 같은 절망의 다른 형체를 드러내 놓기도 한다.  나는 2년 전 리뷰에서 이렇게 썼다. 

"겨울, 혹한의 설산에서 겨우 구원된 상민과 영교, 그리고 `나'는 무언가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제 막 깃든 희망의 불씨를 지펴보려하는 노력을 엿보인다.  그들 각자의 삶은 촐라체를 통해, 다시 정리되고, 다시 재생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작가로서의 길을 갈 것이고, 상민과 영교는 동상으로 잘라낸 손과 발을 통해서라도, 이 생을 성실히 살아갈 것이란, 암시를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구점은 남아 있다.  그들을 그 엄혹한 촐라체로 내몬, 내면의 공허, 존재의 공허는 사라지지 않았고, 사라질 수 없다. 나는 그것이 해결된 듯 하면서도 석연찮이 종결짓고 있는, 이 소설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촐라체 리뷰 

박범신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지 않았다.  그러나 <촐라체> 이후, 그의 소설에 깃든 중량감이 마음에 들었다.  <촐라체>는 설산을 오르는 인간의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작품이다.  그건 항상 허망한 것을 좇아 정열을 불사르는 인간의 오류를 드러낸 소설이기도하다.  나의 이런 평가는  종교안에서 궁극의 구원이란 관점을 놓고 볼때,  그들의 노력이 무위하단 생각에서였다.  1953년 에드먼드 힐러리는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를 올랐다.  그보다 30년 앞서 에베레스트 정복에 나섰던 조지 말로니는 비록 정상 부근에서 실종됐지만, 왜 산에 오르냐는 질문에 그 유명한 말을 남긴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Because it is there)"  

<촐라체>는 욕망에 관한 소설이었다.  이 소설에서 드러난 욕망은 목숨을 걸고 설산을 오르는 인간의 수직적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한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쉽게 드러나지 못한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이성적인 설명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말로니의 답이 싱거운 이유다.  욕망에 형체가 없고, 욕망에 한계가 없다는 것은 두려움을 준다.  설산의 수직  욕망은  목숨을 내건 도전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제 작가는 <은교>라는 소설을 들고 나왔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 미친듯이 한 달 반만에 써" 완성한 작품이다.  무엇이 작가의 펜을 내달리게 했을까?   이 소설은 한 노시인의 섹슈얼리티[성욕,성생활]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작품이다.  풍채높고, 존경받는 노시인은 뭇 사람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그것을 감수하고 고매한 예술이 성욕이라는 치부를 통해 벌거벗는 과정을 우린 소설 <은교>를 통해,  체험한다.   결과적으로 <촐라체>와 <은교>에서 내가 본 것은 하나가 아닌가?  인간은 욕망의 덩어리이고, 욕망의 층위는 다양하지만, 결국 모든 욕망은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 예술의 옷을 입거나, 고산에 대한 의지를 담고,  17살 여자 아이에 대한 뜨거운 시선을 품는다.

층위의 다양함은 때로 이성 그리고 도덕과 양심에 반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본질이 추한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어떻게 새로운 층위로 변화시키느냐의 문제가 중요하다.  <촐라체>의 수직적 본능은 무한대의 욕망이 형제애와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통해,  지상 생활로의 복귀라는 긍정적인 결론을 이끈다.  그렇다면,  <은교>의 섹슈얼리티가 에로스와 아가페로 나아갈 통로를 마련해 주고 인간의 성적 욕망을 판타지로 치환함으로써 독자와 작가가 합의할 지점을 설정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 과정이 소설 <은교>를 통해 지켜보고 싶은 대목이다.
 

2. 젊은 작가의 부정과 노시인의 일탈은 무죄 

일탈과 부정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노시인 `적요'와 그의 애제자 `서지우'의 연대기는 용기의 드라마다. 아무리 시가 순수와 정직을 뿌리에 두고 있다 하더라도, 죽음을 앞에둔 명예로운 노시인이 손녀뻘 되는 17살 여자아이에게 욕망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 사실이다. 은교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 어린 처녀이고 나는 예순 아홉 살의 늙은 시인이다. "  박범신, <은교>, p.11

