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 본 슬픔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동안  C.S 루이스의 글에 빠져 지냈다.  <순전한 기독교>를 비롯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고통의 문제>, 그의 회심기인 <예기치 못한 기쁨>을 읽었다. 그리고 다섯번째로 사랑하는 아내를 사별한 그가 슬픔에 매몰돼 써내려간 일기인 이 책 <헤아려 본 슬픔>에 다다랐다.  그리고 아직 사놓고 읽어야할 그의 책은 5권이 더 남았다.   나머지 책들은 좀 아껴두고 읽을 생각이다.  여전히 C.S 루이스는 가벼운 작가가 아니다.  내가 만나본 크리스챤 작가 가운데 글을 가장 어렵게 쓰는 사람이다.  기독교에 대한 변증서를 제쳐 두고라고 나는 소위 그가 자신의 회심기(자서전)을 쓸때는 좀 더 쉬운 문체로 독자들의 눈과 머리를 좀 편안히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20세기 초라는 가깝고도 먼 시간속으로 나를 편히 인도하긴 했지만, 그 자신의 그 예의 논리적이고 난해한 문체는 여전했다.  자서전은 수많은 상징적 단어로 채워졌고, 문체는 여전히 변증적이다.  내가 읽은 다섯권 모두 비슷비슷했다. 그러니 더이상 그에게 쉽게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의 책 5권을 읽고, 머리가 한참 무겁고 책읽기의 동력이 바닥난 이유가 아마도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글은 매력이 가득한 보물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무슨 이윤가?  먼저 그의 글이 뛰어난 독창성으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변증가답게도 그는 자신의 논리로 기독교의 본질에 다가가려 노력한다. 그것은 깊은 사색과 인생의 연륜속에서 오랜 시간 신앙의 고민과 회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순전한 기독교>에서는 교파들 간의 형식을 뛰어넘어 곧바로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르침에 이르고 있다.  <고통의 문제>에선 삶이 고통속에 존재하는 이유를 신앙안에서 답하고 있다.  완전한 무신론자로 살았던 그가 신앙앞으로 나와 하나님 아래 고개숙일 수밖에 없었던 여정을 그리고 있는 그의 회심기는 곳곳에 흥미로움과 지성적인 고민이 함께 내재해 있는 명저다. 다만 앞서 얘기했듯이, 그의 문체가 쉽게 그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사람들은 그를 난해한 작가로 오인하게 한다. 그러나 책읽기의 인내심을 조금만 발휘한다면, 우리는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의 신앙 간증속으로 접근할 수 있다.  게으르고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지적 고민과 회의속에서 다다른  한 신앙인의 성실하고 근면한 믿음과 조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신앙에 대한 완벽한 논리와 믿음이 조화를 이룬 사람인 루이스조차도, 개인적인 슬픔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야 말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실망이고, 분노이자, 그리고 섭섭함 정도가 아닐까 한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선함에 대한 `의심'이 아닐 수 없다.  청년기의 회심이후 평생을 기독교의 가르침이 무엇이며 그것이 진리일수밖에 없는 이유를 변증하고 설득하며 살아온 한 신앙인이자 학자인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 후에 느끼는 극심한 슬픔속에 신앙조차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그 엄연한 진실앞에, 괴로워하고 고통하는 모습을 가감없이 써내려간 글이 바로 본인조차 출판될것을 생각지 못했던 이 책 <헤아려 본 슬픔>인 것이다.

 
"내게 종교적 진리에 대해 말해 주면 기쁘게 경청하겠다. 종교적 의미에 대해 말해 주면 순종하여 듣겠다. 그러나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 "  <헤아려본 슬픔, p.46>


루이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미국에서 이민온 여류시인 조이(Joy)를 59세에 만나 결혼했다.  그녀는 전 남편과 이혼하고 자식들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와 루이스의 친절한 배려속에 함께 지내다 사랑을 느끼고 결혼에 골인한다.  그 늦은 나이에 피어난 사랑은 이미, 조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들었고 몇년간 행복한 사랑의 시간이 어이진다.  그리고 아내 조이는 지병이 악화돼 투병하고 결국 루이스와 영원히 이별하고 만다.  늦은 나이에 만났지만, 그들은 서로를 너무도 사랑했고 그 사랑이 깊어갈수록, 그 사랑은 더 절실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헌신적인 투병기간을 아내의 곁을 지키면서 그가 쏟아냈을 기도의 양과 절박함이 어떠했을지도 명확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간절한 기도조차 아내의 죽음을 막아내지 못했다. 루이스는 몸과 마음이 지쳤고 그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삶은 더이상 의미조차 없게 돼 버렸던 것이다.  루이스는 아내가 죽고 한동안, 사람들을 만나는것조차 글을 쓰고 글을 읽는것조차 밥을 먹는 것조차 귀찮은 일이라고 이 일기속에 적어놓았다. 그의 슬픔이 어느정도 였는지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이 일기를 읽으면서 철저한 논리와 명증함을 앞세운 신학자다운 면모를 루이스에게 찾아볼 순 없다.  그는 명석했고 기독교의 가르침의 핵심을 누구보다 명확히 깨닫고 있는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그것은 이성의 영역이었을 뿐이다.  슬픔에 잠겨버린 머리는 오직 슬픔외에는 그 무엇도 생각해 낼 수가 없게 만든다.  이제 내가 교회내에 들어와 있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내가 교회밖의 비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시간들이 지금은 아찔하기만 하다.  나는 내 삶에 출현하는 모든 고통앞에 무방비로 살아왔었다. 그것은 임기응변식 인생이었고, 불안한 외줄타기와 같았다.  나는 언제든지 낭떨어지로 추락할 수 있었고, 내 불완전한 이성의 힘과 세상적 지식의 풍성함이 진리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비전이 없는 삶이었다. 그것은 미래가 없는 삶이다.  이제서야 깨닫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어도 존재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연약함의 소유자들이다.  이 위대한 작가의 슬픔에 가득찬 일기를 읽어내려가면서 내가 또다시 깨닫게 되는 것은, 이성은 허깨비이고 세상적 지식은 요란한 빈깡통이며,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평화롭게 만들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루이스는 이 책의 끝에서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가 엄마에게 투정하는 것은 그리 흉이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인간적 한계로 인해 하나님의 바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짧은 시야로 섭리앞에 실망감과 분로를 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것이야 말로 연약한 인간의 현실적 모습이고 정직한 자화상이다.  루이스의 슬픔에 가득한 일기를 읽으면서 그의 인간적 번민앞에 느껴지는 친밀감은 그때문이다.   결국 루이스의 일기는 마지막에 조이의 마지막 말을 전하며 끝을 맺고 있다.  루이스는 이렇게 다시 하나님앞으로 되돌아 갔다.

