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필립 얀시 지음, 김동완 옮김 / 요단출판사 / 1998년 9월
평점 :
절판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필립 얀시의 책 8권 가운데 두번째로 읽은 책은 바로 이 책이다. 필립 얀시란 작가를 만나게 된 것은 아내 덕분이다.  결혼하면서 가져온 아내의 책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란 책이 있었다. 물론 필립 얀시의 책이다. 교회 서적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어든 책에서,  나는 많은걸 느끼고 수확했다.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내가 생각했던 방식으로 그가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필립 얀시라는 작가가 맘에 크게 와 닿았던 점은 신앙에 대해 진술하는 태도인데 그는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독자에게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진리를 진리로 서술할때 우리가 쉽게 빠지는 오류가 있다. 특히 신앙서적의 저자들은 성경이란 원전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의 풍요로움과 합리성을 담아내려 할때 자칫 근거를 강요로 이용하는 행태를 보이곤 한다. 

내가 보았을때, 필립 얀시는 대단한 독서가이자 인문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한 저술가 같다. 그가 인용하는 문학작품들의 진폭에서 그의 독서량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신앙적인 고민과 의문을 풀어가는 방식이 전혀 낯설지 않다.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내가 품고 있는 의심과 질문들을 그가 대신 고민해주고 그에 나름 답하고 있단 생각을 갖게 된다.  미국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복음주의의 대표적 저술가로 일컬어지는 그이지만, 이렇게 초보신자도 따라갈 수 있을만한 서술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가 겸손함이란 미덕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에서 나는 작가의 무난한 진술태도를 통해 이천년전 이땅에 `사람'으로 오신 은혜롭고 자리로우신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예수님의 등장이 그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부터 해명한다.  간단히 말해서 2000년전 이스라엘땅에서 그는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이 바라던 구세주는 오늘날 신약성서속에서 우리가 지켜보아온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라와 민족이 이민족의 침략으로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속에서 그 민족이 바라는 구세주는 어떤 사람일까? 난세를 풀어줄 `힘'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은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지금 자신들의 `왕'이 되어줄 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핍박 받았을까? 율법이 곧 신앙이란 등식으로 살아가던 사람들 때문이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정작 지상에 있으면서 그를 추종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다.  지상에서의 33년 동안, 그가 상대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거지, 문둥병자, 귀신들리자, 눈먼자, 이방인 들이다.  이들은 오늘날도 그렇게 환영받지는 못하지만, 그 시대의 유대율법의 규율속에선 절대 상대하지 말아야할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이처럼 내가 알지 못했던 역사적, 시대적 상황속에서 예수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을 읽고 다시 읽은 신약성서는 그 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내게 다가왔다. 쉽게 말해서 배경에 대한 입체감이 살아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여러가지 신앙적인 의문들에 대한 저자의 질문들은 곧 내가 품고 있던 의문이었고, 또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 품을 만한 의심들이다. 7월에 샘물교회 신도들이 탈레반에 납치 되었을때,  우리나라 네티즌들은 기독교인들에 대해  얼마나 숱한 비난과 조롱을 했던가? 그렇게 능력있는 하나님이시라면 왜 저들을 구원하지 못하는가 ? 자신들이 선택한 길이니 순교를 자랑스럽게 여기라 라는 비아냥을 나는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 질문의 우매함이나 잔인함을 생각하기에 앞서, 나는 상황의 유사함이 이천년전의 예수에게 던져졌던 군중의 비아냥과 놀랍도록 닮았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라는 군중들의 비꼼을 들으셨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들에게 능력을 보여주었다면, 인류 역사가 달라질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선 이 부분을 권력의 복종과 사랑의 복종이란 대비로 설명한다.  사람을 권력으로 복종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고통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자발적인 사랑에의 복종은 더디지만,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돼 있다.  이천년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사랑에의 복종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왜 망나니처럼 살아도 하나님은 관여하지 않으신가 ?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신다.  자발적인 사랑이 마음속에서 자라나기만을 기다리신다.  그런 사랑이어야만 영원할 수 있다.  권위와 권력에서 나오는 섬김이란 진정하지도 않고, 영원할리도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침묵, 예수님의 능력에의 절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부활절은 엔트로피와 붕괴가 증가일로에 있는 우주의 돌파구를 열었으며, 어느날 하나님께서 부활절의 기적을 우주적 규모로 확대하시리라는 약속을 보증한다.  우주적 드라마라는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아무런 명칭도 붙여지지 않은 중간적인 날, 곧 토요일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함이 좋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여인의 할머니는 루이지애나 전원의 한 성공회 공동묘지, 150년 된 참나무 숲 아래에 잠들어 있다. 그리고 묘지 비석에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단 한마디만 새겨져 있을 뿐이다.

"기다림."   - p.377 

신앙이란 무엇일까?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때, 품기 시작한 질문이다. 정말로 어려운 문제다. 때론 신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야 할 때가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신이 없다는 것을 과학으로 증명하려 든다. 리처든 도킨스이라는 사람은 <만들어진 신> <이기적인 유전자>를 쓴 무신론자이자 과학자다.  그는 `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인간의 능력을 주목하라'라고 대놓고 말했다.  나도 한때는 이 사람처럼 무신론자로서 무신론의 논리와 근거를 더 찾기 위해 혈안이 돼 봤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래서 내가 행복해졌을까? 사르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무신론자는 무엇보다 `용감해야' 한다 라고 썼다. 내가 신약성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을 만나기 시작했을때, 성서속에서 붉게 표시된 예수님의 말씀 부분에 주목했다. 과연 사람의 언어가 아닌 신의 언어는 어떤 것인가 ? 그 품격과 통찰력은 남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의심할 수 없었다. 내가 숱한 문학적 수사와 미문들을 보아왔지만, 성서속에서 만난 그 말씀들은 그 어떤 언어와도 비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말씀의 언어를 볼수는 있었다. 그 문장들은 `사람이 생각하고 구사할 수 있는' 품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명백하지 않았겠는가?

필립 얀시의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는 이천년전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노력한 책이다. 왜 오셨는지 ?  그리고 어떤 모습이었는지 ? 무엇을 남겼는지 ? 승천하신 이후 남겨진 우리들에게 그는 어떤 의미인지 ? 나름 작가는 객관성과 주관성을 넘나들며 우리에게 예수의 일대기를 혼신의 힘을 다해 보여주려 노력한다. 이 책은 한번 읽은 나는 이 책에서 만난 예수님을 정확히 마음속에 그려볼 순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책을 읽는동안 나는 시간과 역사를 뛰어넘어 한 인간을 또 위대한 인간을 느낄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그는 사람이었으나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었다. 나는 결코 그 점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  두번째로 읽은 필립 얀시의 책이 내게 준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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