노시인 적요, 그는 어떤 사람인가?  평생 12권의 시집을 냈다.  내는 시집들은 평단과 독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시 이외엔 발표한 글이 없다.  그는 진정 시만 썼던 시인이었다. 그의 시엔 시대를 통찰하는 힘과 시대를 고백하는 양심이 담겨 있었다. 민주화와 개발 독재를 거치며, 그는 시대를 조망했고 하나의 담론으로 언제나 시대를 전망하고 이끌었다.  그의 시는 문단과 정치, 사회운동과 종교계의 지지를 받았다.  일흔에 다다른 그의 명성은 더이상 이를 데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사후에 Q변호사에게 남긴 비밀노트엔 살인의 고백이 담겨 있다. 그것도 평생 자신을 위해 헌신했던 애제자 서지우를 자동차 사고를 위장해 죽였다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노트가 사후에 공개되길 희망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이 세웠던 시성(詩聖)의 탑을 무너뜨리길 희망한다.  더군다나, 그 노트에는 그를 `할아부지'하며 따랐던 천진난만한 아이, 은교에 대한 욕망이 그득하다.  그는 은교를 범하진 않지만, 마음속에선 수십번 은교를 품에 안고 욕망한다.

서지우,는 스승 적요의 희생냥은 아니다.  스승의 눈에 차라리 `문학을 안게 절망이 된 사람'으로 묘사되는 `멍청한 제자'는 스승과 협잡하여 미스터리 포르노 그라피를 발표한다.  물론 그 작품은 스승 적요의 것이다.  단번에 베스트셀러에 진입하는 스승의 작품 <심장>을 통해, 서지우는 문학적 명성이 건네는 꿀을 핥는다.  단맛을 알아버린 서지우에게 문학은 명성과 돈을 갖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공정한 것이다. 서지우는 스승에게 충성과 헌신을 다했고, 스승은 그에게 가짜 재능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 공정한 게임이 파탄나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스승 적요의 눈에 들어와 단번에 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은교'라는 아이를 통해서다.

"그렇지만, 나는 어두컴컴하고 너는 시리게 푸르다. 어찌 그걸 부정하랴.  젊은 날에 만났다면, 그리하여 너와 나 사이에 아무런 터부도 없었다면 너를 만난 후, 나는 아마 시를 더이상 쓰지 않았을 것이다."  p. 91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는 공생의 관계다.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관계에는 사랑이 없다.  필요성은 사랑이 아니다.  노시인 적요와 애제자 서지우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였다.  그러나 악어인 적요가 이제 악어새인 제자와 경쟁 관계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경쟁은 적대의 전 단계이자, 경쟁은 필연적으로 적대로 가게 돼 있다.  은교를 육체와 정신으로 욕망하고 범하는 이들은 공생관계에서 공범관계로 돌입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눌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또 그것은 일탈과 부정이 도달할 마지막 처소이기도 하다.

다만,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 은교는 누구인가?  알 수 없다.   작가는 은교를 형상화 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지와 대사로서 존재할 뿐이다.  욕망의 주체에게 그 대상은 대개 이미지로서만 존재해야 욕망하기 쉽다.  그게 은교의 정체가 흐릿한 이유일까?  구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끝없이 추락하는 이 두 남자의 세계를 알고 속아주는 포용력과 범할 수 있으나 범하지 않는 인내라는 미덕을 통해 긍정적 의미의 `사랑'인, 아가페로 변화시킨다.   자신을 살해하려는 스승의 은밀한 계획을 따져묻지 않고 죽음이란 운명에 도달하는 서지우는 그 음란함에도 독자의 지지를 받는다.  욕망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상상하는 노시인 적요의 모습은 바람이 아니라 로맨스 였다는 주장만큼 재미있지만 대신 은교에 대한 욕망이 사랑으로 변화되었단, 진정성을 품는다.  

이 소설은 세상의 모든 노망든, 망측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사랑이란 감정에 깊은 공감으로 저항하고, 면죄부를 주려한다.   사실, 서지우나 적요가 품고 있는 욕망은 우리들의 욕망이기도 하니,  함부로 돌 던질 수 없다.  그들이 자신의 욕망에 무죄를 선언하는 근거요, 당당함이다.    비난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모든 인간은 욕망에 약하며, 우리는 쉽게 유혹당한다.   17살, 은교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3. 어떤 욕망에 면죄부는 가능한가? 

