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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중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소설 읽기의 원초적 즐거움
너무 오랜시간 소설 읽기와 멀어졌다. 내가 기억하는 소설가의 폭이란 내가 아는 유행가요만큼 비좁다. 나는 열심히 책을 읽어왔으나 상당히 게으른 독자였다. 어쩌면 그건 책읽기의 편식 때문일 것이다. 더 열심히 찾아읽질 못했단 생각을 하기에 충분한 책 한 권을 만났다. 문학동네가 마련한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도 아니요, 그렇다고 가장 잘 팔리는 작가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젊은 작가들일 뿐이다. 젊다는건 몹시도 주관적인 것이기에 몇 살 부터 젊은 작가들인가, 기준이 모호하다. 그러나, 이 작가들의 프로필에서 나는 유독 그들의 나이에 포커스를 맞춘다. 내 또래의 서른 초중반 작가들이다. 내 또래의 작가들은 이렇게 이제 문학 마당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고 있었다. 신세대의 시초라 할 수 있는 X세대들이다. X세대는 네트워크 세대인 N세대와 2000년 이후에 등장한 Y세대의 선배격이다. X세대는 우울과 반항 그리고 자아를 중요시했다. 이전 세대와 확실히 다른 성향을 보여준 젊은 신세대의 상징을 우린 X라는 알파벳으로 정의했으나, 이제 이들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새로운 세대에 자리를 비켜준다. 어른 작가들의 작품만을 탐독하고 항상 존경을 품고 독자로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서서히 문학세계의 중심부에 진입하고 있다. 이들을 우리 사회는 이제 젊은 작가로 품어안게 된 것이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선배 작가들은 이념과 시대라는 거대한 틀로 자신의 문학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X세대는 이념과 시대라는 거대한 인식틀에 식상해 한다. 이러한 틀은 솔직히 너무나 거창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자아다. 나또한 그렇다. 20대부터 내 관심사는 나의 존재와 나의 인식틀 안의 세계였다. 주체는 나였고, 세계의 중심은 나였다. 그러므로, 어쩌면 X세대가 이기적이란 혐의를 얻게 된 지점이 거기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어느 세대나 모두 이기적인 면이 있고, 본래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문학의 중심은 언제나 자아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고, 그래야 하는것 아닐까?
이 작품집에 수록된 소설가 중, 내 눈에 익은 작가는 오직 `편혜영' 정도였다. 그것도 신춘문예의 평론 소재로 그의 소설이 쓰였다는 게 내가 편혜영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다. 그러니, 대상을 받은 <1F/B1>의 김중혁이나 이 작품집에서 주목할만한 능력을 보여준 이장욱과 김미월에 대해선 아는게 전무하다. 이 작품집에는 일곱편의 수상작이 담겨 있다. 상당히 엄격한 방식으로 선정된 작품들의 모음집이자, 아직 자신의 능력을 펼쳐보이기도 전에 익명속에 숨어 버린 작가들이다. 출판사 문학동네는 이들에게 젊은 작가상을 주고, 작품집을 내주었다. 그것도 실가 1만원이 넘는 책을 그 반값에 한시적으로 판매하고 있다. 목적은 그들의 이름과 그들의 작품을 알리자는 것이다. 소설이 잘 팔리지 않고, 한국 문학이 위기에 처했다고 아우성이 인지가 오래이지만 누구하나 그들을 구원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았다. 인문학이 위기에 처했다는 엄포가 대학가에 울린지 십수년이 되었지만, 그렇게 현재 인문학은 고사되고 있다. 그러나, 한 쪽에선 이렇게 희망과 용기를 주려는 시도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작은 노력이 독자의 관심을 살 것이고 식어버린 문학에 대한 독자의 열정과 작가들의 생산력을 자극할 것이다. 이 시도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아직 설익다. 수준높은 성취와 기교, 능숙한 작가적 역량을 보여주진 못한다. 그러나, 작품들을 읽어줄 독자들이 존재할 때 좋은 작품이 나올 토양은 생성되는 것이다. 관심은 언제나 사랑을 부른다. 젊은 작가들은 작품속에 패기와 실험정신을 담았고, 사회를 바라보는 한 세대의 진지한 시선과 반성을 응축해 놓았다. 이 작품집의 가치는 그것에서 찾아야 한다.
