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기독교 (양장) 믿음의 글들 18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외 옮김 / 홍성사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원제는 `Mere Christianity'다.  이 가운데 영어의 `Mere'란 단어를 이 책에선 `순전한'이라는 말로 번역해 놓았다.  얼핏 보기에 대단히 어려운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Mere'란 단어는 [[ ① 단순한, ~에 불과한, 단지[다만, 그저] ~에 지나지 않는. ② (폐어) 전적인,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정도로 해석되어 있다.   저자는 왜 이러한 제목을 붙였을까, 이 책의 머리말을 읽고 나면 분명해진다.  기독교는 많은 교파가 있다. 같은 하나님과 같은 성경을 기반으로하는 공통점이 있는 반면에 또 교파간 교리상의 차이와 형식적인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같은 교파간 차이로 인해 서로간의 반목이 있어왔고, 역사적으로나 오늘날이나 이들 교파간의 싸움은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가 변증하고 싶었던 것은 어떤 불순물도 첨가하지 않는 기독교 자체의 가르침이다. 순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C.S  루이스는 필립 얀시의 책을 읽다가 알게 된 작가다. 이 사람이 원래 이렇게 유명한 사람인줄은 몰랐다. 그러나 얀시의 책에서 그는 심심찮게 인용되었고, 그때마다 그가 참 비중있는 작가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1898년 아일랜드 출생으로 옥스퍼드 대학교 영문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옥스퍼드대 모들린 칼리지 대학 교수를 역임한 사람이다.  대학에서 그는 고전문학을 배웠고 또 교수로서 가르쳤지만, 그는 많은 분야에서 재능을 펼쳤다.  요즘 서점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나니아 연대기>라는 판타지 소설을 쓴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는 아동 문학가였고, 또 시인이었고, 문학 평론가 였고, 소설가 였다. 그러나 이런 명성들에 앞서 그는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기독교 변증가(신학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이 책 <순전한 기독교>로부터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고통의 문제> 등의 3부작을 비롯해서 그가 기독교를 변증하고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쓴 책 모두는 오늘날 신학서로서는 최고봉의 자리에 올랐고, 회심기를 기록한 자서전과 그의 신앙적 고백들을 저술한 책들은 모두 스터디 셀러가 되었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의 저서를 이제야 읽게 된 것은 기독교 서적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이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순전한 기독교>부터 읽기로 한 나는, 그의 주요한 책들을 우선 모두 구입해 놨다. 10권 정도 되는 그 책들이 서가에 꽂혀 있다.  보기만 해도 마음 한켠이 풍성해지고 설레이는 이 마음은 무엇 때문인지 ?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의 책을 읽는다는 기쁨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래서 그럴까?   소문난 잔치에 먹을게 풍성했다.  이 책 <순전한 기독교>의 머리말을 읽고 잠든 날 밤,  내가 너무나 편안하고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와 같다.   인간이란 원래 자신의 신념을 보충하고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본능을 갖고 있다.  그래서 무신론자는 무신론의 신념을 더 보강하기 위해 노력하며 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이 그저 단순한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적인 변증을 통해서도 증명 가능한 것이 되기를 은근히 소원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보통, 신앙의 문제로 와서는 이같은 것이 통하질 않는다.  믿음은 근거를 가지고 믿기 보단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신앙인들 사이엔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믿음의 특성이고 조건이라고 우리가 배워왔기 때문이다.  보통의 목회자들이나 또 주위 신앙인들이 전도할 때 대게 이러한 태도를 보이곤 하는데, 이것이 나또한 옳고 그 자체가 신앙의 특성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C.S. 루이스는 이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믿음의 문제라고 해서 아무런 변증이 필요없고 기적을 기적 자체로, 성서의 사건들을 사건 자체로 아무런 의문없이 믿는것이 옳은 것인지, 루이스는 이 책에서 의문을 표시한다.  하나님은 과연 이러한 믿음을 기뻐하실까?  그는 아니라고 답한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 대해서 알기 위해, 끝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또 궁금해야하고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적 본능이다. 왜 종교적인 영역에선 이러한 본능적 질문과 의문들이 경원시 되는가 ?  루이스는 이것이 기독교인의 나태함과 게으름 때문이라고 질타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맹목적인 믿음을 자랑할 것은 못된다는 것이다. 거기엔 믿음 자체에 대한 끝없는 회의와 반성, 그리고 고민이 계속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과학과 종교가 함께 가지 못한다는 과거의 생각은 그러므로 잘못된 것이다.  과학적인 객관성은 종교적 세계에도 도입될 수 있으며, 기독교의 교리 자체와 신앙도 충분히 객관적으로 변증 가능하다는 것을 루이스는 이 책을 통해 보여줬다.
 