이 소설은 섹슈얼리티에 관한 소설이기는 하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서지우, 부족한 재능을 가진 문학지망생, 그가 가진 상승의 욕망은 스승의 또다른 작품을 훔치는 것으로 지속돼 간다.  노시인 적요,는 마침내 서지우가 자신의 목숨까지 빼앗고 몰래 숨겨둔 미발표 소설, 희곡, 산문 등을 가져갈 것이라 상상한다. 섬뜩할 일이다. 영혼을 훔쳐 명성을 유지하는 일.  욕망의 층위는 다양하지만, 그 성질은 같다는 것을 그가 보여준다. 

그러나, 은교의 등장은 이 관계를 전복시킨다. 젊고 힘있고 탱탱한 서지우에게 늙은 시인 적요는, 열등감을 갖는다.  서지우와 은교의 성교 장면은 그의 열등감이 폭발되는 정점이다.   늙고, 병든 몸은 서지우의 재능의 전무함과 대비될 만 하다.  그 둘은 자신이 갖지 못한 대상을 욕망한다.  서지우는 스승의 재능을,  노시인은 서지우의 젊음을, 탐한다.  그러나, 탐낼 수는 있지만 가질 수는 없을 때 인간은 범죄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서지우가 스승의 작품을 훔치고, 열등감에 사로잡힌 노시인이 애제자를 계획 살인하려 든다.  상상이 상상으로 흐르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질 때 판타지는 그 모든 긍정적인 요소까지도 잃어버린다.  

이 소설은 낯뜨거운 문장들로 가득하다.  설정은 우리의 취향과 몸에 맞지 않는다.  17살, 은교를 욕망하는 노인은 아름답지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작가는 나름의 방어장치를 둔다.  마음으로 욕망하지만,  젊은 서지우처럼 은교를 노인의 몸으로 탐하진 않는다.  그러나, 마음으로 간음한 것도 이미 범죄한 것이다. 더구나, 그 빈도에 있어선 은교는 시인의 아내가 되고도 남는다.

독자는 하나의 문제에 닿는다.  적요는 왜 이 모든 궁지에 스스로를 밀어 넣을까?   나이 들고 병든 몸은 죽음을 예약하고 있고, 죽음 이후 문단은 그를 기념할 것이다.  평생 시만을 썼고, 발표하는 시마다 세상의 죽비가 되었던 그의 시편들은 위대했다. 그의 명예로운 죽음은 불멸의 명성을 기약했다. 그럼에도, 시인에게 남겨진 지상의 몇달 동안이 뭐 그리 중요할까?  은교라는 처녀에 대한 정욕, 그의 말대로 사랑이란 감정을 풀어놓고 열망하며 생을 송두리째 내맡길 만한 가치가 도대체 은교에겐 있는 것일까? 이 소설에서 겁데기의 영혼을 갖고, 싱싱한 육체만으로 존재하는 은교에게 말이다.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다듬고, 높이하고, 추구했던 것은 일평생 시인의 길이었다.  그것은 인간에게 내재한 자기실현의 욕망이다.  그러나 독자는 한가지를 정확히 짚을 수 있다.  시인의 길과 싱싱한 육체에로의 길이 결국 다르지 않다는 걸 말이다.  그것은 생명의 길이다.  시로서 영생하느냐, 육체를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이어가느냐, 인간의 욕망이 해체되는 순간을 이 소설은 이적요의 고백을 통해, 드러낸다.

"생의 마지막에 너를 통해 만나 경험한 본능의 해방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인생. 나의 싱싱한 행복이었다. 그게 바로 나 이적요다. 이적요는 본능을 가진 인간이었뿐 신성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다."  p.398

시인의 길은 인간의 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인을 통해, 무언가 인간을 떠난 가치를 시와 시인에게 부여하려 든다.  왜냐하면, 범속한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은 공통적인 것이지만 우린 자주 그것을 부정하고 감추려는 기질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노시인의 정욕은 정신적인게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다.  정신적인 것은 시고, 고매한 것이고 육체적인 것은 더럽고 추한 것이다, 고 우린 흔히 생각한다.  이 고정관념을 벗어나긴 쉽지 않다.  모든 범죄는 향락과 연결된다.  돈과 명성을 앞지르는 건 향락에 대한 욕망,  정욕에 대한 궁극의 의지와 같은 것이다.  돈과 명성은  정욕에 이르기 위한 스폰서에 다름 아니다.  그들이 밤에 취하는 것은 결국 육체다. 

