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식대로 살아왔다
공병우 지음 / 대원사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내가 공병우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아주 흐릿하다.  90년대 피시통신 시절이었다. 한국통신의 하이텔에 접속하면 하루에 한번 꼭 그의 이름으로 올라와 있는 글을 볼 수 있었다. 자세하게 읽은 기억은 없지만, 대강 세벌식 자판에 대한 홍보와 두벌식 자판에 세벌식을 사용할 수 있도록 무료 스티커를 제공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은 언제나 그의 직함으로 끝났는데, "한글 문화원 대표 공병우" 라고 돼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분이 돌아가셨단 소식을 듣게 되었다.  고령에도 젊은 이들이 사용하던 매체에 글을 지속적으로 올리던 분이라 좀 독특하게 생각된적이 많았다.  나는 군대에 갔고, 그 이후 오랜시간 공병우는 내 기억속에서 멀어졌다.  얼마전 이오덕 선생의 책 <우리 문장 쓰기>를 읽다 공병우의 글과 마주했다.  이오덕은 이 책에서 수많은 예시문을 들고 와 한글 전용과 좋은 글 쓰기를 설명하는데, 공병우의 글도 그가 가져온 좋은 예시문 중에 하나였다.  마침, 두분은 한글 사랑이란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공병우가 91년 8월 조선일보에 발표한 짧은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 나는 현재 나이가 85살로, 젊은 반평생 동안은 한자혼용으로 글자 생활을 했고, 늙은 반평생 동안은 한글전용으로 글자생활을 하고 있다. 나의 이런 경험으로 추측해 보면, 한글 전용으로 1년에 발달할 수 있는 문화수준이 한자혼용으로서는 10년 이상 걸릴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 나라가 한글전용을 단행하여 로마자보다도 능률적인 글자생활을 하기 전에는 선진국의 문화수준을 따라잡을 수도 없고, 날이 갈수록 더욱 뒤떨어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오덕 <우리 문장 쓰기> p.302

이오덕과 공병우는 닮은 점이 많았다.  인상깊었던 것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전생을 추구했던 소임에서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젊은 나이에 이미 쇠락한 정신 자세를 가진 이들은 그에게 배울점이 많다. 그들은 자신이 평생 몸바쳐온 분야에서 죽을 때까지 힘을 다해 싸웠다. 

공병우가 책을 남겼을거란 생각에 서점에서 검색을 해봤다.  유일하게 그의 자서전 한 권이 검색돼 나왔다. <나는 내식대로 살아왔다>라는 제목이 붙었다.  제목부터가 마음에 끌린다.  출판사 소개글은 한국의 고집쟁이 가운데 6위로 공병우를 뽑을 정도로, 대단한 고집불통이었다는, 얘기를 전한다.  바로 사고싶었는데, 절판되었단다.  것도 거의 10년 가까이 됐다.  그러나, 어떤 책은 기어코 손에 넣어 읽고 싶은 책이 있는 법이다. 내 서가에는 얼마전 출판돼 나온 깨끗한 표지의 책들이 가득하지만, 그 모든 책을 제치고 이 책을 손에 넣고 바로 읽고 싶었다.  이후, 절판된 책을 중고서점에서 발견하고 뛸듯이 기뻤다. 도서관으로 발품을 파는 것보단야,  절판된 책을 소유하며 읽게 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 책은 자서전이란 장르로서 평범한 서술방식을 택했다.  시간순서별로 그의 삶을 구성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힘을 두가지 단어로 정리할 수 있겠다.  열정과 확신이다.  그는 평안북도 벽동군 출생이다.  팔삭둥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머리를 따고 서당에 다닌다.  서슬 퍼런 일제 시대였다. 열 네 살에 장가를 가고, 농업 학교에 입학해 평범한 면서기로 나아가는 길을 걷는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그에게 가르쳐준 인생살이의 비법은 6.26 전쟁에서 그의 목숨을 살린다.  "평소 남에게 적선을 하는 사람은 난리가 나도 산다" 라고 할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평생 안과의사로서 봉사에 전념하고, 많은 재산을 기부한 공병우의 삶은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실제로 그는 6.25 난리통에 적선한 사람들의 호의에 찬 증언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농업학교 시절 남달리 영특했던 공병우는 작문 시간에 한 편의 글을 쓰게 된다.  학교 교장과 자신의 학교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 작문을 통해 퇴학을 당할 위기에 처할 거란 생각과 달리, 담임과 교장 선생은 그를 격려한다.  교장은 농업학교를 중퇴하고, 의과 시험에 응시해 보도록 권한다.  훗날, 그는 정식코스가 아닌 일종의 검정고시를 통해 의사 시험에 통과했다.  한 편의 작문과 그 작문을 통해 인재를 알아본 일본인 선생이 그의 미래를 열어 준 것이다. 