 
" `저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습니다.`"  그녀는 미소지었으나 그 미소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영원의 샘으로 돌아갔다. " p.10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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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양장) 믿음의 글들 18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외 옮김 / 홍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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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원제는 `Mere Christianity'다.  이 가운데 영어의 `Mere'란 단어를 이 책에선 `순전한'이라는 말로 번역해 놓았다.  얼핏 보기에 대단히 어려운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Mere'란 단어는 [[ ① 단순한, ~에 불과한, 단지[다만, 그저] ~에 지나지 않는. ② (폐어) 전적인,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정도로 해석되어 있다.   저자는 왜 이러한 제목을 붙였을까, 이 책의 머리말을 읽고 나면 분명해진다.  기독교는 많은 교파가 있다. 같은 하나님과 같은 성경을 기반으로하는 공통점이 있는 반면에 또 교파간 교리상의 차이와 형식적인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같은 교파간 차이로 인해 서로간의 반목이 있어왔고, 역사적으로나 오늘날이나 이들 교파간의 싸움은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가 변증하고 싶었던 것은 어떤 불순물도 첨가하지 않는 기독교 자체의 가르침이다. 순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C.S  루이스는 필립 얀시의 책을 읽다가 알게 된 작가다. 이 사람이 원래 이렇게 유명한 사람인줄은 몰랐다. 그러나 얀시의 책에서 그는 심심찮게 인용되었고, 그때마다 그가 참 비중있는 작가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1898년 아일랜드 출생으로 옥스퍼드 대학교 영문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옥스퍼드대 모들린 칼리지 대학 교수를 역임한 사람이다.  대학에서 그는 고전문학을 배웠고 또 교수로서 가르쳤지만, 그는 많은 분야에서 재능을 펼쳤다.  요즘 서점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나니아 연대기>라는 판타지 소설을 쓴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는 아동 문학가였고, 또 시인이었고, 문학 평론가 였고, 소설가 였다. 그러나 이런 명성들에 앞서 그는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기독교 변증가(신학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이 책 <순전한 기독교>로부터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고통의 문제> 등의 3부작을 비롯해서 그가 기독교를 변증하고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쓴 책 모두는 오늘날 신학서로서는 최고봉의 자리에 올랐고, 회심기를 기록한 자서전과 그의 신앙적 고백들을 저술한 책들은 모두 스터디 셀러가 되었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의 저서를 이제야 읽게 된 것은 기독교 서적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이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순전한 기독교>부터 읽기로 한 나는, 그의 주요한 책들을 우선 모두 구입해 놨다. 10권 정도 되는 그 책들이 서가에 꽂혀 있다.  보기만 해도 마음 한켠이 풍성해지고 설레이는 이 마음은 무엇 때문인지 ?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의 책을 읽는다는 기쁨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래서 그럴까?   소문난 잔치에 먹을게 풍성했다.  이 책 <순전한 기독교>의 머리말을 읽고 잠든 날 밤,  내가 너무나 편안하고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와 같다.   인간이란 원래 자신의 신념을 보충하고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본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무신론자는 무신론의 신념을 더 보강하기 위해 노력하며 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이 그저 단순한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적인 변증을 통해서도 증명 가능한 것이 되기를 은근히 소원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보통, 신앙의 문제로 와서는 이같은 것이 통하질 않는다.  믿음은 근거를 가지고 믿기 보단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신앙인들 사이엔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믿음의 특성이고 조건이라고 우리가 배워왔기 때문이다.  보통의 목회자들이나 또 주위 신앙인들이 전도할 때 대게 이러한 태도를 보이곤 하는데, 이것이 나또한 옳고 그 자체가 신앙의 특성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C.S. 루이스는 이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믿음의 문제라고 해서 아무런 변증이 필요없고 기적을 기적 자체로, 성서의 사건들을 사건 자체로 아무런 의문없이 믿는것이 옳은 것인지, 루이스는 이 책에서 의문을 표시한다.  하나님은 과연 이러한 믿음을 기뻐하실까?  그는 아니라고 답한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 대해서 알기 위해, 끝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또 궁금해야하고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적 본능이다. 왜 종교적인 영역에선 이러한 본능적 질문과 의문들이 경원시 되는가 ?  루이스는 이것이 기독교인의 나태함과 게으름 때문이라고 질타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맹목적인 믿음을 자랑할 것은 못된다는 것이다. 거기엔 믿음 자체에 대한 끝없는 회의와 반성, 그리고 고민이 계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과학과 종교가 함께 가지 못한다는 과거의 생각은 그러므로 잘못된 것이다.  과학적인 객관성은 종교적 세계에도 도입될 수 있으며, 기독교의 교리 자체와 신앙도 충분히 객관적으로 변증 가능하다는 것을 루이스는 이 책을 통해 보여줬다.
 