이 작품은 우리들의 욕망에 가리워진 어두운 장막을 걷어낸다.  서지우의 욕망과 노시인 적요의 욕망을 통해 그 층위의 다양함을 경험하게 된다.  문학이 줄 수 있는 건 대안이 아니다.  드러내놓는 것, 펼쳐 놓는 것, 몰래 다듬고 사랑했던 욕망을 대중앞에 떳떳히 고백하는 것, 함께 고민하는 것, 이것을 이 소설은 시도한다.  문득, 우리들의 이성과 양심을 파고들고 흔들게 하는 설명될 수 없는 정열, 욕망, 그 모든 섹슈얼리티에 대해 이 소설은 하나의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밤에만 쓴 소설이니 독자들도 밤에만 읽기를 바란다"고 썼다.   이것은 섹슈얼리티를 염두에 둔 말이다. 사실, 그건 낯뜨겁다.  그러나 욕망의 층위 모두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낮에 읽어도 상관 없을 듯 하다.

4. 삶, 욕망의 판타지

사막의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 머리칼에 찬 바람이 스치고
짙은 콜리타스 향기
찬 바람에 실려오는데
저 멀리 앞으로 희미한 불꽃이 보이네
머리는 무거워지고 시야는 점점 흐려지고 있어
하룻밤 쉬어가야겠는데

               - 이글스Eagles, <호텔 캘리포니아>에서

 

상상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이다.  영화가 끝나면 말끔한 현실이 나온다.  현실에 충실한 도덕적인 사람일수록 상상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섹슈얼리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정욕은 때로 실제의 행위보다 상상력에 더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을 통해 독자는 상상력이 가진 힘을 만끽할 것이다.  정욕이 상상력의 원동력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저마다 마음속에 `은교'라는 판타지를 품고 살아가는 `동물'들임을 이 소설은 들춰낸다.  한 편의 소설을 통해, 자신의 본능을 거울처럼 비춰보고 이모저모 살펴보는 건, 긍정적인 일이다.  문학이 주는 최대의 혜택은 누군가를 피해 입히지 않고, 극한으로까지 나를 몰고 가보는 일이다. 

적요가 은교에 대한 판타지를 묘사할 때 인용한,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란 가사의 마지막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You can check out anytime you like, but you can never leave  당신은 언제든 원할 때 방을 뺄 수는 있지만, 결코 떠날 수는 없을걸요. " 우리는 판타지의 세계를 벗어날 순 있지만, 욕망의 방안에서 영원히 탈출 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진 않을까? 

원숙한 작가가 독자앞에 용기있게 먼저 `은교를 사랑했다'고 고백함으로써 우리들의 숨겨진 판타지와 상상력은 범죄와 추함의 나락에서 구원된다.  이 소설은 우리들의 익숙한 욕망에 면죄부를 주는 소설이며, 그 모범적 답안까지 준다.  자신의 솟아나는 욕망을 부정하면 할수록 그 욕망은 비틀게 나아간다.  상상이 상상으로 흐르도록 놔둘 일이다.

그러니, 우리도 지금 `은교를 사랑하고 있다'는 내면의 소리를 허락하자.   다만, 그건 "내 마음속 영원한 젊은 신부, 은교"(p.394)가 되어야 한다.

                 

                                                            20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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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장 쓰기 오늘의 사상신서 155
이오덕 지음 / 한길사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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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글쓰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다.  언젠가 서점을 돌아보다 글쓰기 책만 모아둔 곳에 멈춰선 적이 있다.  글쓰기에 관한 모든 비밀이 그곳에 숨어있기라도 하듯 여러가지 글쓰기 책들이 나와 있었다.  예전에는 글은 특별한 사람만 쓰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소설가,수필가, 시인 같은 작가들은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글을 썼다하면 소설가처럼, 수필가처럼, 시인처럼, 써야 글을 잘 쓴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쓰지 못하면 글을 쓸 자격도 없는 것이니,  간혹 어렵게 쓴 글 한 편을 쳐다보고  얼굴이 따갑고 창피해 하는 경우가 있었다.   글을 왜 쓰는가 ? 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제쳐두고, 오직 작가들처럼 `글을 잘 쓰기'위한 것이 글쓰기 교육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내가 지금껏 읽어왔던 몇 편의 글쓰기 책도 마찬가지고,  내가 그러한 책을 읽어온 이유도 그와 같다.   