1. 세계의 그물망, 나와 타자와 이방인 - 김미월 <중국어 수업>, 정소현 <돌아오다>
희곡,배우,관객을 연극의 3요소라 한다. 세계를 촘촘히 엮고 있는 그물망 속에는 어떤 구성요소들이 존재하고 있나? 나와 타자과 이방인이란 구성 요소는 자의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를 엮는 그물망으로 세가지 요소를 김미월과 정소현의 작품속에서 만났다. 그들 사이의 관계망이 이야기를 짓고, 인물의 길을 닦는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와와 타자간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 존재를 증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적 상황에서 제3세계의 이주민(노동자)은 현재의 우리를 비추는 또다른 거울이 되기도 한다. 김미월의 <중국어 수업>은 한국에 값싼 노동을 팔러 온 중국인 쓰엉과 멍의 엇갈린 운명과 사랑을 통해 이 관계망의 불균형과 실태를 고발한다.
아침마다 지하철 출퇴근길에서 발견한 화교가족, 콩나물 시루처럼 붐비던 지하철이 어느 정거장을 거치며 한산해질때 어린 화교 남매는 좌석을 책상삼아 공부를 시작한다. 지하철 바닥에 덜컹 주저안고 좌석을 책상 삼는 어린애들이 불편하게 보이지만, 매일 반복되는 그들의 방식에 익숙해진다. 한 할아버지는 이들의 엄마에게 말을 건다. 말을 튼 할아버지는 남매의 엄마에게 매일 아침 중국어 한 가지씩을 배운다. 며느리, 는 중국말로 뭡니까? 밥 먹었냐?, 는 뭐라고 하지요?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중국어를 하나씩 배우는 할아버지를 유심히 쳐다보는 나, 는 타자(할아버지)와 이방인(화교)과 소설속에서 최초로 관계망을 형성한다.
경력을 쌓기 위해, 인천의 이주노동자 어학원 강사로 일하는 `나'는 서울 중심가의 어학원의 어엿한 강사를 꿈꾸고 있다. 불법 체류자가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 위장 등록을 일삼는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는 것은, 이같은 `제대로 된 미래'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 이주민들이 어학원에 등록한 것도 마찬가지다. 학생비자를 통해 입국해, 중국에서 여섯달치 벌이를 한국에서 한달 아르바이트로 대신하기 위해서다. `나'와 `타자(이주노동자)'의 처지는 별반 다르지 않다. 이같은 엉성한 관계망은 돈벌이와 안정된 미래를 위한 것이지만, 그들의 정상적 삶을 왜곡한다. 왜곡의 정점에서 사랑하는 사이였던 두 연인 쓰엉와 멍의 운명이 갈린다. 한국인과 결혼해 임신한 체로 멍은 이제는 강제추방의 운명에 놓인 쓰엉과 경찰서에서 마주친다.
"시아꺼위에 위 땅 마마, 워 시앙 하이쯔...짜이찌엔"
나는 다음달에 엄마가 돼. 안녕. 이 급박한 상황에 여자는 대체 자신이 엄마가 된다는 소리를 왜 하는 것일까. <중국어 수업>, 김미월 p.208
소설은 절묘하게도 중국어 수업을 화교에게 듣는 낯선 할아버지를 이 경찰서에 등장시킨다. 바로, 멍의 시아버지이자 뱃속 아이의 친할아버지로 말이다. 세계라는 관계망은 그물망처럼 촘촘했다. 너무나 촘촘하기에 우리는 이 그물망의 난처한 포괄성에 희생된다. 그러나, 그것이 매일의 출퇴근길에 만나는 엇비슷한 인간들의 운명 같은게 아닌가?