"그렇다면 인간이 빠져 있는 `곤경'이란 어떤 것일까요 ? 스스로 독립적인 위치에 서려고 한 것, 스스로 자기의 주인인 양 행세하려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입니다. 무기를 내려 놓고 항복하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그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 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것이 이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p.101
 
루이스의 이 책은 단순히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기독교의 교리들을 해설한다거나 신앙의 세계로 비기독교인들을 인도하기 위한 저서는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가장 비기독교적인 방식으로 변증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란 본래 어떤 존재인가 하는 매우 철학적인 고찰로 이어지는 흥미로움을 발산하고 있다.  그래서 비기독교인이 읽어도 변증에 대한 거부감은 일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  되도록이면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가, 혹시 관심이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무런 부담감 없이 이 책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그는 아마도 신앙에 이르진 못할지라도 기독교가 최소한 맹목적인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더불어 무신론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며, 자신이 알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엄연한 규칙성을 발견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온 규칙성은 우리가 흔히 도덕률로 말하는 것인데, 루이스는 이 부분을 너무나도 명백하고 선명하게 잡아주고 있다.
 
수많은 종류의 인간군상들이 있고, 그들 가운덴 악당도 있고 선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악당과 선인에게 공통되는 점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부당함에 대한 선명한 인식이다. 그러니까, 어떤 악인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악행에 죄책감을 느끼는 감수성을 상실해 버렸다치자. 그는 역사상 히틀러나 아니면 연쇄 살인마 정도는 될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도 선인이 가지는 부당함에 대한 감정은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우연하게 배급소에서 줄을 서서 선인들 사이에 서서 빵을 배급받는다고 해보자. 그 차례가 되었을때, 앞선 선인들에겐 빵을 두개 주고, 그에게만 하나를 주었다치면 그 악당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그는 분명히 눈에 핏대를 세우며 `이것은 부당하다' `공정치 못하다'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악행에는 눈뜨지 못하지만 그는 내면속에 일종의 `도덕률' `선의 법칙' 같은 것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이같은 본능적인 법칙들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점을 추궁한다.  그것은 학습된 것이 아니라, 인류가 창조되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함께 전수된 것이 분명하며, 이것이 그 어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는 말이다.  우주의 저 너머에서 우리 삶으로 그 원칙을 공급해 주는 분은 누구일까? 
 
"이 세상은 위대한 조각가의 작업실이고,  우리는 그 조각가가 만든 조상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작업실에는 우리 중 일부가 언젠가 생명을 얻으리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 - p.248
 
루이스는 또하나 이 책에서 내 인식을 분명히 바꿔준게 한가지 있다. 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종류와 그 경중을 얘기할때, 그는 모든 죄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를 `교만'으로 정의한다. 성적인 타락, 도둑질, 살인 등을 넘어서 이 교만을 가장 큰 죄의 목록으로 올린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교만하다는 것은 단순히 잘난체 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종이 주인행세를 하는 것 만큼 오만해 지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절대 완전하지 않다.  그런데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에 완전하며 공정한 척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 발아래 모든 것을 두게 된다.  좀더 가진 사람은 가난한 자를 업신 여기고,  좀더 배운 사람은 덜 배운 사람을 깔보기 마련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당직을 가진 자는 평신도를 그 아래 두고자 하며, 믿음이 큰자는 믿음이 덜 성숙한 사람을 얕본다. 이것이 교만의 실체다.  나중에는 하나님 위에 자신을 두려 한다.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 행세를 하려 든다.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러니 인간이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 명백한 사실앞에 교만은 얼마나 허황된 범죄인가?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무신론자들의 교만이다.
 
무신론자들은 매우 이성적인 척한다. 합리적이고 공정하고 그리고 과학이란 객관성을 무기로 이 세상이 운행하는 진리를 모두 터득하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곤 한다.  그들은 과학을 맹신하지 않는다고 또 주장한다.  과학은 언제나 새로운 이론과 진리에 주인 자리를 넘겨줄 수 있기에 맹목적이지 않다고 나름 공정한척 한다. 그러나 그게 사실일까?  과학이란 분야을 넘지 않으면 그들의 태도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과학을 앞세워 종교를 재단하려 들때, 합리적 이성을 가장한채, 이 세상의 지식의 원천이 되고자 할때, 과학은 종교 만큼이나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 버릴 수 있다.  또한 기독교의 교리나 성경 자체를 비판하려 들때, 무신론자들이 들고나오는 신학적 오류의 사실들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은 헛깨비 신학 지식으로 그같은 오류들을 비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 위해 우리가 얼만큼 공부하고 연구해야 하는지, 이들은 잘 모르거나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갖고 있지만, 나는 이슬람이나 불교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그 종교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신념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름대로 기독교의 가르침이 진리이며 내가 그같은 종교들에 대해 비판하지 않아도, 나는 내 신념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무신론자들이 너무나도 쉽고 유치한 방법으로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는가 ?  그들이 가장 쉽게 공격하는 것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가 ?  구약성서의 이해되지 않은 말씀들,  <만들어진 신>의 저자 도킨스가 언급하듯 구약성서속의 신은 시기와 질투가 넘쳐나는 잔인한 신인데, 그게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포장될 수 있는가?  왜 믿는 사람에게도 고통이 뒤따르는가? 왜 이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한가 ?  등등 수도 없이 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을 한꺼번에 풀어줄 정답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을 갖는다고 해서 모든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새로운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것에 불과하다.  무신론자들이 착각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무신론자들은 마라톤의 출발선상에도 서보지 않고, 마라톤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것처럼 얘기해 버린다.  피니쉬라인을 통과하기 까지 과정에 대해서는 오직 그 마라톤 코스를 달려본 자만이 얘기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 역경, 인내, 고통에 대해 어찌 그외의 자가 언급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을 알 수 있단 말인가 ? 
 