이오덕의 <우리 문장 쓰기>를 읽은 것도 글을 잘 써보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글을 잘 쓰는 재주를 가르쳐주는 여타의 책과는 달랐다. " 왜 글을 쓰는가 ?" 라는 본질을 먼저 가르쳐준 것이다.  난 조금 충격을 받았다.  이오덕은 어떤 분인가?   43년간 아이들을 가르쳤던 시골 학교의 교사요, 동화,수필,동시 등을 발표하고 평론까지 썼던 작가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이분의 이력은 평생 우리말과 글 살리기를 실천한 일이다.  이 책이 내게 충격을 준 이유는 아주 명확하다.  내가 지금껏 글이라고 썼던 게 `거짓'과 `흉내내기' 로 일관해 왔단 생각 때문이다.  우리 글을 버리고 멋을 부리기 위해 한자어를 골라 쓰고, 작가들의 글쓰기를 본따 문장을 비틀고, 일본어의 어법인 것조차 알지 못하는 무지로, 일본어식으로 썼던 글쓰기의 못된 버릇을 이 책을 통해 거울처럼 비춰볼 수 있었다.

흔히 글은 말보다 어렵게 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잘 쓴다는 것은 어렵고 유식하게 쓴다는 말과 동격이 되었다.  책을 많이 읽고 어휘력을 늘리는 것은 곧 어려운 한자말을 골라 쓰는 재주를 늘리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우리가 대화에 사용하는 어휘는 무척 쉽다.   만약, 대화체에 글을 쓸 때처럼 유식한 한자말을 많이 넣는다면 이해가 어렵고 뜻 풀이가 잘 안 돼, 대화가 안될 것이다.  모국어를 쓰지만 대화가 안돼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언어는 쓸모가 없다.   이오덕은 주장한다.   글과 말은 하나요, 글을 쓸때도 말을 할 때 처럼 쉬운 우리말로 쉽게 쉽게 풀이해 써야 한다.  언어의 기본은 언어를 통한 정보의 교환이나 전달이다.  글이 어려울 필요가 없는 것은, 이 기본 목적 때문이다.  어렵게 써서 뜻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멋부리고, 유식하게 쓴 글 한 편의 가치가 어딨겠는가?  이오덕은 이 문제를 글쓰기의 기본문제로 내세운 것이다.

새해 첫 날 발표하는 신춘문예의 당선작들을 몇 해 전부터 관심있게 지켜봐 왔다.   영화평론이나 문학 평론으로 당선된 작품들을 읽은적이 있는데, 한마디로 악몽이다.  대학 교육을 받은 평균치의 시민인 내가 신문에 발표된 이러한 당선작들을 도무지 해석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엔 내 공부의 양이 한참은 모자란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이오덕의 주장대로라면 그런 글들은 `쓰레기 잡탕'과 불과하다.  글의 1차적 목적은 전달과 이해에 있다.  특수한 직업 세계의 전문용어를 담고 있지 않다면, 글은 써놓고 일반 시민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춘문예의 평론 당선작들을 보라.  한국말을 썼는데, 이해할 수가 없다.  지나간 일이지만, 당선작을 낸 신문사와 심사위원들, 혹은 그 글을 쓴 작가 본인도 자신이 무슨 소리를 주절거린건지 모르긴 마찬가지 아닐까, 의심이 간다. 