정소현의 <돌아오다>의 공간적 배경은 `퇴락한 일본식 2층 목조건물' 이다. 이 소설속 등장인물은 나와 타자(할머니)와 이방인(임신한 윤옥)이다. 이들은 어떤 관계망을 형성하는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나, 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지만 아무런 정도 사랑도 할머니란 존재로부터 받질 못한다. 그러나, 그 사랑을 갈구하지도 않는다는게 더 문제다. 작가는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나의 빈궁함과 아픔을 서술하지만 이것은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적 성향을 강화하는 쪽으로 비춰진다. 이러한 성향이 결국 타자(할머니)와 이방인(윤옥)과의 관계망을 짓는데 방해 요소가 되고 만다. 할머니는 눈도 보이지 않지만 이 집안의 권력자처럼 행세한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모든걸 손녀에게 의존해야 할텐데 집안의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은 부조화를 일으킨다. 우연하게 찾아든 임신한 젊은 여자 윤옥은 이층집에 살면서, 집안의 유령이 되지만 할머니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지나친 상처와 아픔에 대한 호소가 관계망을 흐트러뜨리고, 이야기의 흐름을 단조롭게 한다.
그러나, 작품은 마지막 이방인(윤옥)의 정체에 신비적인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이 궁지로부터 스스로 탈출한다. 아사다 지로의 소설<철도원>의 어린 딸들처럼 윤옥은 환상적인 방식으로 나의 자아와 그물망을 복원시킨다. 환상적 기법은 에고이스트 내가 치유되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남겨둔다. 떠난자들이 `퇴락한 일본식 2층 목조건물'로 되돌아 올 수 있다는 그것. 그게 희망이다.
"그 아기는 나였다. 내가 할머니에게 왔을 무렵 찍은 사진과 같은 얼굴이었다. 아기수첩을 펼쳤다. 거기에는 열 달 동안 윤옥이 받은 진료가 기록되어 있었고, 아기의 출생일, 예방 접종 내역이 적혀 있었다. 아기의 출생일은 1975년 5월 3일, 내 생일과 같았다." 정소현 <돌아오다>, p. 257
2. 삶과 죽음의 간극을 배회하는 군상들 - 이장욱 <변희봉>, 김성중 <개그맨>
삶과 죽음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은 때로는 너무나 크다. 왜냐하면 그게 삶의 요체요,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덩어리는 중심을 의미하고, 그게 바로 인간이 세계속에 존재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 실체들의 삶이란 다채롭다. 정형적인 성향을 벗어난 한 인물을 만날 때 우리가 삶에 가진 긴장감은 그 무게감을 벗는다. 변희봉을 아시나요? 라고 묻는 이장욱의 소설과 평생을 남은 웃기는데 소비했지만, 자신의 인생은 약간은 비극이었던 김성중의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삶이 가진 균형감을 주지시키는 것일까?
동대문 운동장역 근처의 한 포장마차, 나와 만기가 소주잔을 앞에 두고 앉았다. 만기의 처지가 말이 아니다. 아내와 얼마전 이혼했고, 병석에 산소호흡기를 끼고 부친은 누워있다.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빚은 매일 늘어만 간다. 그러던 어느날 만기는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쓴다. 연극 한 편을 보더니 `변희봉'과 같은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대학로에 드나든다. 그가 맡은 역할은 형편없고, 그는 매번 실수를 한다. 그러던 어느날 지하철의 어느 계단에서 변희봉 선생을 만난다. 평소 그가 존경하던 연기자, 70년대 성우로 데뷔했으나 수십년 조연역할에 만족하다 최근에 와서야 진국같은 연기로 각종 영화에서 빛을 내기 시작한 연기자, 변희봉 선생. 문제는 주위 사람 누구도 변희봉을 모른 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기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되묻는다. `변희봉을 아시나요?' 답은 물론 `김인문'은 알겠는데, 변희봉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의 관심사외엔 철저히 무관심한 경향이 짙다. 소설속 인물들이 시종일관 변희봉을 모른다고, 답하는 것은 독자인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고, 답답하다. 더군다나 <괴물>의 주인공 송강호의 아버지 역으로 나온 이가 `김인문'이라 하는데는 깜빡 속았다. 이혼한 아내에게 너그러운 그, 병든 부친과 궁지에 몰린 가정을 내팽게치고 일본으로 이민가 오르골을 만드는 오타루에 정착하겠다는 아내의 꿈, 에 만기는 반기를 들지 않는다.
