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 본 슬픔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동안  C.S 루이스의 글에 빠져 지냈다.  <순전한 기독교>를 비롯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고통의 문제>, 그의 회심기인 <예기치 못한 기쁨>을 읽었다. 그리고 다섯번째로 사랑하는 아내를 사별한 그가 슬픔에 매몰돼 써내려간 일기인 이 책 <헤아려 본 슬픔>에 다다랐다.  그리고 아직 사놓고 읽어야할 그의 책은 5권이 더 남았다.   나머지 책들은 좀 아껴두고 읽을 생각이다.  여전히 C.S 루이스는 가벼운 작가가 아니다.  내가 만나본 크리스챤 작가 가운데 글을 가장 어렵게 쓰는 사람이다.  기독교에 대한 변증서를 제쳐 두고라고 나는 소위 그가 자신의 회심기(자서전)을 쓸때는 좀 더 쉬운 문체로 독자들의 눈과 머리를 좀 편안히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20세기 초라는 가깝고도 먼 시간속으로 나를 편히 인도하긴 했지만, 그 자신의 그 예의 논리적이고 난해한 문체는 여전했다.  자서전은 수많은 상징적 단어로 채워졌고, 문체는 여전히 변증적이다.  내가 읽은 다섯권 모두 비슷비슷했다. 그러니 더이상 그에게 쉽게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의 책 5권을 읽고, 머리가 한참 무겁고 책읽기의 동력이 바닥난 이유가 아마도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글은 매력이 가득한 보물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무슨 이윤가?  먼저 그의 글이 뛰어난 독창성으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변증가답게도 그는 자신의 논리로 기독교의 본질에 다가가려 노력한다. 그것은 깊은 사색과 인생의 연륜속에서 오랜 시간 신앙의 고민과 회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순전한 기독교>에서는 교파들 간의 형식을 뛰어넘어 곧바로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르침에 이르고 있다.  <고통의 문제>에선 삶이 고통속에 존재하는 이유를 신앙안에서 답하고 있다.  완전한 무신론자로 살았던 그가 신앙앞으로 나와 하나님 아래 고개숙일 수밖에 없었던 여정을 그리고 있는 그의 회심기는 곳곳에 흥미로움과 지성적인 고민이 함께 내재해 있는 명저다. 다만 앞서 얘기했듯이, 그의 문체가 쉽게 그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사람들은 그를 난해한 작가로 오인하게 한다. 그러나 책읽기의 인내심을 조금만 발휘한다면, 우리는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의 신앙 간증속으로 접근할 수 있다.  게으르고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지적 고민과 회의속에서 다다른  한 신앙인의 성실하고 근면한 믿음과 조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신앙에 대한 완벽한 논리와 믿음이 조화를 이룬 사람인 루이스조차도, 개인적인 슬픔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야 말았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실망이고, 분노이자, 그리고 섭섭함 정도가 아닐까 한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선함에 대한 `의심'이 아닐 수 없다.  청년기의 회심이후 평생을 기독교의 가르침이 무엇이며 그것이 진리일수밖에 없는 이유를 변증하고 설득하며 살아온 한 신앙인이자 학자인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 후에 느끼는 극심한 슬픔속에 신앙조차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그 엄연한 진실앞에, 괴로워하고 고통하는 모습을 가감없이 써내려간 글이 바로 본인조차 출판될것을 생각지 못했던 이 책 <헤아려 본 슬픔>인 것이다.

 
"내게 종교적 진리에 대해 말해 주면 기쁘게 경청하겠다. 종교적 의미에 대해 말해 주면 순종하여 듣겠다. 그러나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 "  <헤아려본 슬픔, p.46>


루이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미국에서 이민온 여류시인 조이(Joy)를 59세에 만나 결혼했다.  그녀는 전 남편과 이혼하고 자식들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와 루이스의 친절한 배려속에 함께 지내다 사랑을 느끼고 결혼에 골인한다.  그 늦은 나이에 피어난 사랑은 이미, 조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들었고 몇년간 행복한 사랑의 시간이 어이진다.  그리고 아내 조이는 지병이 악화돼 투병하고 결국 루이스와 영원히 이별하고 만다.  늦은 나이에 만났지만, 그들은 서로를 너무도 사랑했고 그 사랑이 깊어갈수록, 그 사랑은 더 절실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헌신적인 투병기간을 아내의 곁을 지키면서 그가 쏟아냈을 기도의 양과 절박함이 어떠했을지도 명확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간절한 기도조차 아내의 죽음을 막아내지 못했다. 루이스는 몸과 마음이 지쳤고 그리고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삶은 더이상 의미조차 없게 돼 버렸던 것이다.  루이스는 아내가 죽고 한동안, 사람들을 만나는것조차 글을 쓰고 글을 읽는것조차 밥을 먹는 것조차 귀찮은 일이라고 이 일기속에 적어놓았다. 그의 슬픔이 어느정도 였는지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이 일기를 읽으면서 철저한 논리와 명증함을 앞세운 신학자다운 면모를 루이스에게 찾아볼 순 없다.  그는 명석했고 기독교의 가르침의 핵심을 누구보다 명확히 깨닫고 있는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그것은 이성의 영역이었을 뿐이다.  슬픔에 잠겨버린 머리는 오직 슬픔외에는 그 무엇도 생각해 낼 수가 없게 만든다.  이제 내가 교회내에 들어와 있다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내가 교회밖의 비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시간들이 지금은 아찔하기만 하다.  나는 내 삶에 출현하는 모든 고통앞에 무방비로 살아왔었다. 그것은 임기응변식 인생이었고, 불안한 외줄타기와 같았다.  나는 언제든지 낭떨어지로 추락할 수 있었고, 내 불완전한 이성의 힘과 세상적 지식의 풍성함이 진리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비전이 없는 삶이었다. 그것은 미래가 없는 삶이다.  이제서야 깨닫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어도 존재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연약함의 소유자들이다.  이 위대한 작가의 슬픔에 가득찬 일기를 읽어내려가면서 내가 또다시 깨닫게 되는 것은, 이성은 허깨비이고 세상적 지식은 요란한 빈깡통이며,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평화롭게 만들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루이스는 이 책의 끝에서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이가 엄마에게 투정하는 것은 그리 흉이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인간적 한계로 인해 하나님의 바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짧은 시야로 섭리앞에 실망감과 분로를 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것이야 말로 연약한 인간의 현실적 모습이고 정직한 자화상이다.  루이스의 슬픔에 가득한 일기를 읽으면서 그의 인간적 번민앞에 느껴지는 친밀감은 그때문이다.   결국 루이스의 일기는 마지막에 조이의 마지막 말을 전하며 끝을 맺고 있다.  루이스는 이렇게 다시 하나님앞으로 되돌아 갔다.

 
" `저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습니다.`"  그녀는 미소지었으나 그 미소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영원의 샘으로 돌아갔다. " p.10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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