"그 첫째는 `글은 말보다 어렵게 써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쉽게, 더 친절하게 써야 한다'는 사실이고, 다음 또 하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중국 글자말을 쓰지 말고 우리 말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오덕 <우리 문장 쓰기>, p.32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언어 교육이 초등학교 때부터 잘못됐단 생각을 했다. 요즘 아이들이 쓰는 글을 보면, 어른들처럼 유식하고 멋부린 문장들을 쓴다. 즉 흉내내기에 앞장서는 것이다.  교과서에 실리는 문장들은 어른 작가들이 쓴 글이고, 잘 쓴 글은 어른처럼 글을 유식하게 써야 한다,는 생각을 어릴때부터 새겨주었기 때문이다. 이오덕은 글쓰기의 기본은 문장에 있질 않고, 한 사람의 삶 안에 있다는 말로 이 잘못된 교육을 비판한다.  좋은 글은 자기가 사는 생활 안의 사실적인 사건들을 우리 말로 정직하게 써 내는 것이 기본이다. 소설가나 시인이 쓰는 언어는 평범한 사람들이 쓰는 글이 될 수 없다.  창작글은 작가들이 쓰는 글이기 때문에, 생활글과 갈라지고 그것이 글쓰기의 모범이 될 수가 없다.  굳이 우리가 작가들의 글쓰기를 흉내낼 필요가 없는 이유다.

이 책에서 얻은 다음 소득은 좋은 우리글이 되기 위한 요건들에 관한 것이다.  중국 문화권의 영향을 오랜시간 받아왔기 때문에, 일부에선 우리말과 한자말은 갈라설 수가 없고, 우리말을 잘하기 위해선 한자를 잘 알아야 한다, 라는 주장을 줄기차게 해왔다.  나또한 그런 생각을 갖고 살아 왔던 것 같다.  우리말로만 글을 쓰기엔 어휘가 부족하기에, 중국글자말을 섞어 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우리 국민의 상당수가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오덕은 이 책에서 수많은 예시문을 들고와 이런 주장의 허무맹랑함을 야단친다.   생각보다 굳이 한자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우리글을 충분히 잘 쓸 수 있었다.  예시문에서 확인한 바로는 우리글로만 쓴 문장은 이해하기가 쉽고, 글도 훨씬 맛깔스러웠다.  즉,  잘 쓴 글은 유식한 중국글자말을 가져온다거나,  글의 멋부리기에 기대지 않는다는 거다.

고등 교과서에 나오는 기미독립선언문의 문장을 기억할 것이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로 시작되는 이 글은 우리 글인가?  일제 시대 민족 독립의 희망을 품고 써낸 이 글은 번역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요즘 학생들이 이 문장을 국어책에서 보고 이 한자 범벅인 이런 글을 왜 배워야 하는지?  묻는 학생은 없을 듯 하다.  우리가 이런 문장 교육을 받고 어른이 된 것이다.  문제는 100여년 전이나 오늘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데 있다.  중국과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지나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런 글을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하며 한자말을 섞어 뜻도 알아볼 수 없는 문장들을 써 내고 있지만, 누구하나 반성하는이가 없다.   이 책에서 이오덕의 반복되는 주장은 한결 같다.  쉬운 우리말을 놔두고, 왜 번역이 필요한 한자어를 쓰고 그것을 잘 쓴 글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더불어 그것의 수치스러움을 깨닫지 않는 낯 두꺼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한자어를 쓰는 것은 말의 경제에서도 몹시 낭비되는 일이다.   우리말로 쓰면 될 것을 어려운 한자말로 쓰면서 해석이라는 또다른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보고 듣고 일한 것을 정직하게 쓰는 것이 모든 글쓰기의 기본이 된다는 믿음을 거의 모두 잃어버리고, 글이라면 보통사람들이 쓸 수 없는 것으로, 거짓 얘기 잘 만들어내고 유식한 말재주 잘 부리는 특별한 재질을 가진 사람만이 쓰는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p.162 