안과 의사가 되고,   국내 최초로 서울 땅에 개인 안과 병원을 개원한다. 여기까지 그의 인생은 일제시대 한 엘리트의 성장담 정도로 읽힌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삶을 뒤바꿔논 만남이 이뤄진다.  공안과에 진료차 찾아온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은 공병우의 인생을 한글 타자기의 계발과 한글 전용 주창자로서 살아가게끔 만들었다.  그가 평생 안과 의사로서 이뤄냈던 봉사와 학문으로서의 의료 인생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와의 만남이후, 공병우는 최초의 기계식 한글 타자기의 실용화에 성공한 발명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이로써, 1938년 이극로 선생과의 짧은 만남이 그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라고 봐도 되겠다.

" 우리 조선 민족이 갖고 있는 한글에 대해 관심 가져 본 일이 있습니까?"
" 아직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의사 검정시험에 필요한 일본글만 공부했지, 소위 언문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그는 천천히 말했다.
"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언문이란 글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훌륭한 글인데, 일본놈들이 이 글을 못 쓰도록 탄압을 하고 있죠.
아니, 일본놈들만 그런게 아니라, 우리 조선 사람들까지도 제 나라 글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한 편이죠. 아니, 한술 더 떠 아예 한글은 글자가 아닌 것인 양 무시하는 식자들이 많습니다. "   P. 77 <공병우 자서전>, 나는 내식대로 살아왔다

공병우는 안과 의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한글 타자기를 연구한다.  일제 시대 별다른 연구 기관도, 학교도 없었고, 참고자료 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만, 영문 타자기를 가져와 `신체를 해부하듯 타자기 한대를 발기발기 뜯어 놓고' 연구할 정도로 열정이 넘친다.  나중에는 본업인 병원이 어려워질 정도로 진료조차 미뤄둔채 연구를 진행하다보니, 사람들 사이에선 공박사가 미쳤다, 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가 타자기 계발에 힘썼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지금껏 계발된 한글 타자기가 무척 불편했고, 한글 원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 글자 생산을 더디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글 원리에 맞는 자판 배열을 가지고, 기계적으로 속도가 빠른 타자기를 계발하고자 했다.  그는 의사로서 긴 논문을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제 시대 필경사을 고용해 정서하는데 애로점이 많았던, 개인적 필요성도 작용한다. 

그는 철저히 독학으로 훗날 세벌식에 기초한 실용적인 한글 타자기 계발에 성공한다. 광복후, 70년대까지 그는 안과의사인 본업과 세벌식 타자기의 계발자와 보급자라는 사업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지만, 정부의 표준판은 그가 계발한 과학적 세벌식을 철저히 무시한다.  이후, 그의 삶은 자신이 계발한 세벌식 자판의 보급 운동에 전념하고, 정부의 엉터리 표준 정책과의 기나긴 싸움으로 채워진다.  이 싸움은 90년대 그가 죽기전까지 계속됐다. 이 책은 그의 자서전이긴 하지만,  세벌식 타자기의 계발과 보급 운동이란 큰 테마가 주를 이룬다과 봐야 할 것 같다.  많은 부분, 그는 독자가 지겹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세벌식 타자기의 보급에 얽킨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가 80년대 후반 고령의 나이에 미국에서 한글연구소를 내고, 컴퓨터 시대를 맞이하며, 연구한 것도 세벌식 자판의 보급 문제였다.  그가  한국의 고집쟁이 6위에 오른 이유를, 우린 이 자서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한글 원리와 일치하는 세벌식 타자기 개발을 목표로 삼고 지금까지 연구하던 두벌식 자판을 미련없이 포기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는 기현상이 생겼다. 내가 이미 40여 년 전에 만들었다가 기계 공학적인 무리가 많은 것을 깨닫고 내버린 바로 그 두벌식 시스템을 요즘에 와서 정부 표준판이라고 정해 놓고 있으니, 정말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P. 85

이 자서전의 일부분에서 우린 공병우의 또다른 재능을 확인한다.  그는 평생 동안 꿩사냥을 즐겼다.  요즘에야 수렵이 그리 큰 인기가 없었지만, 광복후 유한층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얻은 스포츠였다 한다.  또, 80년대 초반 정부와의 오랜 타자기 표준판 싸움에 지쳐 버린 그가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사진에 관심을 갖는 이야기가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그는 취미로 하는 일에도 전심전력을 다했다는 데 있다. 꿩사냥과 사진, 모두에서 그는 한국 최고가 된 기록을 남긴다.  사냥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많고,  일흔 고령에 시작한 사진은 국선에 입상할 정도의 실력과 사진집을 펴내는데까지 이른다.  타자기 계발과 정부와의 표준판 싸움에서 보여준 그의 집요함과 승부욕은 본래 그의 기질이었음을 독자는 느낄 수 있다.  