"그렇다면 인간이 빠져 있는 `곤경'이란 어떤 것일까요 ? 스스로 독립적인 위치에 서려고 한 것, 스스로 자기의 주인인 양 행세하려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입니다. 무기를 내려 놓고 항복하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그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 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것이 이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p.101
 
루이스의 이 책은 단순히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기독교의 교리들을 해설한다거나 신앙의 세계로 비기독교인들을 인도하기 위한 저서는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가장 비기독교적인 방식으로 변증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란 본래 어떤 존재인가 하는 매우 철학적인 고찰로 이어지는 흥미로움을 발산하고 있다.  그래서 비기독교인이 읽어도 변증에 대한 거부감은 일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  되도록이면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가, 혹시 관심이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무런 부담감 없이 이 책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그는 아마도 신앙에 이르진 못할지라도 기독교가 최소한 맹목적인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더불어 무신론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며, 자신이 알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엄연한 규칙성을 발견할수도 있을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온 규칙성은 우리가 흔히 도덕률로 말하는 것인데, 루이스는 이 부분을 너무나도 명백하고 선명하게 잡아주고 있다.
 
수많은 종류의 인간군상들이 있고, 그들 가운덴 악당도 있고 선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악당과 선인에게 공통되는 점이 한가지 있는데, 그것은 부당함에 대한 선명한 인식이다. 그러니까, 어떤 악인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악행에 죄책감을 느끼는 감수성을 상실해 버렸다치자. 그는 역사상 히틀러나 아니면 연쇄 살인마 정도는 될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도 선인이 가지는 부당함에 대한 감정은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우연하게 배급소에서 줄을 서서 선인들 사이에 서서 빵을 배급받는다고 해보자. 그 차례가 되었을때, 앞선 선인들에겐 빵을 두개 주고, 그에게만 하나를 주었다치면 그 악당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그는 분명히 눈에 핏대를 세우며 `이것은 부당하다' `공정치 못하다'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악행에는 눈뜨지 못하지만 그는 내면속에 일종의 `도덕률' `선의 법칙' 같은 것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이같은 본능적인 법칙들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점을 추궁한다.  그것은 학습된 것이 아니라, 인류가 창조되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함께 전수된 것이 분명하며, 이것이 그 어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는 말이다.  우주의 저 너머에서 우리 삶으로 그 원칙을 공급해 주는 분은 누구일까? 
 
"이 세상은 위대한 조각가의 작업실이고,  우리는 그 조각가가 만든 조상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작업실에는 우리 중 일부가 언젠가 생명을 얻으리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 - p.248
 
루이스는 또하나 이 책에서 내 인식을 분명히 바꿔준게 한가지 있다. 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종류와 그 경중을 얘기할때, 그는 모든 죄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를 `교만'으로 정의한다. 성적인 타락, 도둑질, 살인 등을 넘어서 이 교만을 가장 큰 죄의 목록으로 올린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교만하다는 것은 단순히 잘난체 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종이 주인행세를 하는 것 만큼 오만해 지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절대 완전하지 않다.  그런데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에 완전하며 공정한 척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 발아래 모든 것을 두게 된다.  좀더 가진 사람은 가난한 자를 업신 여기고,  좀더 배운 사람은 덜 배운 사람을 깔보기 마련이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교회 당직을 가진 자는 평신도를 그 아래 두고자 하며, 믿음이 큰자는 믿음이 덜 성숙한 사람을 얕본다. 이것이 교만의 실체다.  나중에는 하나님 위에 자신을 두려 한다.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 행세를 하려 든다.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러니 인간이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 명백한 사실앞에 교만은 얼마나 허황된 범죄인가?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무신론자들의 교만이다.
 