"그녀는 오르골의 작고 맑은 소리에 반했다. 오타루의 겨울에 내리는 눈송이들과 함게 인생을 보내고 싶었다. 눈을 치운 뒤 앞치마를 두르고 탁자에 앉아 조물조물 오르골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삶이 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앞으로 일하게 될 오타루의 상점까지 알아두었다는 것이다. 만기의 말에 나는 진심으로 화가 나서 쏘아 붙였다. - 지랄한다. 미친년이네, 씨발년이고, 확 지박아뿔라. " 이장욱 <변희봉>, p. 113
반기를 들고, 분노하는 것은 이 소설속 당사자가 아니다. 삶과 죽음을 견디어 내고 지탱하고 이끌고 마무리 짓는 것은 `만기'이다. 이 모든 궁지에 몰린 것은 `만기'이지 분노하고 위안하는 친구가 아니다. 우리가 만기의 상황에 내몰렸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할까? 정답은 없다. 단, 만기는 만기의 방식으로 이 궁지에 대응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배신한 아내와 산더미같은 빚에 절망하고, 위중한 부친에 슬퍼하는 대신, 그는 좀더 낭만적이고 엉뚱해졌으나 분명한 사실은, 외부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삶과 죽음의 간극을 배회하는 우리들은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에 유머는 하나의 `옵션'이 될 수 있다. `변희봉을 아시나요?'라고 묻는 그가 더이상 엉뚱하게 보이지만 않는 이유다.
이에 비한다면, 김성중의 <개그맨>은 하나의 옵션으로 진중한 방식을 택한다. 세상을 온통 웃게하는데 성공한 한 개그맨의 성공과 몰락을 다룬 이 소설은 그 곁을 응시하는 나의 시선과 내면을 통해, 타인의 삶과 죽음에 깃든 의미를 묘파해 낸다. 결국, 이국에서 깡통속의 유골로 재회하는 나와 옛 연인 개그맨은 시간을 거슬러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세계가 어디인지 묻고 있다. 그 유골속에서 영광의 웃음도, 대중의 관심도, 옛 사랑의 낭만도, 자취를 감추었다. 성공한 기억의 1권을 지워버리고, 쓸쓸한 무명의 2권부터 쓰기 시작한 외국 생활에서 개그맨은 연인에게 한 장의 엽서를 남기며, 그 엽서가 깡통속의 유골과의 재회를 이끌었다. 삶과 죽음이 철저히 혼자만의 몫이며, 그 당연한 귀결이 전혀 낯설지 않음에 독자는 어떤 위안을 얻고 안심하게 된다.
"사람들은 노래를 따라 어떤 인생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속에 들어 있는 패배가 그들에게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더 순수한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온갖 명성과 가십에 둘러싸여 있던 개그맨이 줄에서 떨어진 광대가 된 후 누렸을 그 평화는 내 몫이 아니었다. " 김성중 <개그맨>, p. 288
3. 존재를 탐색하는 소설의 마력 - 편혜영 <저녁의 구애>, 배명훈 <안녕, 인공존재!>
소설의 역할은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데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훨씬 더 확장돼 있고, 그 끝은 요원하다. 편혜영의 단편을 읽으며 소설이 줄 수 있는 효용이 얼마나 크고 막강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편혜영의 작품은 단번에 소설이 줄 수 있는 최대의 즐거움과 고민을 한꺼번에 벼락처럼 안긴다. 편혜영와 배명훈의 단편들은 존재, 그 어렵고 오래된 질문에 가 닿는다. 존재한다는건 어떤 것일까? 인간이 생명력을 갖고 지구에 두발을 딛고 살아간다는건 얼마나 가슴 뛰는 진실인가? 하는 낡았지만 언제나 새롭기만 한 질문을 안긴다. 이 두 편의 작품은 이 단편집에서 가장 난해하지만 즐거운 퍼즐놀이와 같다.