요즘 많은 글쓰기 관련 책이 출판되고,  글쓰기 교육이 활성화 된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책과 강의에선 글을 어떻게 잘 쓰느냐? 하는 기교나 기술을 가르치는데 힘을 모은다.  이런 모든 교육은 이오덕의 책을 읽고 난 후, 앞 뒤가 바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영어를 쓰는 민족은 다양하지만, 일본어나 중국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일본인과 중국인이 대다수다.  한국어는 말할 필요가 없다.  한글 속에는 민족과 문화라는 큰 뿌리가 심어져 있다.  한글을 빼고 한국인을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다.  굳이 한글이 품고 있는 위대성에 관해 세계 석학들의 최근 연구 결과를 내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글이 오염되고, 훼손되면 민족 혼이 오염된다.   그래서 한글 속에는 한국이란 민족의 미래가 담겨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글의 가치를 깨닫고 바른 한글 사용을 주장했던 이오덕과 쉬운 세벌식 자판 보급운동에 앞장섰던 안과의사 공병우 박사 같은 분은 나라의 언어가 외국의 지배와 종속을 거치면서 오염된 현상을 고발하신 분들이다. 그들의 고발 내용은 그간 작은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염의 실상은 심각했고 그것을 알고 있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 오염을 주도했던 이들이 내노라하는 지식인들였단 사실은 실망스럽다.  지식인들은 대표적으로 한국어를 망치는 이들이다. 지식인은 글을 쉽고 쓰고, 이해할 수 있게 쓸 것을 이오덕은 이 책에서 몇 번이나 강조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글의 본래 목적은 이해와 소통이기 때문이다.

우리 말이 아닌 것으로서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의, ~ 적, ~ 등 은 일본말의 잔재다.  되도록이면 쓰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미래, 창조적, 생물학적, ~ 등, 은 안 쓰고도 충분히 글을 쓸 수 있다.  특히 ~적 이란 말은 지식인들이 주로 많이 쓰는데 이건 명확한 일본말 어법이란걸 명심해야 한다.  ~적이라고 쓰는 대부분의 글은 유식한 말투로 쓰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영어 번역체의 문장들인 수동태 형식의 어법은 되도록 쓰지 말아야 한다.  일본말과 중국말에 오염된 우리글은 또다시 영어 교육을 통해 번역체라는 괴물에게 피해를 입었다.   ~의하여, ~하여지다, ~되어지다, 그녀(이오덕에 따르면 그녀란 대명사는 우리말이 아니다. 오직 영어 번역체이므로 그녀를 쓰지 말고, `그'라는 한국어를 써야 한다), 완료형의 번역투인 ~였었다. 이었었고, 는 우리말이 아니다.  절대로 쓰면 안 된다.  다음으로 무수한 한자어들은 쉬운 우리말로 바꿔써야 한다.  한자말을 대체할 수 없다면 쓸 수 있겠지만, 가능한 글은 우리말로 쓰는 것이 맞다.  유식하게 보이려고 한자말을 골라 쓰는 것은 거짓 글쓰기에 앞장서는 것이다.  연근(蓮根)을 풀이한 국어사전에는 "연의 지하경"이란 괴상한 글이 나온다. 쉽게 풀이한 것이 아니라, 더 어렵게 쓴 것이다. 국어 사전이 일본의 책을 단순 번역해 놓았기 때문이라고 이오덕은 설명한다.   `연뿌리'라는 쉬운 우리말이 있는데, 연의 지하경이라니...?   국어 사전이 우리말 망치기에 앞장섰던 거였다. 

~에로의, ~로서의, ~으로부터의, ~와의, 유년과 역사에로의 여행,  이런 글은 대표적인 영어 번역투이므로 쓰면 안 된다.  무수한 한자어들은 다 예로들수조차 없다. 몇가지를 들면,  종언(끝장, 마지막), 진화(불끄기), 노정(길), 화훼(꽃), 화제(얘깃거리), 전범(본보기), 사고(생각), 무수하게 많다. 우리말로 풀어 쓸 수 있다면 풀어써야 한다.  그게 훨씬 말의 경제를 위한 길이고, 글을 읽는 이를 배려하는 일이다.  한자어를 아무런 생각없이 가져다 쓰고, 한자 공부를 해야 우리말의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앞뒤 바뀐 주장을 하는건 잘못이다.  한자어를 쓰기전에, 대체할 수 있는 우리말로 쉽게 쓰려는 노력을 지식인부터 앞장서 실천해야 한다.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조금도 불리지않고,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쓴 글, 이런 글이 좋은 글이다.  생활감상문은 이런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드물다.  모두가 허세를 피우고 유식한 척, 잘난 척하는 속임수로 글을 쓰는 것 아닌가 ?  문학이고 뭐고 하기 전에 사람부터 되고 볼 일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학이라는 글들이 얼마나 말재주만 부려 놓은 글이고 거짓으로 차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p. 293