그래서 누구나 겸손함이 필요하다.  기독교 신자도 교만에 빠질 수 있고, 무신론자는 수도 없이 교만에 빠져든다.  자신의 지식을 과대포장하고,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신앙한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든, 무신론자가 되었든, 우리는 자신앞에 겸손해져야 한다.  C.S 루이스가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신앞에 겸손해지는 것이다.  겸손은 단순한 미덕이 아니다.  온전하지 못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져야할 덕목이다.  <순전한 기독교>를 읽는 사람이라면, 그가 종교를 갖고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자신의 삶의 분명한 비전과 선명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과 함께 3부작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고통의 문제>를 인내심을 갖고 읽어보는 사람은 세상과 삶에 대한 보다 선명한 인식을 얻고,  겸손함의 덕목을 배우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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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독단상]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from JelicleLim's Eye 2007-10-20 21:12 
    [기독단상]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http://jeliclelim.tistory.com JelicleLim ## 모든 종교는 진리의 단서를 가진다!! ## 여기서는 우선 기독교를 믿는 다는 것이 기독교외에 모든 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고 하면 어떤 종교라고 해도 그 안에 진리에 관한 단서가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어떤 종교든 모든 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종교..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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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회를 나가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렇다고해서 내 믿음이 견고하고 신앙이 깊다고는 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신앙은 하루아침에 크고 높아질 수가 없다고 믿는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은 그저 의심없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줄로만 알던 때가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성직자가 불미스러운 일로 언론 뉴스에 오르기라도 하면, 일반인보다 더 많은 비난을 받고 그들은 거기에 보태어 그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 신앙 자체를 덤으로 비판한다.  그것은 어린 아이가 버릇이 없으면 당장에 버릇없는 아이에게 눈살을 찌푸리는 것과 덤으로 그 부모를 비난하게 되는 경우와 동일하다.  내가 처음 교회에 등록을 하기 위해 8주간 주일마다 교회 당직자들에게 간단한 교육을 받을때가 생각난다. 그때 한 주 교육을 맡은 나이 지긋하고, 교양있어 보이는 집사님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내가 몇십년간 교회생활을 했지만,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제대로 믿은 것은 최근에 일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신자가 된 지금은 알것도 같다. 신앙생활은 보이지 않는 절대자를 믿는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마더 데레사라는 세기의 성녀조차도 한때 하나님의 부재를 고민했던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저서 <만들어진 신>에서 자신있게 요구한다. "내게 증거를 보이라, 그러면 신을 믿겠다"라고.

영국 명문 옥스포드 대학교의 생물학과 석좌교수인 리처드 도킨스를 알게 된 것은 이 책을 통해서지만 이미 그는 몇십년전에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명저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저서들은 넓게 봐서 모두 반종교적인 기류를 담고 있다.  <만들어진 신>에서 도킨스는 평생의 무신론의 논리를 완벽하게 정리하고자 원한 듯 하다. 이 책은 무신론자의 경전까지는 못되더라도 그것의 이론적인 논거를 거의 완벽하게 집약하고 있는 뛰어난 저서라고 생각된다.생물학자이지만 그는 전형적인 진화론자란 느낌이 들었다. 그는 거의 대부분의 논증에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앞장세운다.  말하자면 생물은 환경에 적합한 개체만 살아남아 변이되고, 그러한 변이가 계속되면 고등생물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도킨스는 성서의 창조론에 맞서, 이 진화론의 핵심논거를 지속해 자신의 책으로 끌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의 이론이나 자연선택설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독자가 그쯤은 알것이라고 생각해서 넘겨버린 것인지, 아니면 무지한 창조론자들이 다윈의 <종의 기원>을 좀 읽어보라는 독려의 의미가 있는 것인지 좀체 헤깔렸다.  아마도 후자의 의미가 더 있는 듯 하다.  나또한 집의 서재의 한쪽 귀퉁이에 읽어보지 못하고 보관중인 다윈의 이 오래된 서적을 펴보게 되었으니까. 

도킨스는 이 책에서 무신론자로서 모든 종교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지만, 그 가운데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대표로 도마위에 올려놓고 왜 인격신을 믿는 종교자체가 허구인지, 조목조목 반대의 논거를 열거하고 있다.  한가지 재밌는 것은 도킨스가 불교와 유교 자체를 종교로 보지 않고 도덕이나 윤리 체계로 이해한다고 언급한 부분이다. 이것은 그의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거의 논리의 오점을 찾아볼 수 없는 이 책 가운데 옥의 티가 돼 버렸다.  그는 차례대로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논증들'에서 역사적으로 신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증명이나 파스칼의 내기, 성서속의 존재증명 등의 허구를 파헤치고 `신이 없다는 것이 거의 확실한 이유'란 장에선 자연선택설을 기반으로 나름 무신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든다. 이렇게 신의 존재에 허구를 밝혀낸 그는 종교가 있음으로써 우리 인간이 도덕을 세울 수 있고,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반대 논증하기 위해 `도덕의 뿌리: 왜 우리는 선한가?"라는 장에선 종교없이 충분히 인간이 정의롭고 도덕적일 수 있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로 들어와서 그는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란 장에서 자신이 왜 무신론자가 되었고 종교의 역사적인 해악이 무엇이었는지 밝히고 있다.  그리고 `종교로부터의 도피'란 장을 통해 그는 이제 막 태어난 아이들에게 부모의 종교적 신념을 주입하는 일이 아이의 교육과 인생에 가장 큰 해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여기까지 그는 600페이지가 넘어가는 긴 논증을 통해 인격신과 유일신 신앙을 가진 종교, 좁게 말하자면 기독교의 성서와 창조론의 논리적 허구를 날서게 비판하고, 신이 없다는 것을 거의 완전하게 증명해 보이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이 놀라운 것은 그가 기독교의 전통이 오래된 서양에서 교육받고 자라난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 영역에서 살아가고 활동해야할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다. 종교를 사회적 성공과 사교적 기회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그는 아마도 종교와 적당히 타협하고 살았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그는 더 안정된 환경속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과학자로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그가 무신론자임을 온세상에 드러내지 않아도, 그는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고 더 좋았을 것이란 점이다. 그 점에서보면 그는 정직하고 또 용기있는 학자이며, 종교가 이 사회에 끼치고 있는 해악을 양심적으로 고발한다는 면에서 봤을때도 그는 존경할만한 이 시대의 지식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나는 종교인이고 또 그와 신념을 달리하는 면이 있지만 그의 그런 점은 높게 평가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은 지금 나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천동설이 진리이고 그 반대의 의견을 내놓았을때 종교적인 재판을 받은 갈릴레오가 재판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가 돈다'라는 명언을 남겼듯이, 나는 나의 신앙의 허점을 심판하는 도킨스의 책을 모두 읽고 책장을 덮는 순간에 그의 완전해보이는 논증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하나님은 리처드 도킨스까지도 사랑하고 계신다'라는 말을 내뱉고 싶었다. 이것은 무엇때문일까? 