무신론자들은 매우 이성적인 척한다. 합리적이고 공정하고 그리고 과학이란 객관성을 무기로 이 세상이 운행하는 진리를 모두 터득하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곤 한다.  그들은 과학을 맹신하지 않는다고 또 주장한다.  과학은 언제나 새로운 이론과 진리에 주인 자리를 넘겨줄 수 있기에 맹목적이지 않다고 나름 공정한척 한다. 그러나 그게 사실일까?  과학이란 분야을 넘지 않으면 그들의 태도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과학을 앞세워 종교를 재단하려 들때, 합리적 이성을 가장한채, 이 세상의 지식의 원천이 되고자 할때, 과학은 종교 만큼이나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 버릴 수 있다.  또한 기독교의 교리나 성경 자체를 비판하려 들때, 무신론자들이 들고나오는 신학적 오류의 사실들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은 헛깨비 신학 지식으로 그같은 오류들을 비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 위해 우리가 얼만큼 공부하고 연구해야 하는지, 이들은 잘 모르거나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갖고 있지만, 나는 이슬람이나 불교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그 종교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신념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름대로 기독교의 가르침이 진리이며 내가 그같은 종교들에 대해 비판하지 않아도, 나는 내 신념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무신론자들이 너무나도 쉽고 유치한 방법으로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는가 ?  그들이 가장 쉽게 공격하는 것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가 ?  구약성서의 이해되지 않은 말씀들,  <만들어진 신>의 저자 도킨스가 언급하듯 구약성서속의 신은 시기와 질투가 넘쳐나는 잔인한 신인데, 그게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포장될 수 있는가?  왜 믿는 사람에게도 고통이 뒤따르는가? 왜 이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한가 ?  등등 수도 없이 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을 한꺼번에 풀어줄 정답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을 갖는다고 해서 모든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새로운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것에 불과하다.  무신론자들이 착각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무신론자들은 마라톤의 출발선상에도 서보지 않고, 마라톤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것처럼 얘기해 버린다.  피니쉬라인을 통과하기 까지 과정에 대해서는 오직 그 마라톤 코스를 달려본 자만이 얘기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 역경, 인내, 고통에 대해 어찌 그외의 자가 언급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을 알 수 있단 말인가 ? 
 
그래서 누구나 겸손함이 필요하다.  기독교 신자도 교만에 빠질 수 있고, 무신론자는 수도 없이 교만에 빠져든다.  자신의 지식을 과대포장하고,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신앙한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든, 무신론자가 되었든, 우리는 자신앞에 겸손해져야 한다.  C.S 루이스가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신앞에 겸손해지는 것이다.  겸손은 단순한 미덕이 아니다.  온전하지 못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져야할 덕목이다.  <순전한 기독교>를 읽는 사람이라면, 그가 종교를 갖고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자신의 삶의 분명한 비전과 선명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과 함께 3부작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고통의 문제>를 인내심을 갖고 읽어보는 사람은 세상과 삶에 대한 보다 선명한 인식을 얻고,  겸손함의 덕목을 배우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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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독단상]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from JelicleLim's Eye 2007-10-20 21:12 
    [기독단상]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http://jeliclelim.tistory.com JelicleLim ## 모든 종교는 진리의 단서를 가진다!! ## 여기서는 우선 기독교를 믿는 다는 것이 기독교외에 모든 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고 하면 어떤 종교라고 해도 그 안에 진리에 관한 단서가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어떤 종교든 모든 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