편혜영의 문체는 둔중하지만 세심하다. 사유하는 문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의 소설은 죽음과 사랑을 대비시킨다. 그러나 슬픔이나 감동 같은건 애초에 기대할 수 없다. 무감각적인 죽음에 대한 뉘앙스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등장하는 인물, 뫼르소의 태도와 닮아 있다. 조화를 배달하는 그는 죽음의 전화를 매일 기다린다. 죽음의 소식은 그에겐 일상이며, 기쁜 주문의 전화다. 까마득한 친구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남쪽으로 380여 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고장의 장례식장에서, 친구는 김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모의 위중한 소식을 전하며 미리 조화 하나를 주문한다. 대금 결제 따윈 얘기 하지 않지만, 장례식장의 위치는 정확히 가르쳐 준다. 낯선 도시로 출발하며, 김은 친구와 무미건조한 대화를 나눈다.
"이미 죽었거나 곧 죽게 될 것은 영정의 주인이었지 그가 아니었다." 편혜영 <저녁의 구애> p.73
죽어가는 `어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친구, 그리고 김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고조된다. 한 사람의 죽음과 그 죽음에 쓰일 조화를 배달하는 나 사이에 슬픔이란 감정 따윈 절제 돼 있다. 죽음은 상업화되고, `어른'이 버티고 있는 지상의 시간은 소멸되어야 할 `필연'으로 정리되고 만다. 존재와 존재 사이를 엮고 있는 이 무감동적인 대화와 기류는 이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독자들의 간담을 싸늘하게 한다. 이 치명적인 비인간성 안에서 김은 `여자와의 사랑'을 줄다리기 한다. 컴컴한 어둠속에서 장미가 내뿜는 붉은 빛깔 같은 사랑이야기가 380km를 넘어 전화선을 타고 오간다. 섬뜩하지만, 왠지 아름답고 비정하지만, 왠지 짜릿하다.
"뭐가 여기까지예요? 재촉하는 여자에게 그가 대답했다. 우리요. 우리가 함께 있는 거요. 여자가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팀장이 찾아서 가봐야겠어요. 조심해서 오세요. 그분이 빨리 돌아가시길 빌게요. 전화는 끊어졌다. 홀가분해지리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p. 76
배명훈은 존재의 문제를 좀더 철학적으로 고찰한다. 데카르트의 명제 "Cogito ergo sum 고기토 에르고 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를 기반으로 한 편의 소설을 짓는다. 자살한 여류 과학자 신수정은 괴상한 발명품들을 만들어 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전기코드가 달린 작은 돌맹이다. 이 돌맹이의 이름은 Cogito이며 Dubito회로하는 것을 통해 데카르트의 존재 추출법을 반복 시행하여 순도 높은 결정 형태의 존재, Cogito를 추출해 낸다.
화자인 나,는 이 기괴한 물건에 태양전지판을 얹어 우주로 떠나 보내는데, 어느 순간 이 기계는 오작동으로 인해 그 존재를 소멸하게 된다. 끝없이 Cogito를 추출해 존재를 생산해 냈던 기계가 오류를 통해 존재를 잃어버리자, 어떤 현상이 발생했을까?
"그러자 존재가 사라졌다. 존재가 사라진 공간을 향해 주변 공간이 밀고 들어갔다.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우주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조그만 공백을 견디지 못했다.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미세한 부분이었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광범위한 시공간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 무렵에, 나는 신우정을 내 안에서 거의 다 지워버렸다. 인공존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배명훈 <안녕, 인공존재!>, p.169
존재라는 철학적 개념을 소설이라는 장르에 담아내려한 시도는 난해하며, 난해한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은 결코 아니다. 소설의 실험정신은 높게 보아줄만 하나, 텍스트 안에서조차 이 소설은 존재의 개념을 형상화 하는데 실패했다. 허나, 존재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그 영향력을 이어간다는 `존재폭발'의 개념은 신선하다. 돌맹이는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사유를 통해 존재를 증명해낼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다. 돌맹이에게 존재를 증명해내게 한 신수정의 죽음과 존재 증명을 통해 생명력을 얻은 돌맹이의 대비를 통해, 이 작품은 어쩌면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소설속에 담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존재 너머에 있는 존재를 탐구하려는 소설로 비춰진다.
