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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 - Good Seed 말씀과 삶 시리즈 2
필립 얀시 지음, 차성구 옮김 / 좋은씨앗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가지고 있는 필립 얀시의 책 8권 가운데, 세번째로 이 책을 읽었다. 아마도 제목 때문에 더욱 관심이 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교회를 나가고(물론 비번날에), 성경을 읽고(교회서적에 밀려 가끔), 스스로 기독교인(정말로 하나님의 기준으로봐선 어불성설)이라고 칭하며, 기도를 하고(식사때만) 그리고 교회서적을 읽지만(어쩌면 교회지식을 얻기 위해) 나는 점점 이상한 수렁속으로 요즘 빠져들고 있단 느낌이 든게 사실이다. 그러한 믿음의 틈새는 작게 시작된것 같았지만 이제 내 스스로 그것을 막아내지 못할만큼 큰 구멍을 만들어버리고 만 것 같다. 나는 요즘 겉으로만 신앙인이었고, 안으로는 내 멋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사람과의 교제 자체를 귀찮아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리고 내 안엔 어떠한 기준도 없이 그저 허깨비같은 믿음을 소유하고 신앙적인 지식만 늘어가는 이상한 괴물이 돼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이 책을 읽었다.
필립 얀시의 책을 연달아 읽고 있는 이유는 이 나이 지긋한 연배의 크리스챤 작가가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고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같이 초보신자나 할것 같은 신앙에 대한 의심과 고민을 정직하게 독자에게 표출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위안과 공감같은 것 때문일 것이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이끄는 목회자들의 기도와 설교를 듣다보면, 내 믿음과 그들의 믿음이 비교가 되기 쉽상이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멀고 미숙한데 저들의 믿음은 저렇게 크고 높구나. 어떻게 하면 저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 또 의심과 믿음의 약함이 그저 나만의 문제이기나 하는 것처럼 그것은 항상 괴로운 문제였다.
최근에 마더 테레사의 미공개 편지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신의 존재 문제가 또한번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세상엔 무신론자와 유신론자가 있고, 그들의 싸움은 역사 이래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살아서도 성자요 죽어서는 이미 신처럼 대우받은 성녀 테레사조차도 신의 침묵과 부재의 문제에 고민했다는 것 자체가 많은 이들에게 어떤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게 분명하다. 특히 무신론자들은 믿음이란 비합리적이고 성서는 오래된 소설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믿음을 갖고 있는 신앙인들이 테레사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점에 있다. 그 기사가 나왔을때, 나는 이 책을 읽고 있었다. 의심을 마치 죄처럼 생각하는 고지식한 목회자들을 비판하는 필립 얀시와 테레사의 정직한 고백이 내 신앙의 뿌리없음에 작은 위안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일평생을 신이 있다없다 라는 문제에는 관심조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20대 이후 줄곧, 신의 존재 문제로 고민해 왔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20대엔 적극적인 무신론자였고 이제 30대가 되어선 또 신앙의 입구에 도달해 있다. 그것은 바쁜 일상을 보내는 직업인이 돼 버린 지금에도 결코 버릴 수 없는 내 삶의 중요한 문제다. 오랜 시간 무신론의 입장을 고수한 내가 어느날 갑자기 기독교인이 돼 버린 것은 어쩌면 신앙을 갖고 있는 아내를 만나서 였는지도 모르지만, 이미 오랜시간 내 마음속에는 두가지 신념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지금은 무신론이 신앙의 힘에 패퇴당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 승리가 영원한 승리인가 하는 점이다. 어느 철학자는 무신론을 `강렬한 유혹'에 비유하기도 했다. 신앙인이 돼 버리면 모든 게 끝날것 같이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요즘의 내 자신을 뒤돌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진정한 싸움의 시작일 뿐인 것 같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고, 테레사 수녀처럼 신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부재에 깊이 실망할지도 모른다.
필립 얀시의 <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책 제목처럼, 지금 내 안에는 그분의 흔적이 너무나 희미해져 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내 자신이 신앙인 이라고 믿고 있으며, 또 신약성서속의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마음속에 담고 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세상에 널린 그 수많은 진리 가운데, 무엇이 진리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심은 믿음이라는 공간에 숨어있는 뼈대와 같다. 그런 골격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개된 장소로 이끌어내서 그것이 무엇인지 확연히 밝히는 것이다. 의심은 감추거나 두려워 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살아있는 조직을 가지고 그것을 성장시키는 단단한 골격이다. 만약 내가 지금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사람은 이 책을 읽지 말고 내려놓으라고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쓸 필요없이 이 문장을 끝으로 책을 마무리지어야 할 것이다. 왜 교회는 '의심'을 마치 적군처럼 간주하는가 ?" pp.56-57
요즘 의심의 함정속에서 헤매는 동안 그러나 몇가지 중요한 변화가 내 마음속에서 일어났음을 정직히 고백해야 겠다. 그 결과는 내가 신앙속에서 멀어지려 했을때, 지금껏 살아오면서 경험한 결과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나는 앞서 언급했지만, 요즘 매사에 부정적이었고 또 사려깊지 못한 말들을 쏟아냈다. 내 안에서 나를 잡아주는 존재가 희미해져 버린 순간, 나는 타락의 롤로코스터 위에 올라와 버렸다. 가장 먼저 아내가 그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내게 다가와 포스트 잇에 이렇게 적어주었다. "항상 긍정적인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내 안에 그분의 존재가 사라졌을때, 역시 내 안의 사랑의 감정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가르침의 으뜸이 무엇이었나 ? 그것은 사랑이었다. 나는 내 자신을 그리고 주위를 사랑하지 않게 돼 버렸다. 그것은 내가 무신론자로 살아온 지난 몇십년간 반복해 느낀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항상 잘못된 길에서 나 자신을 방치해 둬 버렸었다.
필립 얀시의 책 <아, 내안에 하나님이 없다>를 읽으면서, 나는 다시 내 마음의 믿음의 엔진을 보수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앙이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하고 청결한 마음과 의지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합리성과 과학적 사고를 내세워서는 믿음의 씨앗이 자라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불합리하게 보일때에도, 내 안의 믿음을 갖고 그분을 신뢰하자고 필립 얀시는 주장한다. 내 안의 믿음과 의심의 사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지금 믿음이 조금 우세한 판세를 유지하고 있다고해서 방심하면 안된다고 필립 얀시는 가르쳐준다. 필립 얀시가 궁극적으로 일깨우는 것은 그래서 믿음생활의 겸손함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제자 베드로에게 믿음을 공약하지말지어다 라고 가르쳐 주신것처럼,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언제나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