"예수에게 인간의 아버지가 있었을까, 그가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가 처녀였을까?  판단에 쓰일 만한 증거가 충분히 남아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그것은 원칙적으로 명확한 답을 지닌 엄밀한 과학적 질문이다. 즉, 답은 "예"나 "아니오"다.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려 냈을까?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3일 뒤에 다시 살아났을까? 우리가 현실적으로 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의 여부를 떠나서 그런 질문들은 모두 답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엄밀한 과학적 답이다." <만들어진 신> p.95

나는 도킨스가 얘기하는 것처럼, 역사적으로 정치를 잘못해서 많은 인간이 살육당한 것보다는 종교적인 이유로 죄없는 사람들이 살육당한 경우가 더 많고, 오늘날 기독교와 이슬람의 근본주의자들 때문에 세계가 평화롭지 못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근본주의는 성서나 코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자신들의 종교 이외를 인정하지 않는 절대적인 신앙을 갖는 집단 관념이다.  오늘날의 이슬람의 테러나 미국의 만행은 모두 종교적인 이유를 그 기저에 깔고 있다. 그런면에서 나도 도킨스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러한 만행이 있다고해서 우리가 종교 자체를 부정해야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본다.  나는 어떠한 종교건 간에 그 종교 자체의 이념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화합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본다.  어떤 종교에 살육을 가르치고 반목과 전쟁을 이념으로 삼은 경전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그러한 신념을 갖고 살아가려는 인간들의 잘못된 신앙과 생활이 오늘의 이 평화롭지 못한 세상을 만든 것이다. 마더 데레사와 조지 부시를 대비해보라.  그들은 같은 하나님을 믿지만, 한분은 일평생을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가르침을 실천한 분이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과 침략을 일삼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은 같은 성경을 읽었다. 조지 부시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침략과 살육을 옹호하고 이슬람 같은 타 종교인은 최첨단 무기로 쓸어버려야할 집단이라고 쓰여 있을까?

도킨스는 또하나 이 책에서 실패한 부분이 있다. 많은 부분 신의 존재의 허구와 성경이 소설이라는 관점을 증명하는데 노력하고 있지만, 그가 진정 신이 없다는 것또한 명백하게 증명하지 못했다는것과 19세기의 생물학자 다윈의 이론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진화론에서 한발도 나아가지 못했다는점이다.  무신론자들을 잠시 들뜨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신앙인의 신념을 그 정도의 논거로 흔들리게 하지 못했다. 도킨스는 증거를 대면 신을 믿겠다고 주장하지만,  신앙인의 입장에서 봤을때 그는 신이 없다는 명확한 증거도 대지 못했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도킨스는 과학자다.  과학에서 하나의 이론이 세워지기까지는 수많은 실험이 필요하다. 그러한 실험실의 과정을 거쳐야만 이론은 진실이 된다.  그가 증거를 대라고 하는 것은 그의 직업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은 과학자의 엄밀한 태도로는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성은 과학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접근해서 성서속의 사건들을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간단히 예를 들어 예수님의 기적들은 모두 초자연적인 현상들이기 때문이다.  죽어 버린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가 잠에서 깨어나듯 살아난다는 것이 어찌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으며, 죽은 지 삼일만에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는 것도 과학적으론 절대 증명 불가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우리는 이 모두를 믿어야 한다.  그것을 믿고 난 다음, 우리 신앙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지, 도킨스는 절대로 알 수 없다. 그것은 그 신앙인만이 알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이다. 과학으론 설명될 수 없는 현상들이 내 영혼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정확히 설명할 순 없겠지만,  지극한 행복감, 충만감 같은게 아닐까?  

그러나 나는 앞서 얘기했지만 하나님은 리처드 도킨스까지도 사랑하실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능력에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때로 인간은 실수하고 또 범죄할 수 있지만, 언제나 돌아설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성경속에선 회개로 지칭하지만, 구태어 그렇게 종교적인 가치를 지닌 단어를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앞에 우리는 모든것을 포용할 수 있으며,  유신론이나 무신론을 뛰어 넘어 정작 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성서속 가르침의 으뜸은 사랑이다. 투쟁이나 전쟁이나 살육이 아니다.  사랑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사랑의 가르침이 허구임을 구태여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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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준 2007-09-24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킨스의 글을 비난으로서가 아니라 비판으로서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종교인들께서 종교를 옹호하신다면 세상은 더 행복할텐데요.

개츠비 2007-09-28 22:24   좋아요 0 | URL
저의 글을 비판으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kclamp 2007-09-2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이 진정 도킨스를 사랑한다면 그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합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거요. 안 준 것을 보니 그닥 사랑하지 않던지, 아님 줄 신이 없던지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전 후자라고 봅니다만.