이 자서전에서 우린 짧지만 분명한 공병우식 인생 철학을 만난다.  교육과 실력에 대한 그의 이야기에 수긍이 간다.  "나는 지금도 매일 공부를 한다. 교육계에서는 평생 교육이란 말이 있는 모양인데 나는 바로 그 평생 교육을 목표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p.36)  "실력 있는 사람이 정당한 대접을 받고 사는 사회가 참다운 민주 사회라고 생각한다."(p.36)  의사로서, 또 전쟁을 거치며 얻게 된 생명에 대한 소신을 그는 피력한다. " 인간의 생명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안전을 위해 예방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문명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여길줄 아는 사람이 남의 생명도 소중히 다를 줄 아는 법이다."(p.123)  90살 가까이 장수했던 그는 건강을 지킨 비밀을 밝힌다. "많이 먹는 것은 만병의 원인이 된다." (p.241) 

300 여 페이지에 이르는 짧은 자서전이지만,  이 책에는 한글을 사랑했던 이름난 고집쟁이 공병우의 90 평생이 힘차게 뜀뛰고 있다.  그의 사후, 몇년 안가 자서전은 사람들의 관심밖으로 밀려 난 모양이다.  이제 절판되었으니, 어느 도서관의 구석진 서가에서나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릴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훗날, 나같은 독자가 공병우의 삶과 그가 남긴 자서전의 매력을 발견하는 날이 많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평생 세벌식 타자기와 세벌식 자판 보급 운동에 전념했던 그의 삶은 아직 우리 사회에서 정당하게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공병우의 말대로라면, 우린 7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공청회 한번 제대로 거치지 못하고, 전문성도 없는 이들이 비과학적 두벌식 자판을 표준판으로 설정한 원죄로,  세벌식에 비해 훨씬 느리고, 한글 원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두벌식 자판을 현재 표준판으로 쓰고 있다.  뭔가 배울때 힘이 든 것은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컴퓨터 자판은 아주 좋은 본보기다. 

독수리 타법으로 연명하는 컴퓨터 사용자들이 많은데, 표준을 바꾼다는 것은 앞으로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인생을 마무리하는 시점까지 자신이 연구한 세벌식 자판 보급에 전념한 것은,  고집 때문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자판 배열에 있어선 한국 최고의 전문가였다. 교육기관과 서적이 전무한 시절, 그는 영문타자기를 갈기갈기 해체하며, 독학으로 타자기 자판 설계를 연구한 바 있다.  그렇게 피땀어린 노력을 70년대 군사정권의 비전문가들은 알아줄리가 없었고, 무식한 관리들은 표준판을 제멋대로 설정해 버린다.  공병우는 실제로 70년대 유신시절, 정부의 표준판 정책에 엇박자를 둔다하여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적이 있다.  현재 전문가들도 세벌식 자판의 실용성과 과학성을 높게 사고 있다.  언젠가는 그의 꿈이 실현될 날이 대한민국의 역사에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공병우의 이 자서전 <나는 내식대로 살아왔다>는 세벌식 타자기의 계발과 보급 운동에 헌신했던, 한글을 사랑했던 안과의사 공병우의 열정과 확신에 찬 90년의 기록으로 우리 앞에 다시 부활할 것이다.

"나는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처량하지도 않고, 짜증스럽지도 않다. 그야말로 나는 나의 고독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일하고 싶을 때 일을 하고 편리한 취사 시설을 이용하며 언제든지 먹고 싶을 때 원하는 대로 먹을 수도 있다.  정말 나의 고독은 즐거운 고독이다."  p.243

연구와 열정의 삶은 남들이 보기에 고독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실제 고독을 즐긴 것이고, 그 고독은 즐거운 고독이었다고, 쓰고 있다.  우린 오늘 삶에서 어떤 목표의식를 갖고, 어떤 열정을 태우며, 어떤 고집을 부리며 살고 있는지 묻고 있는 책이다. 그런 분명한 철학이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병우의 자서전은 여전히 많은 질문과 반성을 던진다.   과연 나는 내식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 



201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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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5-19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박사님은 돌아가시고 나서도 외국 사는 자식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고,
본인 시신을 대학에 기증하셨답니다. 장기 기증은 아쉽게 노구여서 안 됐구요.

개츠비 2010-05-20 22:44   좋아요 0 | URL
내식대로 살기가 어려운 시절입니다. 배울점이 많은 분이고, 일제시대,6.25전쟁,유신 군사독재 모든 시절을 겪어서 공박사님 삶이 곧 20세기의 한국 역사같더군요. 올바르게 살기 힘든 시절임에도, 옳게 살기 위해 평생 노력하신 분입니다. 공박사님 삶을 닮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