이 책을 읽으며 그간 내가 써왔던 글들을 되돌아 봤다.  창피하고 수치스런 글을 써왔다.  책에서 읽은 작가들의 글을 흉내내고, 어려운 한자어를 섞어 유식한척 멋을 낸 경우가 흔하다.  일본어와 영어번역투, 한자어와 외래어의 무분별한 잡탕이 곧 내 글이었다.  이오덕의 <우리 문장 쓰기>는 내가 지금껏 읽은 그 어떤 글쓰기 책보다 훌륭한 우리글 쓰기의 교과서가 될만한 책이다.  글은 멋내고 과시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이오덕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 사람의 일 세가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는 일하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생활인은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소재를 발굴 할 수 있다. 골방에 들어앉아 책만 읽고 글만 쓰는 작가들은 반성할 일이다.  둘째는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오덕이 말하는 자기 표현이란 학자부터 노동자, 농민, 주부,어린이 모든 영역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직한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사회가 글쓰기의 바른 방향임을 의미한다.  세번째는 남들의 표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책읽기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의 삶이 일하고, 쓰고, 읽기라는 세가지로 돼 있다는 이오덕의 주장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  삶 안에서 읽고 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새삼 이 책에서 발견하고 내 생활가운데 글쓰기와 책읽기가 차지하는 남다른 비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 오직 살아 있는 우리 말을 쓴다는 것, 이것 만은 절대로 잊지 말고 ! "  이오덕 선생님의 한글 사랑이 책안에 절절하다.  한글을 바르게 쓴다는 것은 중국과 일본 미국이란 강대국의 지배와 통제끝에 남은 글의 오염을 고치는 일이었다. 이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다.   나라는 독립되었지만, 글은 식민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고서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몰라서야 말이 되는가?   글쓰기의 목적을 제대로 알고,  우리 문장을 올바르게 쓰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이오덕 선생님은 2003년에, 한글을 사랑했던 안과의사 공병우 박사님은 1995년에 돌아가셨다.  그분들은 죽었지만, 그들이 평생을 추구했던 한글 사랑의 뜻은 위대하다.  수많은 예시문이 함께 담겨 있는 500 페이지의 두툼한 책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이 책은 우리 글 바로 쓰기의 최고 교본이다. 


2010.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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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4-27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을 읽으시고 좋을 글을 써주서셔 고맙습니다.

개츠비 2010-04-29 10:57   좋아요 0 | URL
이 책을 많이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글 잘 쓰기 위한게 목적이 아니라 먼저 왜 쓰느냐? 쓰는게 왜 중요하냐? 를 먼저 가르쳐주는 책이거든요. 올해 읽은 책 가운데 제겐 최고의 책이었습니다. 글 잘쓰는 글쟁이들이 독자들을 얼마나 가지고 놀았는지 이 책을 보면 알게 됩니다. 강추 ^^

프레이야 2010-05-08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오덕 선생의 글쓰기에 대한 글은 오래 전 읽었지만
이렇게 또 정리된 리뷰를 읽으니 새삼 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위 문학이랍시고 어렵고 유식하게 꾸며쓰는 거짓글이 얼마나 많은지요.
쉽게 쓰는 게 더 어렵다는 걸 절감합니다.
리뷰 당선도 축하드려요.

개츠비 2010-05-08 22:3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이 책을 읽고 낯이 많이 뜨거웠죠. 한 권의 진실한 책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 그런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독서할 힘을 얻었답니다. 많은 책을 읽지만 그런 책을 만나기란 어렵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의 글은 앞으로 계속 읽어갈 생각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글샘 2010-05-13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오덕 선생님 덕분에 일본어를 공부하게 되었답니다. 도대체 일본어 아닌 게 뭔가 싶어서요... 마각을 드러내다... 뭐 이런 게 다 일본어거든요.
이오덕 선생님은 삶 자체가 꼿꼿함으로 가득찼던 분이었는데,
권정생 선생님... 모두 먼 곳으로 가시고...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개츠비 2010-05-17 07:56   좋아요 0 | URL
생전에 이분들의 글을 읽어보지 않아 서운합니다. 그러나 이분들이 남긴 글의 가치는 시간이 갈수록 더 크고 높아질거라 믿습니다. <우리문장쓰기>를 읽으며, 주관이 확실한 작가의 글이란게 어떤건지 느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