개츠비 2007-09-28 22:24   좋아요 0 | URL
둘다 아니라고 전 봅니다^^

비로그인 2007-09-25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개츠비 2007-09-28 22:24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지나가던, 2007-09-27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수메르신화, 조로아스터교, 불교를 융합하여 만든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유일신 야훼가있다면야훼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저 방관할뿐이죠. 그분은 전지전능하지 않으시기때문입니다.신앙을 통해서 얻는 행복감과 만족감은 단지 심리적효과이지 야훼가 주는 효과는 아닐겁니다. 적어도 야훼는 사랑의 신은 아니니까요. 자신을 믿지 않는다하여 돌로 쳐 죽이라하고 근친에 아동학대까지 장려하며 우상을 파괴하고 자신을 믿는다하여 내리는 전제조건적인 사랑을 인간의 도덕에 비추어봐도 이성적으로 살펴봐도 인간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은 믿지 않을것입니다.절대적인 객관성을 지니지 못한 주관적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을겁니다,.

개츠비 2007-09-30 16:42   좋아요 0 | URL
종교는 주관성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영역이라고 봅니다.

흠,, 2007-09-2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킨스는 신이 있을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단지 그 가능성은 홉고블린이나 유니콘혹은 럿셀의 찻주전자나 제우스가 존재할 확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증명은 있다고 생각하는쪽에서 하는것이 증명의 기본인데..창조설이나 지구가 6천년되었다는 거짓을 대중에게 믿게하는 행위가 올바른지 모르겠습니다. 유럽이 그렇듯 이제 우리나라도 기독교를 추방할때인것같습니다.

개츠비 2007-09-28 22:29   좋아요 0 | URL
신앙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일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 주관을 지키시며 살아가는 것을 누가 방해할 권리는 없지 않을까요?

Powring 2007-09-29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른 사람이 신을 믿든, 안 믿든 전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만, 신의 이름을 빙자해서 권력을 지키고 그 권력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 못 됐다고 봅니다. 기독교만 보더라도 아무리 성경을 4차원으로 해석해도 이교도를 말살하라는 내용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한국 기독교는 권력에 너무 집중되서 한마디로 뿌리가 썪은 상태죠. 그 때문에 소수 올바른 종교인들마저 일반인에게 매도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불교와 힌두교는 종교보다는 철학으로 이해하는게 더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은 저도 저자와 같은 생각입니다.

개츠비 2007-09-30 16:40   좋아요 0 | URL
한국기독교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동의합니다. 저도 이슬람 선교는 반대하고, 이슬람을 상대로 개종을 목표로 한 전도도 반대합니다. 모든 종교는 나름 존중을 받아야 하고, 그래야만 세계가 평화로울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로 압니다. 제가 가진 성경에 이교도 말살에 대한 가르침은 없다고 믿습니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개인의 잘못된 신앙관이 원인이겠죠..

무신론자 2007-10-04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말꼬리를 잡자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님이 가지고 계신 성경은 어느나라것인지 궁금하군요..구약성경의 야훼가 한말이 님이 가지고 계신 책에는 없나봐요..자기를 믿지 않는자를 돌로쳐죽이고 이교도를 말살하라는 내용말입니다. 도킨스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은 님처럼 종교를 믿는것이 지극히 개인적이라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는것과 님의 신앙과는 별개의 것이 아닌가요? 자기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것이 님이 생각하는 종교의 전부라면 기독교가 주장하는 내용과 어떤 공통점이 있나요? 도킨스는 바로 그런점을 지적하고자 한것이라고생각합니다.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 종교의 핵심이라면 전지전능(모든것을 알고 모든것을 할줄하는)하시고 인류모든것을 좌지우지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것은 허구라고요..

개츠비 2007-10-04 12:01   좋아요 0 | URL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구약만 보고 성경을 얘기하면 안되지요. 구약의 말씀을 일점일획도 어기지 않고, 모세가 구약에서 가르쳐준 10계명의 율법에 수만가지 율법을 추가해 그 율법만을 잘 지키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던 시대에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은 그것이 잘못된 신앙이라고 바리세인(모범적 구약신봉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바리세인같은 사람들에게 예수님(하나님)은 십자가형을 받게 된 것입니다. 도킨스도 이 부분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신약 시대에 대해서는 크게 꼬투리를 잡지 못합니다. 이 책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신앙은 개인적 신념속에서 1차적으로 절대자와 교제한다는 측면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종교의 허구를 논하기전에, 올바른 신앙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며, 또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데 사회와 개인에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도킨스가 지적한 종교적 해악은 그 종교 자체의 이념보다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개인적 과오에서 기인하는게 큽니다. 과학과 종교, 모두 인간에게 이롭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과학의 정점에서 원자탄이 개발됐지만 그것이 현재의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이 됩니까? 모든 것은 그것을 대하는 인간들의 정신이 문제일 뿐입니다.
 
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 - Good Seed 말씀과 삶 시리즈 2
필립 얀시 지음, 차성구 옮김 / 좋은씨앗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가지고 있는 필립 얀시의 책 8권 가운데, 세번째로 이 책을 읽었다.  아마도 제목 때문에 더욱 관심이 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교회를 나가고(물론 비번날에), 성경을 읽고(교회서적에 밀려 가끔), 스스로 기독교인(정말로 하나님의 기준으로봐선 어불성설)이라고 칭하며, 기도를 하고(식사때만) 그리고 교회서적을 읽지만(어쩌면 교회지식을 얻기 위해) 나는 점점 이상한 수렁속으로 요즘 빠져들고 있단 느낌이 든게 사실이다.  그러한 믿음의 틈새는 작게 시작된것 같았지만 이제 내 스스로 그것을 막아내지 못할만큼 큰 구멍을 만들어버리고 만 것 같다. 나는 요즘 겉으로만 신앙인이었고, 안으로는 내 멋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사람과의 교제 자체를 귀찮아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리고 내 안엔 어떠한 기준도 없이 그저 허깨비같은 믿음을 소유하고 신앙적인 지식만 늘어가는 이상한 괴물이 돼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이 책을 읽었다.