4. 현실을 떠받치는 지하세계의 위용 - 김중혁 <1F/B1>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인 김중혁의 작품은 우리가 사는 공간의 이면적 의미를 들춰낸다. 현실에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것들 말이다. 밤이면 넘쳐나는 쓰레기통이 아침 출근길엔 말끔히 치워진다. 밤 사이에 누군가 와 모두 수거해 갔을 것이지만, 우리는 별다른 인식을 하질 않는다. 사회란 정교한 시스템 안에 거주하며 그 시스템의 혜택을 받고 살아가지만 실상은 시스템을 통제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부 구조임을 잊기 쉽다.
우리가 흔히 보고 있지만, 누구나 자세히 보지 못하는 결함을 가진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건물 관리인들의 거주지인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1F/B1은 건물의 입주자에겐 금기의 공간이자 감추어진 진실과도 같다. 그러나 감추어진 1F/B1의 위력은 하나의 건물을 무용지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 소설속에서 복면을 쓴 특공직원에게 점령당한 1F/B1의 공간이 사람들을 공포와 범죄의 무방비한 상태로 내몬다. 굳건한 현실, 말끔한 정상, 을 위해 언제나 어둑고 축축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역설, 을 이 소설은 드러낸다. 그리고 그 발견의 과정을 이 소설은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어느덧 독자는 자신의 삶을 정상으로 이끌기 위해 어두움 안에서 온전히 진실을 감당하고 있는 것들을 되돌아 보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일상인의 헌신과도 같이 평범한 것이리라. 종교적 진실을 품고 살아가는 수행자는 수도원의 종교인들이 아니라 바로 그 수도원의 지하에 물을 공급하거나, 전기를 공급하는, 때묻은 작업복을 입은 설비공일 수 있다. 온전한 현실을 유지시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스탭들을 필요로 하는가? 그 가치를 따져묻고 고상함의 경중이나 엄숙함의 종류를 분간한다는 건, 사치이며 오류임을 이 작품은 예리하게 파고들고 있다.
"지하로 내려가다가 윤정우가 깜짝 놀랐던 곳. 기적처럼 매달려 있던 1F/B1의 표지판 아래에 비밀통로가 있었다. 비밀관리실은 숫자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1층과 지하1층 사이의 어떤 곳이었고, 슬래쉬(/)처럼 아무도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는 아주 얇은 공간이었다. 좀 전에 표지판에서 `FBI'라는 글자가 보였지만 이번에는 슬래쉬가 크게 보였다. 1층이나 지하 1층 표시보다 슬래쉬가 더 크게 보였다." 김중혁 <1F/B1>, P.37
끝맺는 글
지금껏, 나는 하나의 단편소설집 작품들을 모두 분석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수상작품집에는 각 작품마다 젊은 비평가들의 평론 하나씩이 실려 있다. 이 글을 쓰기위해 나는 그들의 평론을 일부러 건너 뛰고 읽었다. 작품 하나하나를 분석하는 비범함이 담겨 있을, 그 평론들은 나름의 날카로움을 견지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 평론들을 일부러 읽지 않은건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온전히 내 안에서 해석하고 분석해 보려는 의지에서였다. 그러나, 역부족을 느낀다.
수많은 작품 가운데 선택을 받고 수상을 하게 된 이 작품들은 젊은 작가들의 소중한 문학 생산물이다. 내가 부족함 가운데서도 힘겹게 모든 작품을 내 나름의 기준으로 해석하려 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 작품집을 읽으며 멀지 않은 미래에 나의 시대(X세대)의 이야기를 제대로 엮어낼 대작가가 탄생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건졌다. 좋은 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이들의 독자가 되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문학의 효용을 생각하기엔 삶이 너무 각박하다. 먹고 사는 일과 전혀 관계 없을 문학을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하는 작가들이 있고, 그들의 독자들이 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는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들이 어렵게 문학을 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오늘도 문학작품을 애써 찾아읽는 이유가 아닐까?
단편으로 만난 젊은 작가들을 장편에서 다시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한다.

2010.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