필립 얀시의 책을 연달아 읽고 있는 이유는 이 나이 지긋한 연배의 크리스챤 작가가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고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같이 초보신자나 할것 같은 신앙에 대한 의심과 고민을 정직하게 독자에게 표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위안과 공감같은 것 때문일 것이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이끄는 목회자들의 기도와 설교를 듣다보면,  내 믿음과 그들의 믿음이 비교가 되기 쉽상이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멀고 미숙한데 저들의 믿음은 저렇게 크고 높구나. 어떻게 하면 저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 또 의심과 믿음의 약함이 그저 나만의 문제이기나 하는 것처럼 그것은 항상 괴로운 문제였다. 

최근에 마더 테레사의 미공개 편지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신의 존재 문제가 또한번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세상엔 무신론자와 유신론자가 있고, 그들의 싸움은 역사 이래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살아서도 성자요 죽어서는 이미 신처럼 대우받은 성녀 테레사조차도 신의 침묵과 부재의 문제에 고민했다는 것 자체가 많은 이들에게 어떤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게 분명하다.  특히 무신론자들은 믿음이란 비합리적이고 성서는 오래된 소설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믿음을 갖고 있는 신앙인들이 테레사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점에 있다.  그 기사가 나왔을때, 나는 이 책을 읽고 있었다.  의심을 마치 죄처럼 생각하는 고지식한 목회자들을 비판하는 필립 얀시와 테레사의 정직한 고백이 내 신앙의 뿌리없음에 작은 위안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일평생을 신이 있다없다 라는 문제에는 관심조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20대 이후 줄곧,  신의 존재 문제로 고민해 왔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20대엔 적극적인 무신론자였고 이제 30대가 되어선 또 신앙의 입구에 도달해 있다.   그것은 바쁜 일상을 보내는 직업인이 돼 버린 지금에도 결코 버릴 수 없는 내 삶의 중요한 문제다.  오랜 시간 무신론의 입장을 고수한 내가 어느날 갑자기 기독교인이 돼 버린 것은 어쩌면 신앙을 갖고 있는 아내를 만나서 였는지도 모르지만, 이미 오랜시간 내 마음속에는 두가지 신념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지금은 무신론이 신앙의 힘에 패퇴당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 승리가 영원한 승리인가 하는 점이다.  어느 철학자는 무신론을 `강렬한 유혹'에 비유하기도 했다.   신앙인이 돼 버리면 모든 게 끝날것 같이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요즘의 내 자신을 뒤돌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진정한 싸움의 시작일 뿐인 것 같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고, 테레사 수녀처럼 신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부재에 깊이 실망할지도 모른다.

필립 얀시의 <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책 제목처럼, 지금 내 안에는 그분의 흔적이 너무나 희미해져 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내 자신이 신앙인 이라고 믿고 있으며, 또 신약성서속의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마음속에 담고 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세상에 널린 그 수많은 진리 가운데, 무엇이 진리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심은 믿음이라는 공간에 숨어있는 뼈대와 같다. 그런 골격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개된 장소로 이끌어내서 그것이 무엇인지 확연히 밝히는 것이다. 의심은 감추거나 두려워 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살아있는 조직을 가지고 그것을 성장시키는 단단한 골격이다. 만약 내가 지금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사람은 이 책을 읽지 말고 내려놓으라고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쓸 필요없이 이 문장을 끝으로 책을 마무리지어야 할 것이다.  왜 교회는 '의심'을 마치 적군처럼 간주하는가 ?"  pp.56-57

요즘 의심의 함정속에서 헤매는 동안 그러나 몇가지 중요한 변화가 내 마음속에서 일어났음을 정직히 고백해야 겠다.  그 결과는 내가 신앙속에서 멀어지려 했을때, 지금껏 살아오면서 경험한 결과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나는 앞서 언급했지만, 요즘 매사에 부정적이었고 또 사려깊지 못한 말들을 쏟아냈다.  내 안에서 나를 잡아주는 존재가 희미해져 버린 순간, 나는 타락의 롤로코스터 위에 올라와 버렸다.  가장 먼저 아내가 그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내게 다가와 포스트 잇에 이렇게 적어주었다. "항상 긍정적인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내 안에 그분의 존재가 사라졌을때,  역시 내 안의 사랑의 감정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가르침의 으뜸이 무엇이었나 ?  그것은 사랑이었다. 나는 내 자신을 그리고 주위를 사랑하지 않게 돼 버렸다.   그것은 내가 무신론자로 살아온 지난 몇십년간 반복해 느낀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항상 잘못된 길에서 나 자신을 방치해 둬 버렸었다.  

필립 얀시의 책 <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를 읽으면서, 나는 다시 내 마음의 믿음의 엔진을 보수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앙이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하고 청결한 마음과 의지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합리성과 과학적 사고를 내세워서는 믿음의 씨앗이 자라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불합리하게 보일때에도, 내 안의 믿음을 갖고 그분을 신뢰하자고 필립 얀시는 주장한다.  내 안의 믿음과 의심의 사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지금 믿음이 조금 우세한 판세를 유지하고 있다고해서 방심하면 안된다고 필립 얀시는 가르쳐준다.   필립 얀시가 궁극적으로 일깨우는 것은 그래서 믿음생활의 겸손함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 베드로에게 믿음을 공약하지말지어다 라고 가르쳐 주신것처럼,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언제나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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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필립 얀시 지음, 김동완 옮김 / 요단출판사 / 1998년 9월
평점 :
절판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필립 얀시의 책 8권 가운데 두번째로 읽은 책은 바로 이 책이다. 필립 얀시란 작가를 만나게 된 것은 아내 덕분이다.  결혼하면서 가져온 아내의 책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란 책이 있었다. 물론 필립 얀시의 책이다. 교회 서적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어든 책에서,  나는 많은걸 느끼고 수확했다.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내가 생각했던 방식으로 그가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필립 얀시라는 작가가 맘에 크게 와 닿았던 점은 신앙에 대해 진술하는 태도인데 그는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독자에게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진리를 진리로 서술할때 우리가 쉽게 빠지는 오류가 있다. 특히 신앙서적의 저자들은 성경이란 원전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의 풍요로움과 합리성을 담아내려 할때 자칫 근거를 강요로 이용하는 행태를 보이곤 한다. 

내가 보았을때, 필립 얀시는 대단한 독서가이자 인문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한 저술가 같다. 그가 인용하는 문학작품들의 진폭에서 그의 독서량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신앙적인 고민과 의문을 풀어가는 방식이 전혀 낯설지 않다.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내가 품고 있는 의심과 질문들을 그가 대신 고민해주고 그에 나름 답하고 있단 생각을 갖게 된다.  미국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복음주의의 대표적 저술가로 일컬어지는 그이지만, 이렇게 초보신자도 따라갈 수 있을만한 서술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가 겸손함이란 미덕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에서 나는 작가의 무난한 진술태도를 통해 이천년전 이땅에 `사람'으로 오신 은혜롭고 자리로우신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예수님의 등장이 그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부터 해명한다.  간단히 말해서 2000년전 이스라엘땅에서 그는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이 바라던 구세주는 오늘날 신약성서속에서 우리가 지켜보아온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라와 민족이 이민족의 침략으로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속에서 그 민족이 바라는 구세주는 어떤 사람일까? 난세를 풀어줄 `힘'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은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지금 자신들의 `왕'이 되어줄 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핍박 받았을까? 율법이 곧 신앙이란 등식으로 살아가던 사람들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정작 지상에 있으면서 그를 추종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다.  지상에서의 33년 동안, 그가 상대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거지, 문둥병자, 귀신들리자, 눈먼자, 이방인 들이다.  이들은 오늘날도 그렇게 환영받지는 못하지만, 그 시대의 유대율법의 규율속에선 절대 상대하지 말아야할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이처럼 내가 알지 못했던 역사적, 시대적 상황속에서 예수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을 읽고 다시 읽은 신약성서는 그 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내게 다가왔다. 쉽게 말해서 배경에 대한 입체감이 살아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여러가지 신앙적인 의문들에 대한 저자의 질문들은 곧 내가 품고 있던 의문이었고, 또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 품을 만한 의심들이다. 7월에 샘물교회 신도들이 탈레반에 납치 되었을때,  우리나라 네티즌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해  얼마나 숱한 비난과 조롱을 했던가? 그렇게 능력있는 하나님이시라면 왜 저들을 구원하지 못하는가 ? 자신들이 선택한 길이니 순교를 자랑스럽게 여기라 라는 비아냥을 나는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 질문의 우매함이나 잔인함을 생각하기에 앞서, 나는 상황의 유사함이 이천년전의 예수에게 던져졌던 군중의 비아냥과 놀랍도록 닮았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라는 군중들의 비꼼을 들으셨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들에게 능력을 보여주었다면, 인류 역사가 달라질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선 이 부분을 권력의 복종과 사랑의 복종이란 대비로 설명한다.  사람을 권력으로 복종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고통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자발적인 사랑에의 복종은 더디지만,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돼 있다.  이천년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사랑에의 복종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왜 망나니처럼 살아도 하나님은 관여하지 않으신가 ?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신다.  자발적인 사랑이 마음속에서 자라나기만을 기다리신다.  그런 사랑이어야만 영원할 수 있다.  권위와 권력에서 나오는 섬김이란 진정하지도 않고, 영원할리도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침묵, 예수님의 능력에의 절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부활절은 엔트로피와 붕괴가 증가일로에 있는 우주의 돌파구를 열었으며, 어느날 하나님께서 부활절의 기적을 우주적 규모로 확대하시리라는 약속을 보증한다.  우주적 드라마라는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아무런 명칭도 붙여지지 않은 중간적인 날, 곧 토요일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함이 좋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여인의 할머니는 루이지애나 전원의 한 성공회 공동묘지, 150년 된 참나무 숲 아래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묘지 비석에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단 한마디만 새겨져 있을 뿐이다.

"기다림."   - p.377 

신앙이란 무엇일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때, 품기 시작한 질문이다. 정말로 어려운 문제다. 때론 신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야 할 때가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신이 없다는 것을 과학으로 증명하려 든다. 리처든 도킨스이라는 사람은 <만들어진 신> <이기적인 유전자>를 쓴 무신론자이자 과학자다.  그는 `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인간의 능력을 주목하라'라고 대놓고 말했다.  나도 한때는 이 사람처럼 무신론자로서 무신론의 논리와 근거를 더 찾기 위해 혈안이 돼 봤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래서 내가 행복해졌을까? 사르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무신론자는 무엇보다 `용감해야' 한다 라고 썼다. 내가 신약성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을 만나기 시작했을때, 성서속에서 붉게 표시된 예수님의 말씀 부분에 주목했다. 과연 사람의 언어가 아닌 신의 언어는 어떤 것인가 ? 그 품격과 통찰력은 남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의심할 수 없었다. 내가 숱한 문학적 수사와 미문들을 보아왔지만, 성서속에서 만난 그 말씀들은 그 어떤 언어와도 비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말씀의 언어를 볼수는 있었다. 그 문장들은 `사람이 생각하고 구사할 수 있는' 품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명백하지 않았겠는가?

필립 얀시의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는 이천년전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노력한 책이다. 왜 오셨는지 ?  그리고 어떤 모습이었는지 ? 무엇을 남겼는지 ? 승천하신 이후 남겨진 우리들에게 그는 어떤 의미인지 ? 나름 작가는 객관성과 주관성을 넘나들며 우리에게 예수의 일대기를 혼신의 힘을 다해 보여주려 노력한다. 이 책은 한번 읽은 나는 이 책에서 만난 예수님을 정확히 마음속에 그려볼 순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책을 읽는동안 나는 시간과 역사를 뛰어넘어 한 인간을 또 위대한 인간을 느낄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그는 사람이었으나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었다. 나는 결코 그 점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  두번째로 읽은 필립 얀시의 책이 내게 준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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